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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魏)의 사건 및 반란들 - 中
게시물ID : history_13520짧은주소 복사하기
작성자 : Belisarius
추천 : 13
조회수 : 1583회
댓글수 : 4개
등록시간 : 2014/01/12 14:13:35
 
 
- 왕릉(王淩)의 역모 -
 
 
 
사마의(司馬懿)가 쿠데타로 조정의 후원을 받아 조상(曹爽) 일파를 제거하고 실권자가 되었다고는 하나 완전히 위(魏)의 대권을 장악한 수준은 아니었다. 
 
 
조상이 월권행위를 일삼았다지만 선황제의 고명대신이요, 또한 같은 조(曺)씨 성 가진 황족이었기에 전횡행위를 어느정도 감안해 주었던 것에 비해 사마의는 조상과 같은 고명대신이라 할지라도 어디까지나 나라의 신하였으니 사마의의 쿠데타는 획득한 정권의 정통성도 뒤떨어질 뿐더러 여러모로 민심도 뒤따르지 못했다.
 
 
아닌게 아니라 외지나 변방을 지키는 장수들 중에는 여전히 죽은 조상을 따르는 이들이 여럿 있었다. 게다가 병력도 거느리고 있는데다 군권도 행사할 권리도 부여받은 이들은 사마의에게는 상당한 위험요소였을 것이다.
 
 
하지만 반(反) 사마의의 기치를 내건 이는 비단 조상의 잔여세력만은 아니었다. 조상과는 무관하게 그저 대권을 쥔 사마의를 정계에서 폐출시키고자 사마의 타도를 표명한 경우도 있는데 왕릉(王淩)의 역모사건이 이에 해당한다.
 
 
 
왕릉(王淩)은 과거 동탁과 여포를 제거하고자 초선의 미인계를 이용한 후한의 사도 왕윤(王允)의 조카로 삼국지연의에서는 나오지 않는 인물이다. 그러나 덜 알려진 네임드에 비해 왕릉이 세운 전공은 혁혁했다. 동남의 오(吳)를 대적하는 정동장군(征東將軍) 직을 수년간 수행하여 오나라와 국경을 접하는 양주(揚州) 전선에서 오의 숱한 침입을 격퇴하여 북으로의 진출을 늘상 시도해오던 손권(孫權)의 꿈을 짓밟아 버린 장본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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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吳)와 위(魏)의 주요 전자이 되는 곳은 거의 항상 정해져있었다.
지도에서의 형주(荊州) 강릉~양양 일대와 양주(揚州) 수춘~합비 전선으로 두 곳 모두 오의 단골 침입루트였다.
특히 주요 전선은 이 양주로, 양주를 점거하고자 오에서는 손권 사후에도 대규모 북벌을 감행할 만큼 중요시 되는 지역이었다.
그러나 위의 역대 정동장군들의 선방에 의해 죄다 수포로 돌아갔으니 오나라 입장에서는 실로 한스러운 땅이었을 것이다.
 
 
 
서기 249년, 왕릉은 그동안의 공적을 인정받아 삼공 중 하나인 태위(太尉)로 전임된다. 년도에서 알수 있듯이 이때는 사마의가 조상을 막 축출했을 무렵이다. 고평릉 사건 때 사마의에 가담하여 거사직후 논공행상에 따라 벼슬이 높아졌다면 모를까 수년간 외직만 도맡아오던 터라 중앙에서의 정변과는 일체 무관했던 왕릉에게 사마의가 태위직을 내렸던 것인데, 둘 사이가 어느정도 친분이 있었다는 점을 감안하여 단순히 알고지내던 옛 정으로 벼슬을 올려주었다고 보기엔 힘들 듯하다.
 
 
내 생각엔 아마 당시 왕릉의 직책인 '가절도독양주제군사(假節都督揚州諸軍)' 와 관련이 있지 않나 싶다. 저 장황한 벼슬은 간단하게 말하자면 양주(楊州)에서의 군권을 행사할 권리를 갖는 직위다. 
 
 
각지에 힘을 지닌 조상파가 건재한 시점에서 사마의에겐 한사람이라도 더 자신의 편으로 끌어들이는 일이 중요했을 것이다. 특히나 힘으로 맞서기 위해서는 조력자가 필요했고 그 중 조상과는 무관하면서 양주의 병력을 거느린 왕릉은 더할나위 없는 최적의 대상이었을 터. 그래서 무려 삼공 중 하나인 태위로 임명하여 사들인 환심으로 제 편으로 끌어들이려 하지 않았을까.
 
 
그러나 이 예측이 맞다면 결과적으로 보았을때 사마의는 삽질만 한 셈이다.
 
 
서기 249년, 왕릉은 외조카 영호우(令狐遇)와 역모를 논의하여 지금의 황제 조방(曺芳)을 폐위하고 무제(武帝) 조조의 아들 초왕(楚王) 조표(曹彪)를 추대하여 황제로 앉힐 계획을 세우고 더불어 사마의도 제거하고자 했다.
 
 
좀 뜬금없는 부분이라 하겠다. 사마의는 그렇다쳐도 애꿎은 조방을 내치고 새로운 황제를 옹립하려 들고 있으니 말이다. 이유인즉 '현재의 황제가 어리고 무능한데다 그 출신마저 의문스러운 반면에 조표는 덕있고 똑똑하니 대신하는게 낫다' 였는데..
 
 
이때 왕릉의 정황상으로 미루어보면 좀처럼 이해되지 않는 부분들이 있다. 우선 무엇보다 굳이 반란을 도모할 이유가 없다라는 점이다. 직위는 삼공 중 하나인 태위에 이르러 남 부러울 것 없는 명예와 부를 누리며 살던 그가 무슨 이유로, 그것도 조상이 숙청당해 반 사마의 세력이 거진 소멸된 시점에서 홀로 왜 역모를 꾸몄는가 하는 것이다.
 
 
게다가 파벌로 치자면 왕릉은 조상보단 사마의에 가까운 인물이었다. 왕릉은 일찍이 사마의의 형 사마랑(司馬朗)과도 친분이 두터웠고 문제(文帝) 조비(曺丕)의 대에는 중앙에서 사마의와도 교분을 나누던 사이였다. 결국엔 빵빵한 인맥에다 명예와 부 모두를 갖춘 커리어였는데 뭐가 아쉬워서 그랬는지 궁금할 따름이다.
 
왕릉_1~1.JPG
 
일본게임 삼국지12에서의 왕릉 일러스트.
 
 
물론 어느정도의 추측은 가능하다. 나중에 역모가 발각되고 사마의에게 패해 붙잡혔을 때 남긴 발언(나중에 쓰겠다)으로 미루어보건대 제딴에는 나라를 위한 행동이라 여기고 있었는 듯하다.
 
 
그러나 구국의 결단이라 보기엔 또 부족한 면이 있다. 충신을 자처하는 사람이 권신이나 벌일 법한 황제폐위를 운운한다라는 것은 뭔가 앞뒤가 안맞다. 더구나 조방은 그저 나이가 어렸다 뿐이지 그 나이에 무능이고 어쩌고 할 건덕지가 있을까? 그리고 폐위하는 이유를 고작 조방의 불명확한 출신을 든 점도 얼토당토 않은 얘기다.
 
 
대상이 오직 사마의였으면 그나마 반 사마의 항거사건이었다고 이해라도 하지만 쌩뚱맞게 지금의 황제를 폐하고 새로운 황제를 추대하여 옹립한다라는 내용은 좀처럼 왕릉의 역모 본질에 대해 고개를 갸우뚱하게 만드는 부분이다.
 
 
다시 줄거리로 넘어가자면, 외조카 영호우와 논의된 역모계획은 철저하게 세워졌다. 왕릉처럼 영호우 역시 연주자사(兗州刺史)로서 연주의 군을 동원할 수 있었고 왕릉은 자신의 임지인 양주와 연주의 병력으로 사마의를 치고자 했다. 도성 낙양(洛陽)에서 벼슬살이 하는 아들 왕광(王広)에게도 역모사실을 귀띔하고 안에서 호응해줄 것을 요청했지만 왕광은 아버지의 역모를 만류했다고 한다.
 
 
 도중에 영호우가 갑작스레 병으로 죽는 사태가 벌어지지만 왕릉은 이에 굴하지 않고 저 혼자서 계속해나갔고 2년 후인 서기 251년, 기회를 엿보던 왕릉에게 그 찬스가 찾아온다.
 
 
다름아닌 외부적 상황에서 기인하여 때마침 오(吳)에서 침입의 움직임을 보였던 것이다. 적국이 침입해왔으니 마땅히 군사를 내어 막아야 할터. 왕릉은 이를 빌미로 적을 막는다는 핑계로 군사를 일으키려 들었다.
 
 
그러나 그 때 참으로 예기치 못하게 부하의 밀고로 왕릉의 역모는 만천하에 드러났고 소식을 접한 사마의는 즉각 몸소 토벌을 나서서 왕릉의 본거지인 양주의 수춘(壽春 : 윗지도 참고)으로 진격한다.
 
 
때아닌 기습에 왕릉은 일격에 박살이 났고 역모는 어이없게 종결되어 왕릉 본인은 포로가 되어 사마의 앞으로 끌려오는 신세가 되어버린다.
 
 
여담이지만 이때 사마의가 대동하여 온 장수는 제갈량의 친척동생인 제갈탄(諸葛誕)이었다. 제갈탄은 조상과 매우 친한 사이로 파벌로는 조상 쪽에 속하는 사람이었다. 그러나 고평릉 사변으로 조상일파가 숙청당할때 제갈탄은 깊은 관련이 없다 여겨 숙청의 피바람에서 살아남을 수 있었는데 이제는 동료를 죽인 정적을 돕고 있었으니...
 
 
하고많은 휘하 장수들 가운데 하필 정적의 잔당인 제갈탄을 데리고 그것도 옛 동료를 토벌하는 데에 써먹은 사마의의 잔인함에 눈길이 가지만 더 웃긴건 이 제갈탄이다. <삼국지>에서도 나오고 이 글에서도 추후에 다룰 내용이지만 훗날 제갈탄은 사마씨에 대항해 반란을 일으켰는데 이때 같은 사마씨 반란인 왕릉의 난과 역시 동일한 맥락인 관구검의 반란 토벌전에 모두 참전했으니 아이러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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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갈탄(諸葛誕).
 
나중에 똑같이 반사마씨 항전을 벌이면서 동일한 맥락의 사건인 왕릉과 나중의 관구검의 반란을
직접 나서서 쳐부수는 모습을 보여준다.
 
 
 
알던 정 보던 정 없이 단칼에 왕릉의 목을 날릴 듯한 기세로 쳐들어온 사마의였으나 의외로 막상 왕릉을 대하자 결박을 풀어주고 살갑게 맞이했다. 옥중에서 왕릉은 사마의에게 장문의 편지를 보냈는데 그 내용을 옮기면 이렇다.
 
 
"공께서 군을 이끌고 지척까지 당도했다는 말을 들었을 때 저는 이미 제 운명이 다했음을 알았습니다. 그러나 이를 한으로 생각하지는 않겠습니다..(중략)..이 어리석은 종놈이 감히 조정의 은혜를 입고도 이룬 일은 없으며 오히려 마음은 충과 의를 저버렸으니 그 죄가 수백에 달합니다..(중략)..이제 모든 사람들이 이를 알게 되고 하늘이 꿰뚫어 보았으니 이 모든 일을 숨길 수 없어 드러냄은 제 죄가 죽어 마땅함을 알기 때문입니다. 나를 낳으신 분은 부모이나 나를 살려주실 분은 당신입니다." - 위서 왕릉전
 
 
왕릉이 자신의 역모를 큰 죄로 인정하고 잘못을 뉘우치는 내용이다. 본문의 내용마냥 조정의 은혜를 입고도 오히려 충과 의를 저버렸으니 어쩌고 저쩌고.. 그런데 또 나중엔 말을 바꿔버린다.
 
 
이후 사마의의 명으로 왕릉은 낙양으로 압송되었데 가는 도중에 옛 친한동료인 가규(賈逵)란 사람의 무덤을 지나가면서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가양도(賈梁道)! 내가 대위(大魏)의 충신임은 그대의 혼령도 잘 알 것이오!" 
 
 
양도(梁道)는 가규의 자(字)다.
 
위에서 말한 그 발언이 바로 이것이다. 제 스스로는 충심에서 비롯된 반란이라 여기고 있던 것이다. 사마의에게 보내는 편지에서는 조정을 배반한 종놈이라 인정할 때는 언제고 이제는 또 사실 난 충신임ㅋ이라고 말하고 있으니..
 
 
그리고 얼마 후, 왕릉은 낙양에 채 이르기도 전에 독약을 마시고 자살한다. 제 아무리 사마의가 대우해줬다고는 하나 어쨌든 역적의 몸으로서 능지처참은 피할 수 없을 운명이었다.
 
 
법도가 그러하듯 역모죄는 구족까지 멸한다고 했다. 왕릉의 역모사건으로 그 집안의 삼족이 멸해진 것은 물론이고 졸지에 사건에 휘말렸던 초왕 조표도 처형당했으며 이미 죽은 영호우는 일명 부관참시로 다스려졌다. 특히 주모자인 왕릉과 영호우의 시신은 도떼기 시장판 한복판에 걸려 본보기로 삼아졌다.
 
 
사마의를 폐출하고자 도모한 반란이었다라지만 아이러니하게도 이 사건으로 사마의의 권세는 전보다 한층 더해졌다. 역모를 초장에 진압했다는 공로가 더해져 상국(相國)이란 최고의 자리에 올랐고 사건을 계기로 다른 역모를 미연에 방지한다는 이유를 들어 뭇 신하들을 비롯한 왕(王)과 공(公)에게까지 간섭하여 감찰을 벌이고 서로 함부로 교신도 못하게 한 곳에다 가두어버리는 횡포를 일삼는다.
 
 
다음은 관구검-제갈탄 반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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