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차 여요전쟁>
많은 분들이 잘 아실 거라고 생각합니다. 그 유명한 서희의 담판이 이루어진게 바로 이 전쟁이죠.
(분홍이 요나라)
당시 요나라는 고려와 송나라에 의해 외교적으로 고립되어 있었습니다. 송나라 입장이야 뭐 말할 것도 없고, 고려도 태조의 훈요십조에서 드러나듯이 거란족을 배척하는 입장이었으니까요.
이런 고립을 타개하고자(고려를 따까리로 만들고자) 993년에 소손녕이 고려로 침공해들어옵니다. 하지만 전략적 목표가 고려와의 관계 개선이었던만큼(거기에다가 안융진 전투에서 고려군에 한번 깨지기도 해서) 서희와의 담판으로 잘 마무리가 됩니다.
이 회담으로 고려는 강동 6주를 획득하고(그동안 요나라와의 친교하지 못하는 것이 여진 때문이라는 거짓말이 적절히 먹혔죠.) 요나라는 고려가 송나라와 친교를 끊겠다는 약속을 받아냅니다. 당시 강동 6주를 약속한 요나라의 내심은 어차피 제대로 개발하지도 못하는 땅을 명분상으로 넘겨준다는 것이었는데....
고려는 그 땅을 개발합니다. 위엄 쩝니다. 아주 단단한 요새 지대를 만들어버리죠. 이 요새들은 2차 전쟁에서도 활약하게 되고...무엇보다 요나라는 두번 다시 이 지방을 점령하지 못하게 됩니다.
<2차 여요전쟁>
대충 국사책에는 양규가 활약했다...정도로만 서술되었던 거로 기억합니다만, 이 전쟁에서 고려 역사상 가장 아찔했던 장면들이 펼쳐집니다.
1차 전쟁의 결과물로 고려는 송나라와 명목상 화친을 끊습니다. 그러나 이건 요나라에게만 친 거짓말이었고 뒤로는 송나라에 사신보내고 할거 다하고 있었죠. 그런데 강조의 정변이 벌어지고 그 와중에 어이없게 여진족의 추장이 살해되는 일이 벌어집니다. 이에 여진족은 요나라로 ㅌㅌ해서 이를 다 일러바치게 됩니다.
여진족의 도움을 얻게된 요나라는 성종이 직접 40만 대군을 이끌고 친정을 내려오게 됩니다. 하지만 이 군대는 서북면 도순검사 양규가 이끄는 강력한 방어 거점을 뚫지 못하고, 특히 흥화진에서 고전하게 됩니다.
결국 요나라 군대는 남진을 결정(후방에서의 고립을 불사하는 요성종의 결단력!!)하여 고려의 주력군을 상대하고자 하는데.....그 상대는 고려군의 총사령관 강조입니다.
(어째 이미지가 드라마 이미지 밖에 없네요.)
당시 강조는 고려 전역에서 긁어모은 30만 대군으로 서전에서 승리를 합니다. 하지만....
강조가 군대를 이끌고 통주성 남쪽으로 나아가서 물과 거리를 두고 진을 쳤는데, 하나는 통주 서쪽에 세 강물이 만나는 곳을 차지하고 진을 쳤는데 이곳에 강조가 머물렀고, 하나는 통주 근처 산에 진을 쳤으며, 하나는 통주성에 붙여서 진을 쳤다. 강조는 검차들로 진을 만들고 거란군이 쳐들어오면 검차들로 일제히 공격해서 모두 물리쳤다. 거란군이 번번이 물러가자, 강조는 적을 우습게보고 다른 사람과 탄기를 했다.
兆引兵, 出通州城南, 分軍爲三, 隔水而陣:一, 營于州西據, 三水之會, 兆居其中 ; 一, 營于近州之山 ; 一, 附城而營。兆, 以劒車排陣, 契丹兵入, 則劒車合攻之, 無不摧靡, 契丹兵屢却。兆, 遂有輕敵之, 心與人彈棊。
『高麗史』 卷127 「列傳」40 ‘叛逆’1
저기서 말하는 탄기란 바로 알까기입니다. -ㅅ- 거란군 정예인 우피실군이 엄청난 기동력으로 방심하던 지휘대를 박살내었고, 강조는 결국 포로로 잡혔다가 죽음을 당합니다. 여기서 사실상 고려의 정규군은 개박살이나고, 야전은 꿈도 꾸지 못하는 상황이 됩니다.
결국 요나라 군대는 서경까지 몰려들어오게 됩니다. 그리고 서경에서는 또 한편의 막장스토리가 펼쳐지게 됩니다.
현종은 도순변사 탁사정과 중랑장 지채문을 서경으로 보내 방비를 서두르려합니다. 먼저 지채문이 도달하였으나그 사이에 서경의 여론은 항복을 결정한 상태였고, 지채문에게 문조차 열어주지 않는 상황이었습니다. 간신히 서경으로 들어가 상황을 파악한 지채문은 추격조를 보내 서경이 보낸 항복사절을 잡아 죽이고 항전의지를 불사르다가 분노한 서경 백성들에게 쫓겨납니다.
한편 이와는 별개로 현종이 요성종에서 시간끌기용 항복사절을 보내놓은 상황이었습니다. 이에 흡족해한 요성종은 서경을 접수할 인원들을 서경에 파견상 상황...+ 진짜 항복하려고 했던 서경 = 고려 멸망...으로 이어질뻔했으나 탁사정이 이끄는 주력 군대가 간신히 서경에 도착하여 서경을 진압하고 방어준비를 서두릅니다. 여기에 요성종이 보낸 사절은 모조리 매복에 걸려 전멸당했다는 것은 서비스.
졸지에 농락당한 처지가 되어 몹시 분노한 요성종은 서경 공격을 명합니다.
탁사정은 대도수에게 동문으로 공격하도록 하여 시선을 이끌고 자신은 주력을 이끌고 서문으로 나와 기습한다는 작전을 내놓습니다. 작전대로 대도수는 결사의지를 다지며 거란군 본대를 공격합니다. 그리고 서문으로 나온 탁사정은....그대로 ㅌㅌㅌㅌㅌ
(이를 지켜보던 서경 백성들, 대도수의 심경)
분전하던 대도수는 별 수 없이 항복해버리고, 서경은 혼란에 빠지나 통군 녹사 강민첨이 간신히 활약하여 서경을 지켜냅니다.(3차 전쟁 때 부원수가 됩니다.)
이렇게 서경도 함락시키는데 실패하고, 흥화진에서는 여전히 발목 잡히고 있고, 심지어 양규가 다시 곽주를 탈환하는데 성공하자 요성종은 대담한 결심을 하게 됩니다. 직접 개경으로 쳐들어가서 현종을 사로잡고 전략적 우위를 바탕으로 전쟁을 종식시킨다는 거였죠.
이에 현종은 몽진을 결정합니다. 그 비참함은 먼 훗날 임진왜란 당시 왜군을 피해 도망하가던 선조보다 심각했습니다. 몽진가는 도중에 장수들이고 신하들이고 모조리 도망가버리고 백성들에게 습격당할 뻔도 하고 적의 무리에게 추격도 당하고 창화현 아전에게 무시를 당하는 등등...
이에 하공진은 요성종을 달래보겠다고 스스로 나서는데, 북쪽을 떠나서 얼마되지않아 바로 거란군의 선봉대와 바로 마주치게 됩니다. 조금만 지체했어도 바로 왕이 사로잡힐 상황이었던 거죠.(ㅎㄷㄷㄷ 그랬으면 바로 고려 멸망했을지도 모릅니다.)
여튼 하공진은 요성종을 만나
"이미 우리 국왕은 남쪽으로 수천리나 달아났음. 님들도 무리해서 여기까지 온거 아님? 앞으로 우리가 잘할테니 전쟁을 끝내지 않겠음? 우리 왕이 직접 친조도 하고 말 잘듣겠음"
이라고 구라를 깝니다. 요성종은 여기에 넘어가 철수를 결정하는데.....(어째 결정적인 순간마다 구라에 넘어가는 요성종의 안습함.)
서북지역에서 활약하던 양규는 요나라 군대를 그냥 보낼 생각이 없었습니다. 여기저기 게릴라전을 펼쳐서
나주(羅州)에 온 현종의 철병(撤兵) 교섭으로 적이 철병하자 구주(龜州) 방면에서 지키고 있다가, 구주 별장(別將) 김숙흥(金叔興) 등과 무로대(無老代: 義州 남쪽)·이수(梨樹)·석령(石嶺)·여리참(餘里站) 등에서 기습하여 7전 7승에 약 7,000명을 사살하고 잡혀가는 백성 1만여 명을 구해냈다. 이어 애전(艾田)에서 적을 기습하여 약 1,000명을 베었으나 운이 없게도 요나라 본대와 마주쳐서 장렬히 산화합니다.(잠시 묵념)
이 전쟁으로 양측 모두 커다란 손해를 입게 됩니다. 고려의 경우 북부지방이 초토화 되고 고려 사상 처음으로 개경이 함락되어 박살이 났습니다. 거란도 엄청난 병력 손실을 입게 되고 고려의 복속이라는 조기의 전략 목표도 달성하지 못하게 됩니다.(당연히 친조 간다던 현종도 친조를 안갔음.ㅋ)
<3차 여요전쟁>
2차 침입은 고려의 절망적인 디펜스로 간신히 막아냈으나 여전히 전쟁의 불씨는 남아있는 상황이었습니다.
요나라 : "야, 니들이 친조한다고 약속했잖아. 왜 약속을 안지켜? 니들이 양아치냐? 그리고 강동 6주도 도로 내놔.(처음 줄 때는 이리 잘 발전시킬지 몰랐지...)"
고려 : "ㅋㅋㅋ 어디서 오랑캐가 짖어대나. 그리고 줬다 뺏으면 뭔지 알지?"
(실제로 이런 언어를 썼을리는 없고.....하여간 이랬습니다.)
처음에는 국경지대에서 투닥투닥 거리는 정도였지만, 결국 1018년 소배압이 이끄는 10만 대군이 침공해옵니다. 하지만 고려 군대는 그 이전까지와의 고려 군대와는 달랐습니다. 강감찬을 상원수, 강민첨을 부원수(2차 전쟁 때 서경에서 활약했던 양반)로 하여 무려 7년간 준비한 20만 대군과 완벽한 작계로 무장하고 있었던 겁니다.
이로써 3차 전쟁은 수공(水攻), 기습전(奇襲戰), 청야전술(淸野戰術), 매복(埋伏), 회전(會戰), 포위섬멸전(包圍殲滅戰)을 차례대로 사이좋게 요나라군이 당하는 전쟁으로 기억되게 됩니다.
서전은 흥화진에서 일어났습니다. 이미 2차 전쟁 때 흥화진에서 발목 잡혀본 경험이 있는 요나라 군대는 흥화진을 피해 강을 도하하고자 했습니다.
이를 간파한 강감찬은 정예기병 1만 2천을 동원하여 매복을 시켜놓은 후, 강을 쇠가죽으로 막아 놓아서 요나라 군대가 희희낙낙하며 강을 건너던 순간 강물을 다시 풀어서 적들을 당황시켜놓고 매복한 기병을 동원하여 싹 쓸어버립니다. 이를 흥화진 대첩이라고 합니다.
(그야말로 살수대첩 마이너 버전. 참고로 이 사진은 살수대첩 사진으로 보이네요.)
하지만 서전의 패배에도 불구하고 요나라의 강력한 기동력은 여전했습니다. 여전히 날카로운 기세를 잃지 않고 그대로 개경으로 남진합니다.(병자호란 때도 이렇게 당했었죠...)
물론 고려군도 이를 가만히 두고 보지는 않았습니다.진격로 곳곳에서 유격전을 전개해, 부원수 강민첨의 군대가 자주 내구산에서 승리를 거두고, 마탄에서는 시랑 조원이 요나라 군대를 격파합니다. 여기에 김종현이 이끄는 1만의 철기군도 끊임없이 소배압의 본대를 쪼아대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개경 주변을 비롯하여 요나라 군대의 진격로에는 청야전술을 펼쳐서, 이미 안전한 보급로를 포기한 요나라군을 괴롭혔습니다. 결정적으로 2차 전쟁 때 개경을 홀라당 뺏겨버린 경험이 있는 고려는 강감찬의 주도로 개경에 성을 쌓아 두고 여기에 더해 고려 시대와 조선 시대를 통틀어 언제나 정예병력으로 평가받는 함경도의 군사들로 꽉꽉 채워넣은 상태였습니다.
간신히 개경에 도착해보니 눈앞에는 엄청나게 단단해보니는 성에 서 있고, 개경 근교는 폭격이라도 맞은듯 허허벌판이 되어있어 보급은 꿈도 못꾸고 계속되는 고려군의 기습에 병력의 출혈은 점점 심각해져 있는 상황이었던 겁니다.
(대충 소배압의 심정을 적절하게 묘사한 모습)
이미 전략 목표의 달성이 애저녁에 물건너 갔다는 사실을 깨달은 소배압은 1019년 2월 결국 후퇴를 결정하게 됩니다. 그리고 그의 후퇴로에는 저주스러운 강동 6주.....그리고 귀주가 놓여있었습니다.
다음 이야기는 다음 화에 계속하도록 하겠습니다. 끝.
하면 맞아죽겠죠? ㅈㅅ
강감찬은 귀주에 고려의 군대를 집결시켰고, 소배압과 요나라 군대가 귀주에 도착하자 보이는 것은 짠하고 등장한 고려 20만 대군의 완벽한 포진이었습니다.
고려와 요나라는 수일에 걸쳐 치열한 접전을 펼쳤습니다.(이런 대규모 회전은 국사에서봐도 그리 많지않습니다. 아군이 더 많은 경우는 더더욱 적죠.) 요나라 군대는 군세가 2배나 차이나고, 적지에서 보급도 끊겼던 군대라고는 믿기지 않을 정도로 쉽게 무너지지 않았습니다. 어째서 요나라의 기병대가 중국 북부를 차지할 정도로 강력했는지를 납득할 수 있는 상황이었죠.
그야말로 죽고 죽이는 대살육전이 펼쳐지던 와중에 귀주에 집결하지 못했던 김종현과 그의 1만명의 철기군이 전장에 등장합니다. 그것도 한참 난전을 벌이던 요나라 군대 등 뒤에 똭하고 등장한 겁니다.
그때의 등장 포스란.......
전장은 난데없이 등장한 1만 병력 덕분에 포위 섬멸전이 되어버렸고, 요나라 군대의 앞날은 매우 암울해져버렸습니다.
여기에 갑자기 북풍이 불어야 당연한 계절에 폭우를 동반한 남풍이 불어재꼇습니다.
기상이변에 요나라 군대는 겁을 집어먹었고 고려군은 그야말로 사기충천하여 요나라군은 사정없이 박살내었습니다.
전투 결과 10만 요나라 군대는 궤멸당해 간신히 도망친 소배압과 고작 4천명만 살아 돌아갔고 요나라의 상급 지휘관들도 다수 사망했습니다. 고려는 수만명의 포로와 병기, 군마 등을 획득했다고 합니다.
『고려사』에도 “거란의 패함이 아직 이와 같이 심함이 없었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3차 여요 전쟁은 고려의 완승으로 끝이납니다.
전쟁의 결과 요나라는 강동 6주에 대한 소유권 주장을 완전히 포기하게 되고, 고려를 굴복시키려는 시도를 접게 됩니다. 고려도 비록 엄청난 인명피해와 손해를 입긴했어도 영토가 확장되어 북방 개척의 의지를 보여줍니다.(고려가 왜 이름이 고려겠습니까?)
또한 여요 전쟁의 결과로 동북아에는 100년이 넘게 세력 균형이 이루어지게 됩니다. 요나라가 고려 침공을 포기한 상태에서 홀로 송을 병탄하기에도 부담이 따랐고, 송과 고려는 서로 믿지 못하는 우방이어서(백년에 걸쳐 줄기차게 서로 군사 원조를 요청하지만 서로 줄기차게 서로의 요청을 씹어먹는 관계) 요나라를 공격한다는 선택지 따위는 없었기 때문이죠.
그리고 여요전쟁 당시 가운데에 껴있다가 괜히 아작났었던 여진족들은....한 세기 후에 마침내 대오각성하여(그리고 매우 큰 요인으로 송나라의 삽질 더하기 해서) 금나라를 세우게 됩니다.
불편한 사실 하나는 끝판왕 몽골의 등장으로 금나라, 요나라 찌끄레기, 송나라, 고려 등 모조리 박살나고 고려는 간신히 부마국으로 생존하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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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 역사상 3대 대첩(살수 대첩, 귀주 대첩, 한산도 대첩) 중 왠지 인지도나 영상화면에서 귀주 대첩이 취급이 안습인지라 한번 작성해보았습니다.
보시면 아시다시피 절치부심한 고려군의 완벽한 판짜기와 전술, 극적인 장면들, 심지어 기상이변까지...엄청난 대서사시가 탄생할 수도 있는 역사적 떡밥임을 강조하고 싶었습니다.
물론 다른 대첩들은 소수의 병력으로 다수의 적들을 신묘한 전술로 승리한 쾌거이지만, 그렇다고 귀주 대첩이 두배의 병력으로 대충 이긴 전투 쯤으로 평가절하 받는건 부당하다고 생각합니다.
길었던 여요전쟁의 상황 속에서 요나라의 전략을 파악하고 이를 물리치기 위한 고려의 전쟁 수행 능력과 전술, 민족 포용 능력(위에서 언급된 대도수는 성씨에서도 보여지듯이 발해 사람입니다.) 등이 결정적으로 표현된 전투이기 때문입니다. 물론 반대급부로 대병력을 이끌고도 패배하는 전투가 있는 만큼, 대병력을 잘 갈무리해서 여러 세밀한 작전을 수행하고도 결정적인 한방을 펼칠 수 있는 능력 또한 대단하다고 평가할 수 있을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