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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明) 왕조 멸망사 : 만주(滿州)에서의 소용돌이 - (8)
게시물ID : history_13546짧은주소 복사하기
작성자 : Belisarius
추천 : 24
조회수 : 1931회
댓글수 : 2개
등록시간 : 2014/01/14 04:25:58
 
 
- 여진(女眞)족과 누르하치의 등장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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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明)대에 그려진 여진족 그림.
 
 
 
중화사상에 입각한 중국 역대왕조의 뭇 이민족에 대한 시선과 정책은 거의 항상 그래왔듯 멸시와 탄압 뿐이었다. 특히나 그 우월감이 한창 치솟던 명대에는 그러한 성향이 강화되어 탄압의 수준은 더 심해졌고 만력제 시대에는 명의 폭정에 항거하는 사건들이 종종 벌어지곤 했음은 만력시기의 병크를 다루면서 밝힌 바 있다.
 
 
그 중 과거 12세기 무렵에 부족을 통일한 저력을 바탕으로 금(金)을 세워 주인행세하던 요(遼)를 멸하고 한족의 송(宋)까지도 짓밟은 경력이 있는 여진족은 위험대상 1순위로 분류되어 명에서는 행여나 여진족이 부족을 통합하여 다시 중국본토를 위협하는 일을 미연에 방지하고자 크게 세 부족으로 분열시켜 놓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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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金) 태조(太祖) 아골타(阿骨打).
 
여진족을 단결시키고 당시 한창 자행되어 오던 요(遼)의 폭정에 항거하여 물리치고 금(金)을 세웠다.
그리고 훗날 금나라는 송(宋)까지 박살내버리는 위엄을 보여주었는데 이를 '정강의 변(靖康─變)' 이라 한다. 
 
 
 
그 세 부족이란 건주여진(建洲女眞), 해서여진(海西女眞), 야인여진(野人女眞)을 말하고 또 이 세 부족도 저들끼리의 내분과 명의 철저한 분열공작으로 각각 적게는 네개 많게는 대여섯으로 나뉘어 있어 명의 의도대로 여진족은 그 세력이 미미한 수준으로 전락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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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세기 무렵 여진족의 분포도.
 
 
분열시켜 놓았다지만 또 언제 아골타와 같은 유능한 지도자가 나타나 부족을 통일하여 들고 일어날지 모르는 일인지라 단순 분열정책에만 그치지 않고 거듭해서 저들끼리의 내분을 조장하고 중국의 주특기인 '이이제이(以夷制夷)' 를 살려 북방의 몽골을 견제하는 데에도 써먹는 등 어떻게든 여진의 힘을 줄이려고 애썼다.    
 
 
그리고 요동(遼東)을 대(對) 여진의 전초기지 삼아 여진족을 감독하는 요동총병(遼東總兵)을 보내 여진을 감시하고 관리하게 했음은 전에 밝힌 이성량(李成梁)을 통해 언급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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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성량(李成梁).
 
 
 
전에도 말했듯이 이성량은 여진족 전체를 관리하는 것보단 나머지를 아우른 여진부족 하나를 휘하에 두고 관리하는 것이 상대적으로 훨씬 효율적이고 수월하다 여겼고 여진의 세 부족 가운데 건주여진(建洲女眞)을 적극 지원해주며 그 지원을 바탕으로 다른분파의 여진족들을 억누르고 성장한 건주여진을 명의 복속하에 두고 관리했다.
 
 
그리고 그 전략은 효과를 봐 수십년간 명의 동북방은 평안할 수 있었다지만 다만 그 과정에서 심각한 부작용 하나를 초래했는데, 이용해먹은 건주여진의 민심을 잃은 점이다.

 
이성량이 건주여진을 택해서 적극 밀어준 데에는 어디까지나 이이제이 정책의 일환이며 건주여진은 그저 다른 여진족들을 견제하기 위한 이용가치 뛰어난 도구에 불과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명의 속내를 아는지 모르는지 건주여진에서는 명에 대한 복속의사를 끝까지 표명했고 명의 대군에 대항할 힘이 없던 부족의 명맥을 이어나가고자 애쓰며 동족을 치라는 요구에도 응하면서 협력해 왔던 것인데 문제는 건주여진의 부족장들의 죽음에서 불거진 논란에서 비롯되었다.
 
 
그 무렵 건주여진의 부족장들은 교창안(覺昌安) 탑극세(塔克世). 이 둘은 부자지간이다. 이성량에게는 충성을 바치며 동족상잔도 마다하지 않던 이들로 다른 여진 부족장들에 비해 비교적 명에 대해 협조적 태도를 취하여 그 공을 인정받아 당시 다섯부족으로 나뉘어있던 건주여진족의 한 축을 담당하는 건주좌위(建州佐衛)로도 임명되기까지 했다. 그토록 명에 대한 충성을 표해오던 이 둘에게는 참으로 비극적이게도 그 죽음에 명이 개입했다는 의혹이 일었던 것이다.    
 
 
이 둘의 죽음에 관해서는 설이 두가지 있다.
 
 
첫째, 다른 여진부락 족장인 니칸 와일란, 중국 음역으로는 니감외란(尼堪外蘭)과의 싸움에서 전사했다는 설.
 
 
둘째, 탑극세의 장인인 건주우위(建州右衛) 왕고(王果)의 아들 아대(阿台)가 이성량에 대항하여 반란을 일으키자 이를 진압하는 과정에서 전사했다는 설.
 
 
두 사례모두 여진족 간의 내란으로 보이지만 사실 그 이면에는 명의 사주가 있었다는 의혹이 강했다.
 
 
첫번째 설에서는 이성량이 니칸 와일란을 사주하여 고의적으로 교창안과 탑극세를 살해했다는 논란 있었고 두번째에서는 아대를 진압하는 중에 아대의 쪽으로 오인한 명군이 교창안과 탑극세를 죽였다는 이성량의 해명 관한 것이었다.
 
 
역사에서는 어느 쪽이다라고 확정하기는 어렵지만 어떻게 죽었건간에 그 이면에는 분명히 명이 개입했으며 특히 이성량 본인이 후원해준 건주여진의 세력이 급성장하자 이를 두려워하여 그 지도자들인 교창안과 탑극세를 제거했다는 추측에 대해서는 동일한 의견을 보이고 있다. 즉 토사구팽 당했다는 것이다.
 
 
진실이 무엇이든 간에 불러온 결과는 동일했다. 이 사건을 계기로 건주여진 내에서는 반명(反明)감정이 싹 트기 시작한다. 
 
 
지도자가 공작으로 어이없이 살해당하고 부족이 명에 의해 유린당하는 현 실태에 뭇 여진남자들이 치를 떠는 가운데 특히 탑극세의 아들이자 새로이 건주여진의 지도자가 된 노이합적(努爾哈赤), 누르하치의 분노는 이루 말할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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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이합적(努爾哈赤).
 
 
 
조부와 아버지가 이성량과 명에 의해 살해당할 때 누르하치는 이성량의 집에 인질로 잡혀있었다고 한다. 제 가족의 원수와 한 지붕 아래에서 살게 되었으니 심정이야 오죽했을까. 이성량이 조부와 아버지의 죽음에 유감을 표하며 그 시신들을 돌려주어 장례를 치르게 해주었다지만 누르하치의 눈에는 뻔뻔하다 못해 자신을 조롱하고 능욕하는 것처럼 보였을 것이다.
 
 
죽음을 목도하고도 당장 어쩔 도리가 없는 자신의 신세에 치를 떨고 한탄하던 누르하치는 머지않아 이성량 집에서의 머슴살이를 청산하고 건주여진 땅으로 돌아가 조부와 아버지의 뒤를 이어 족장이 된다.
 
 
하지만 말이 족장이고 지도자지 기록의 표현대로 "갑옷 열세벌 밖에 남아있지 않았다." 정도로 물려받은 집안과 부족의 실태는 열악했다. 누르하치는 이 날 명을 불구대천의 원수로 여기고 반드시 멸할 것을 하늘에 맹세한다.  
 
 
잠잠하던 만주에서 소용돌이의 조짐이 보이기 시작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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