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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륭제(乾隆帝)의 흑역사.txt
게시물ID : history_13510짧은주소 복사하기
작성자 : Belisarius
추천 : 23
조회수 : 3881회
댓글수 : 12개
등록시간 : 2014/01/11 16:27:22
454px-Portrait_of_the_Qianlong_Emperor_in_Court_Dress.jpg
 
청(淸)의 제6대 황제 고종(高宗) 건륭제(乾隆帝).
 
 
 
전대의 강희-옹정 치세를 이어서 소위 말하는 전성기를 이룩했다는 건륭제. 명군으로 칭송받는다라지만 대체 누구에게 칭송받았는지 의문스러울 정도로 치세동안의 행적을 보노라면 여느 암군 못지 않습니다.
 
 
 
- 양아치 건륭 -
 
 
 
1. 건륭제 시기에는 '의죄은(議罪銀)' 이란 제도가 있었습니다. 신하들이 죄를 지었을 경우나 황제가 그 과실을 범한 관리에게 죄가 있다고 판단한 경우에 설령 그 관리에게 죄가 없을지라도 그 벌금으로 반드시 은(銀)을 납부해야 하는 제도였는데요, 물론 진짜 과실로 인하여 벌금을 무는 경우도 있었지만 건륭제는 이를 악용하여 고의로 돈을 뜯어내는 모습을 보여줍니다. 더구나 이 납부금액은 나라 재정에 보탬이 되고자 국고에 저장되는 것이 아니라 건륭제와 황족들을 위한 유흥비로 쓰이고자 죄다 황실로 넘어갑니다.
 
 
2. 건륭제는 치세동안 잦은 순행을 나섰습니다. 자고로 황제의 순행이라 하면 단순 여행수준이 아니라 황제 외에도 황족들과 대소신료들까지 함께 황제를 수행할 뿐더러 행차를 호위하는 병력에다 또 잡다한 이런저런 일행까지 다 달라붙으면 일행의 규모는 수천을 훌쩍 넘기기 마련이었습니다. 
 
그런데 이 순행기간 동안 건륭제는 제국 각지의 성(省)에 들리면서 그 성의 총독 및 관리들과 상인들에게 거액의 재물을 요구합니다. (순회공연?) 앞서 밝혔듯 순행의 규모는 수천에 달했습니다. 이 일행을 감당하려니 오죽했을까요. 기록에 따르면 몽골의 왕들과 각지의 순무(巡撫 : 일종의 지방직)들을 비롯한 숱한 관리들이 줄을 지어 금과 진주, 상아 등의 귀중품들을 헌납하러 왔다고 합니다.
 
그리고 이렇게 삥뜯은 거두어들인 재물들 모두 황실의 재산으로 쓰였고요. 그러나 건륭제는 여기에만 만족하지 않고 매번 들리는 곳마다 그곳 상인들에게 황제가 머무를 행궁을 건설할 것을 지시합니다. 명색이 황제가 머무를 임시행궁이니 또 내부도 호화롭게 꾸며야 했겠지요. 각종 진귀한 물건들을 사다들여서 마치 자금성의 그것과 비슷하게 차렸다고 하니 죽어나가는건 상인들 뿐이었습죠.
 
 
3. 이것 역시 위의 사례처럼 건륭제의 순행과 관련된 일입니다. 가는 곳마다 삥뜯고 다닌 건륭제의 순행 중 최악의 순행은 남순(南巡). 그곳에서 순행길 사상 최악의 돈지랄을 벌이자 이를 감당하다 못한 현지 총독 객이길선이란 사람이 아우성치는 민중의 호소에 응하여 총대를 매고 건륭제에게 진언합니다. 
 
"폐하께서 현재 순행하시는 이곳 남쪽 땅은 아직 민생의 형편이 좋지 못한데다 또한 폐하께서 지나가실 이곳의 도로는 그 보수가 아직 덜 되어있어 이를 보수하자면 많은 돈이 들니, 이는 곧 백성들의 어려움과 무관하지 않습니다."   
 
즉, 우린 님의 돈지랄을 감당할 형편이 못되니 제발 꺼져주세요라는 말로, 객이길선으로선 자칫하면 불경죄로 모가지가 날아갈 수도 있는 인생 최대의 쇼부를 건 셈이었는데요. 그러나 이를 들은 건륭제의 반응은 "어쩌라고?"
 
또 어느 지방관리는 건륭제가 배를 타고 자신의 관할지로 온다는 말을 듣자 건륭제가 오는 수로에다 돌과 나무를 던져다가 못오게 아예 막아버리기까지 했다고 합니다.
 
 
4. 청나라 시기에는 10년마다 황제의 안녕을 기원하고 축하한다는 의미에서 돈을 거두어 들이는 풍습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점차 황제의 안녕을 기원하는 본래의 의미는 퇴색되고 건륭제의 대에 이르러서는 이를 빌미로 상인들과 대지주을 비롯한 일반 백성들에게서도 거금을 뜯어내는 악습으로 전락해 있었는데요, 이러한 풍조는 점점 심해져 건륭제가 수탈한 은(銀)의 액수는 막대했습니다. 어찌나 뜯어댔는지 이 바람에 파산한 상인들이 부지기수였다고 하고 가뜩이나 빈곤한 일반 백성들의 삶이야 말할 것도 없겠죠. 참고로 건륭제의 재위기간은 60년, 88세까지 살았습니다.
5. 청대에는 상인들에게 거액을 빌려주고 그 이자를 비싸게 받아먹는 악습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건륭제 시기에는 그 고금리마저 더 무거워졌고 심지어는 빌려간 원금을 갚고도 원금없는 이자를 상환해야 하는 괴랄한 상황도 종종 벌어질 정도였습니다.
 
 
6. 한번은 건륭제가 이런 명을 내립니다. "서화문에서 사직문까지 세 구역으로 나누어 양회, 절강의 상인들이 북경으로 상경하여 노래와 춤이 끊이지 않는 경관을 조성하게 하라." 여기서 양회나 절강은 모두 지방으로, 수천리 떨어진 지방의 상인들을 불러다가 생뚱맞게 수도 북경의 경관을 호화롭게 꾸미라고 지시한 겁니다. 황제가 까라고 하니 깔 도리 밖에 없었던 상인들은 상경하여 무려 은 40만냥을 들여 건물들을 죄다 뜯어고쳐 호화롭게 치장하고 건물의 기왓장마저 싹다 은을 도금하여 삐까번쩍하게 만드는 위엄을 보여줍니다. 게다가 이를 구경하러 나온 건륭제의 행차코스에는 돈을 더 쏟아부어 은 20만냥을 투자합니다.
 
 
 
- 문자의 옥(文字─獄) -
 
 
Qianlong11.jpg
 
건륭제(乾隆帝).
 
 
 
'문자의 옥' 이란, 공포정치의 일환이라 보면 됩니다. 말그대로 '문자(文字)' 의 옥(獄), 즉 문자의 감옥이란 뜻으로 간단하게 말하자면 나라를 비방하는 글을 함부로 못쓰게 만드는 탄압입니다.
 
원래는 중국 역대 왕조가 왕조에 대한 비난으로 들끓는 여론을 잠재우고 탄압하기 위해 종종 써먹던 방법이었는데요, 아무래도 문자의 옥이 유명세를 탄때는 사상 초유의 사상검열을 시행해 그 탄압이 유독 심했던 청나라 시기였습니다. 청나라가 한족(漢族)이 아닌 만주족에 의해 세워진 나라임을 비꼬고 여전히 반항하고 비방하는 한족을 억누르고 탄압하기 위해 시작된 문자의 옥은 강희-옹정제 시기부터 시작되어 이 건륭제의 대에는 절정에 달합니다. 
 
 
1. 한번은 위에서 언급한 남순기간 동안 건륭제가 저지른 죄를 열거하는 비방문이 나돌기 시작합니다. 비방문을 본 건륭제는 기겁하여 즉각 조사에 착수하였고 그 바람에 웬만한 신하들이 싹다 연루되어 줄줄이 잡혀와 조사를 받습니다. 그러나 이들 대다수가 무고한 사람들이었던지라 자신의 결백을 보이기 위해 또 애꿎은 이에게 누명을 씌워 서로가 고발하는 일이 벌어졌고 결국엔 주모자의 범위는 천여명으로 좁혀져 이들 모두가 공식적으로 체포됩니다.
 
그러나 무려 천여명이 사건에 가담했다기엔 아무래도 좀 무리가 있다고 본 조사관이 건륭제에게 재조사를 건의하지만 건륭제 曰,
 
 
"만약 네 조상이 욕을 먹어도 너는 가만히 있겠느냐?"
 
건륭제의 발언으로 미루어보아 비방문은 아마 건륭제의 남순기간 동안의 죄 외에도 만주족 드립도 친 모양입니다. 이에 격분한 건륭제는 그냥 싸그리 잡아들이라 일렀고 이 천여명은 잡혀들어가 갖은 고초를 겪다가 결국은 무혐의로 석방됩니다. (.....) 조사 끝에 밝혀진 바에 따르면 그 비방문을 퍼뜨린 사람은 건륭제의 남순코스에 속해있던 강서성(江西省)의 어느 부자.. 돈지랄을 일삼는 건륭제에게 불만을 품고 그러한 비방문을 퍼뜨렸던 것이죠.
 
 
2. 건륭 21년, 산동의 지방관리가 관할지방에 사는 유덕이란 사람이 '흥명흥한(興明興漢)' 이란 말을 썼으니 잡아다가 곤장을 쳐다가 죽이겠다고 건륭제에게 보고합니다. 익명으로 교묘하게 청을 비방하는 책과 비방문을 퍼뜨려도 다 꼬투리 잡아서 문제삼는 마당에 대놓고 청에게 망한 명나라와 한족을 흥하게 하겠다고 했으니 이건 그냥 그자리에서 목이 달아나도 이상할게 없는 문제였을 겁니다. 그런데 의외로 건륭제는 보고서를 기각합니다. 너그러이 유덕이란 사람을 용서했느냐, 그럴 리가요.
 
곤장으로 쳐서 때려죽이는 건 너무 쉽고 강도가 약하니 최대한 더 많은 고통을 줄 만한 형벌을 택해서 처벌하라는 지시를 내립니다.
 
 
3. 건륭 40년, 광서성(廣西省)의 어느 유생 오영이란 사람은 당시 건륭제가 펼치던 정책을 연구하고 새로운 방안을 구상하여 이를 건의하는 내용을 담은 상소문을 정성껏 써서 건륭제에게 상주합니다. 그런데 상소문을 읽던 건륭제의 눈에 아니꼬왔던 문구가 있었으니 '폐하의 덕은 크고 넓었으나 그 은혜는 널리 미치지 못했다.' 라는 부분이었습니다.
 
본래 오영이 의도한 바는 황제의 덕은 크고 넓었지만 다만 일부는 황제의 은혜를 받아들이지 못했다라는 이었지만 건륭제의 삐딱한 시선에는 자신이 무능해서 그 일부를 은혜로 교화시키지 못했다라고 보였던 것이죠. 게다가 그 문구에 들어있는 글자인 '弘(넓을 홍)' 글자가 거슬렸는데 건륭제는 자신의 본명인 '애신각라(愛新覺羅) 홍력(曆)' 에서의 弘을 무엄하게도 썼다고 빡치기까지 합니다.
 
애초에 황제를 기만할 뜻은 커녕 좋은 뜻으로 자신의 정책방안을 건의했을 오영은 졸지에 들어닥친 금군에 의해 붙잡혀 압송되었고 그 삼족은 물론이고 오영 본인은 거열형으로 사지가 찢겨 죽음을 당하고 맙니다.
 
 
4. 건륭제의 트집잡기는 계속되어 거의 병적수준에 이르렀었는데 이와 관련된 몇가지 사례가 있습니다. 한번은 호중주란 신하가 시를 썼는데 그 시구 중에는 "근심스러운 심정으로 흐리고(濁) 맑음(淸)을 논하네." 라는 구절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 시를 읽은 건륭제는 이를 문제삼고 나섭니다. 흐리다(흐릴 탁 : 濁)라는 글자 뒤에 감히 국호인 청(淸 : 맑음)을 썼다는 것이었죠. 그래서 호중주도 건륭제에게 처형당해 죽습니다.
 
 
5. 서술기란 시인은 '내일 아침 청도(淸島 : 아름답고 깨끗한 섬)로 가고자 한다네.' 라는 문구가 들은 시를 썼는데 예상하셨다시피 여기에도 청(淸)이 들어있어 건륭제는 이걸 빌미로 서술기를 죽이고 그 가족들도 노비로 만들어 버립니다.
 
 
6. 건륭제는 불온서적을 찾아낸답시고 책들을 모조리 거두어들여다가 검열하고 불온서적들로 분류된 책들은 모두 불태워버립니다. 이때 소실된 책은 모두 3천여종, 총 7만권에 달했다고 합니다. 특히 만주족의 뿌리가 되는 여진(女真)족이나 만주족의 기반이 되었던 요동(遼東)반도라는 단어, 특히 만주족을 오랑캐로 표현한 명대 기록 역사서들이 주 대상이었습니다.
 
청조를 비방하는 듯한 뉘앙스를 풍기는 단어나 문구가 하나라도 기록되어 있는 책이라면 모두 불살라졌고 건륭제가 파견한 관리들은 수시로 민간의 책방에 드나들며 불온서적을 조사하며 조금이라도 수상쩍은 책이라도 발견되면 즉각 압수되어 조사를 벌이곤 했습니다.
 
조정의 서고에는 죄다 압수해온 불온서적으로 가득 차게 되었고 나중에는 채울 공간마저 부족해져 서고 앞마당에는 기록의 표현마냥 산처럼 쌓였다고 합니다. 상황이 이러니 정상적인 문학창작 활동이 될리 만무했습니다. 무슨 글자, 문구를 트집잡아다 걸고 넘어질지 모를 일이었으니까요. 오죽했으면 당시 문인들은 서로 연락할때 절대 서간으로 하지 않고 조금이라도 이상한 내용이 적힌 책이나 하다못해 종이 쪼가리라도 나오면 즉각 없애버리기까지 했습니다.
 
그런데 웃기게도 건륭제의 탄압은 고증학(考證學)이 융성하게 되는 계기가 됩니다. 물론 그 이전인 명나라 말기부터 대두되었던 경세치용의 강조와 양명학의 폐단이란 도입배경도 있지만 이 당시 시대적 분위기 또한 고증학의 도입에 한몫했습니다. 조금이라도 시국을 논할라치면 목이 달아나게 생긴 판국이었던지라 지식인들은 다른 길을 모색하게 되었고 이러한 배경에서 도입된 학문이 바로 고증학입니다. 과거 역사기록들간에 내용이 상충되지 않는 부분을 바로잡고 연구하여 객관적-실증적 태도를 요하는 고증학은 억울하게 내몰려 죽음을 당할 일은 없었을 테니까요.
 
 
- 결론 -
 
 
 
역사에서는 건륭제 치세부터를 청 왕조 몰락의 전주곡으로 보고 있습니다.
 
축재에 몰두한 건륭제로 인하여 조성된 부정부패 분위기.
(여기서는 따로 쓰지는 않았지만) 잦은 대외원정으로 인한 재정의 위기.
 
특히 건륭제의 말년무렵에는 폐단의 수준이 절정에 달해 건륭제의 총애를 등에 업고 집권한 화신(和秀)의 전횡은 건륭제마저 눈감아줘서 이때부터 청의 관료사회는 부정부패가 만연하게 되었고요.
 
청 왕조는 물론이고 중국사에서 손꼽히는 명군이라지만 아이러니하게도 동시에 몰락의 길로 접어들게한 군주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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