헤어졌어요.
929일째 만나던 그날, 2017년 5월 24일.
저는 서울에 있었고 그녀는 부산에 있었습니다.
대뜸 문자로 딱 한마디
“우리 그만 만나는 게 좋을 것 같아.”
1분도 안지나 돌아온 한마디
“그래..알았어~”
제가 먼저 이별을 통보했습니다.
3년 가까이 사귀면서 서로 성격을 모르진 않아요.
그녀도 제가 문자로 대뜸 한마디 하면서 수없이 많은 생각했을 것이라 짐작했을 것이고,
저도 1분도 안지나 답을 했지만,
늘 그랬듯이 덤덤한 척 답장을 하는 그녀의 모습이 보였어요.
이제 카톡 프사를 바꿔야 될 차례겠죠?
그녀와 함께 다정하게 사진 찍은 제 모습이 보입니다.
참 웃기죠..
인터넷이 발달되면 발달될수록 아픈 흔적이 너무 많이 남아있어요.
카카오스토리, 비트 윈, 페이스 북, 인스타그램 까지.
이 와중에도 프사를 뭐로 바꿀지 고민중입니다.
뻔뻔하게 내 낯짝 드러내놓는 사진을 올리면 그녀가 더 화가 나겠지?
하늘을 배경으로 한 사진을 찍을까? 뭔가 울적한 느낌이 들게?
프로필 사진 없음으로 지정해놔?
아니야.. 그러면 친구들이 전화 오거나 카톡으로 물어보겠죠?
“요즘 잘 지내냐?” 라는 영혼도 없는 시시껄렁한 말로 시작해서
“그런데…걔랑은 잘 지내고 있는 거지?”라는 질문으로 이어지겠죠.
휴…어떤 것이 정답이 될지는 모르겠네요.
일단 사진을 안 바꾸기로 합니다.
그녀는 이미 사진을 바꿔뒀네요, 인스타그램 모든 사진도 지우고요..
역시 저보다는 추진력이 빨라요. 이게 그녀의 장점 이였거든요.
문자로 이별을 통보한 것에는 이유가 있었습니다.
사실 헤어지기 위한 시도가 한번 있었어요.
쌀쌀한 이른 봄, 저녁, 그녀를 카페로 불러냈었죠.
하지만 그녀를 보니 숨이 턱 막히더라고요.
저도 키가 정말 작지만 그녀도 키가 작습니다.
키는 작지만 저의 작고 소중한 행복 이였거든요.
차마 말을 꺼낼 수가 없었어요.
못 났지만 경상도 사나이가 흐르는 눈물 주체하지 못해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화장실을 다녀왔죠.
그녀를 목전에 두고.
그때까지 그녀는 울지도 않았습니다. 참 냉정했죠.
사실 그녀는 제가 무슨 말을 하고 싶은지 알았겠죠. 당연하죠..
그렇지 않고서야 제 말을 그렇게 오래 기다려줬을까요?
“미안하다. 나 오늘 도저히 말을 잇지 못할 것 같아. 내일 우리 다시 얘기하자.”
못난 놈… 실컷 분위기 다 잡고,
이미 보통 눈치가 아닌 그녀는 제가 하고 싶은 말이 무엇인지 다 알았을 텐데.
마시던 커피를 치우고 자리서 일어났죠.
집으로 터벅터벅 걸어가던 길.
그녀가 메시지를 보내왔습니다.
“조심히 잘 들어가..”
저는 지금 서울에서 자취를 하고 있지만,
그땐 부산 본가에 잠시 내려와있을 때였죠.
그녀의 집과 저희 집은 버스 두 정거장 거리 밖에 되지 않습니다.
그래서 저는 왕왕 그녀를 데려다 주고 집에 혼자 터벅터벅 걸어가기도 했었죠.
문자를 본 순간 저는 이성을 상실하고 왔던 길을 달려갔습니다.
그냥 얼른 달려가서 미안하다며 그녀를 안아주고 싶었어요.
너무 로맨틱한 상상이었을까요?
저는 사실 그녀 집 비밀번호를 알고 있어요. 하지만 그 와중에도 제가 열고 들어가면 실례인 것 같아 벨을 눌렀죠.
그녀는 깜짝 놀라며
“누구세요?” 하고 외쳤습니다.
“내…내다”
결국 저는 울음을 왈칵 쏟아냈어요.
“문 좀 열어줘”
그런데 돌아온 대답.
“아..집 청소를 안 해서.. 잠깐만 밖에서 기다려!!”
하…
그 와중에도 그녀는 어질러진 집을 신경 쓰고 있습니다.
저는 결국 비밀번호를 누르고 집에 들어가려 했어요.
그런데 깜짝 놀란 그녀가 반대편에서 손잡이를 붙잡더니 문을 열어주지 않으려 하는 거에요.
장면이 좀 우스꽝스러웠어요. 마치 도둑이 집에 들어오려는 것을 필사적으로 막으려는 여자 자취생 같은 모습 이였거든요.
그래도 제가 꼴에 남자 인지라 힘으로 이겨냈습니다!
그리고 대뜸 그녀를 껴안았어요.
그리고 펑펑 울었죠.
“야…야!!!”
한참을 울다 소리쳤습니다.
“내...하마터면 니한테 헤어지자 말할 뻔했다. 닌 왜 안말렸는데!?”
그리고 다시 꺽꺽 울었죠.
여자친구 어깨는 제 눈물로 뒤범벅이 됐어요.
마치 화장실에서 샤워를 하고 레버를 제 자리로 돌려놓는 것을 깜빡 했다가, 아침에 세수하려고 물을 틀었을 때 어깨에 물벼락 맞은 것처럼 말이죠.
여튼 그 이후로는 얼굴을 마주하고 이별을 통보하기 어렵겠단 생각이 들었어요.
이 얘기를 들으시면 제 성격을 다들 아실 겁니다.
전 참 허당이에요.
그녀랑 밥 먹으러 가자! 하고 멋있게 리드하며 맛스타그램에서 몰래 봐둔 맛집을 딱 찾아가면 금일휴무라고 적혀있었죠.
이런 적이 하루 이틀이 아니라, 제 친구들 사이에서도 파괴 능력자로 인정받았어요.
하루는 친구들이랑 망년회를 기획하고 식 재료를 좀 사와 달라는 부탁을 받았었어요. 마침 반여동 쪽을 지나가던 터였죠. 네비로 가장 가까운 롯데마트를 찍어보니 근방 500m거리에 있는 거에요.
“앗싸! 다행히 근처에 마트가 있네!”
그런데 찾아가보니,
롯데마트가 없어졌어요.
롯데마트 규모 아시죠? 그 커다란…
그것마저 마그네토가 야구장 공중에 띄워 버리듯이 없애버린 제 무용담을 들려주니,
친구들은 칭찬일색이었습니다.
다들 저보고
“와…앞으로 닌 진짜 조심해야겠다.”
“너희 집에 가면 너희 집도 이사 해버리는 거 아이가?”
사실 저 상병휴가 나왔을 때, 정말 저희 집이 이사를 한 적이 있었습니다.
하마터면 남의 집 찾아갈 뻔 했죠.
오늘 저는 속으로 몇 가지 다짐을 합니다.
당분간 절대 술을 마시지 않는다.
당분간 절대 부산을 내려가지 않는다.
절대 그녀와 연락을 하지 않는다.
1번의 경우는,
누구나 그런 적 있지 않을까요?
사람들은 술 마시고 나면 참 진상이 됩니다.
전 여친 전전 여친 친구 여친 다 전화 걸어요, 그리고 기억하지도 못할 말 토해냅니다. 결국 진짜 토하기도 하죠. 그 다음날 돌이킬 수 없는 자책감에 이불킥을 수십번 시전하죠.
2번의 경우는
제가 정말 자주 놀러 가던 곳, 친구들과 정말 자주 만나는 곳이 그녀집 쪽입니다. 몇 주전 원룸 계약이 다 되어 간다는 얘길 들었었죠. 정확하게 날짜는 기억이 나지 않습니다. 혹시라도 마주치지 않아야죠. 괜히 상처주지 않게요..
3번의 경우는
행여나 제가 절대 다시 그녀 곁으로 돌아가선 안됩니다.
그녀의 불행이 반복될 겁니다. 더 지치고 힘들게 할겁니다.
그리고 못난 저는 정말 그녀를 많이 울렸어요, 욱하는 성격을 가진 제 문제가 많았고,
게다가 장거리 연애를 하다 보니, 만날 수 있는 시간이 그다지 많지도 않았어요.
그래도 2주일에 한번은 꼭 제가 부산에 내려가서 그녀를 만났습니다. 하지만 보고 싶을 때 언제든지 곁에 있는 것이랑은 차원이 다른 것이죠.
하루는 그녀의 집에 왕만한 바퀴벌레가 튀어나왔어요.
서울에 있는 저한테 전화가 걸려왔어요.
“야~~!!아앍$@@!$#@% 바퀴벌레 겁나 크다!!! 우짜노!!!!”
평소 침착한 그녀지만
왕 바퀴벌레 앞엔 장사 없나 봅니다.
“야야 내가 여기서 우찌 해결을 해주노!! 그러지 말고 고무장갑 딱 끼고 눈 질끈 감고 팍 때려 잡아뿌라!! 잡고 나믄 별거 아니다!!”
그녀도 몇 번 시도를 해보려 했지만 번번이 용기가 안나 무너집니다.
결국 광안리에 살고 있는 공무원 시험 준비 하고 있는 제 친구 한테 부탁을 했죠.
그 친구 꽤 건장하고 제 여자친구랑도 꽤 친하게 잘 지냈거든요.
결국 제 친구는 저 말곤 발을 들일 수 없는 성지에 들어가고야 말았습니다.
그때 참 혼자 많이 괴로웠어요.
당장 필요할 때 전 그녀 곁에 없었거든요.
서로 이 생각을 하며 많이 버텨온 것 같아요.
지금은 비록 몸이 떨어져 있지만…
나중에는 떨어지고 싶어도 항상 붙어있을 사이가 되어 있을 것이라는.
저와 그녀는 올해31살.
이제 결혼을 생각할 나이였죠..
하지만
내 꿈과 그녀의 미래가 그린 모습을 등지고, 지금은 각자의 길을 걸어가려 하네요.
그녀도 좀 덜 허당이고 좀 더 욱하지 않고, 좀 더 자상한 남자 만날 수 있겠죠?
그녀는 마지막까지 절 배려합니다.
제가 말한 헤어지자는 말에 미련 가지지 않게 “그래 알겠어~” 단답형으로 빠른 답장을 하질 않나.
게다가.
그녀의 성은 “ㅎ”씨 예요.
카톡 즐겨찾기를 해제하고 애칭을 본명으로 바꾸고 나니
제일 밑으로 내려가서 보이질 않습니다.
연락처는 초성으로 자동정렬 되잖아요?
어느덧,
시간이 흐르고 또 흐르다 보면
그녀도 저도
이 연락처처럼,
저 밑에 한 켠, 아주 두꺼운 소설 속에 찢어진 한 페이지 정도로 남아있겠죠?
뭐하고 사는지 참 궁금하다…
엇 뭐야 결혼 했네? 남친은 어떻게 생겼지?
우씨..나보다 훨씬 잘생겼네…
하면서 전여친 SNS를 들어가보며 한탄할 제 모습
상상이 가기도 하네요.
끝으로..
곁에 있는 사람을 늘 소중히 생각하세요.
하지만 그 곁에 있는 소중한 사람을 끝까지 책임져줄 자신이 없다면,
절대 미련 갖게 하지 말고, 얼른 곁을 떠나야 합니다.
떠나는 와중에 화를 내거나 이전의 잘못을 질책하는 어리석은 행동은 하지마세요.
그 동안 그 혹은 그녀와 지내온 아름다운 추억이 분명 더 많습니다.
몇 가지 티격태격한 것을 들먹이며
쌓아왔던 소중한 추억마저 더럽히지 마세요.
이별은 고백할 때와 같이 용기 있고 끝까지 아름다워야 합니다.
저는 오늘부터 익숙한 것에 전혀 익숙하지 않은 듯 행동하며
하루하루 보내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