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래에 대한 말은 함부로 하는 게 아니라는 걸 알았어. 그러니까, 우리 다음에는 어디 갈래?”
우리가 마지막으로 갔던 여행에서 네가 내게 한 말이다. 우리는 그 여행을 끝으로 헤어졌다. 돌아오는 버스에서 우리는 아주 사소한 것으로 틀어졌고, 아주 사소하게 싸우기 시작해, 결국은 헤어지자 소리를 질렀다. 뭐 물론 그렇게 헤어지진 않았지만, 그 때 알았다. 우리 관계는 돌이킬 수 없는 금이 갔다는 걸.
너는 나를 가장 잘 알았고, 나도 너를 가장 잘 알았다. 헤어질 때 너는 내게 그랬다. “네 겉모습만 알고 있던 거 같아. 진짜 네가 뭔지 모르겠어.” 우리의 금은 내가 던진 물음표에서 시작됐을 거다. 이거 입어도 돼? 이거 해도 돼? 이건? 저건? 그 대부분의 물음표는 그대로 튕겨져 나왔다. 안 돼. 아주 짧게.
네가 좋은 남자라는 말은 한 번도 한 적이 없다. 너는 좋지 못한 사람이다. 나름대로 기다렸던 나를 한 순간에 팽겨 쳐뒀고, 애정을 바랐던 내게 이해를 바랐다. 널 배신한 나를 받아줬지만, 그대로 나를 배신하고 싶어 했다. 그렇다고 나는 좋은 사람일까. 그런 말도 하지 않았다. 나는 좋지 못한 사람이다. 너를 쉽게 배신했고, 배신한 나를 합리화 시켰다. 또 한도 없는 애정과 끝없는 사랑을 갈구했다. 너는 그런 나를 보며 종종 “밑 빠진 독에 물 붓는 거 같아”라며 힘들다는 말을 에둘러 했다.
우린 깨지기 시작한 우리의 관계를 인정하고 싶지 않아했다. 그래서 더욱 미래에 대한 이야기를 했다. 우린, 현재를 인정하지 않기 위해 미래를 끌어다 썼다. 미래를 끌어다 쓰기 위해 약속을 했고, 그 미래보다 먼저 망가져버렸다. 인정했어야 한다. 망가졌다는 걸, 깨졌다는 걸. 인정했어야만 했다. 괜히 끌어다 썼다. 괜히 약속했다. 이젠 어딜 가든 그 미래와 약속이 생각나리라.
너는 다른 사람이 생겼다. 내 눈으로도 확인했고, 소식으로도 확인했다. 이럴 것을 왜 내 미래를 꺼내 너를 담았는지, 왜 인정하지 않으려 했는지. 물어보고 싶은 게 한 가득이었다. 그 모든 걸 묻지 못하고 나는 입을 다물었다. 그리고 너를 사랑하지 않았다. 라는 말로 나를 위로 했다.
애정이 고픈 사람은 정상적이지 못하다. 특히, 나는 더욱 정상적이지 못하다. 너와 헤어지고 글을 쓸 때 이외에는 먹지 않았다. 식이장애가 왔다는 걸 인정하고 싶지 않아 아무것도 먹지 않았다. 네가 싫어하는 자해를 했다. 네가 싫어했기 때문에, 네가 나에게 바랐던 것들 중 하나였기 때문에. 소독하기 위해 꺼낸 칼에는 늘 굳은 피가 묻어있다. 불면증이 왔지만 차라리 좋은 거라 생각했다. 잠을 자지 못하면 감정적으로 생각할 시간이 늘어난다. 조금 더 솔직해 질 수 있다. 이 모든 게 한 번에 일어나면서도 일상생활에 문제는 없다. 일을 할 수 있고, 웃으며 이야기를 나눌 수 있다. 시답지 않은 농담도 진심으로 칠 수 있고, 가식적이 아닌 진심으로 모든 걸 해낼 수 있다. 속부터 천천히 무너지는 느낌은 이런 것이다.
그 밤엔 문득 네가 생각났다. 네가 더 생각났다. 너만이 생각나는 밤이었다. 지금 내 상태를 텍스트로 보내니 아닌 건 아닌 거잖아. 라는 말이 돌아왔다. 아닌 건, 아닌 거지. 나도 안다. 그렇게 잠에 들었다. 그리고 생생한 꿈을 꾸었다. 네 품, 네 냄새, 네 웃음 모든 게 완벽했다. 금 가지 않은 우리가 서 있었다. 편안함과 포근함은 어디 가지 않는다. 그리고 눈이 떠졌다. 깜깜한 커서만이 깜빡거렸다.
지금 만나는 사람에게 잘할 걸 나는 누구보다 잘 안다. 나에게도 그렇게 잘했던 너였으니까. 계속해서 그 사람을 만났으면 좋겠다는 생각과 함께, 어서 헤어지고 나에게 돌아왔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겹쳤다. 다 무너진 네가 돌아오는 꿈을 꾸곤 한다. 그래서 더 잠을 잘 수 없다. 그게 이루어지지 않을 꿈이라는 걸 알기에. 이루어 질 수 없는 꿈은, 역겹다.
난 이제 더 이상 네게 미련이 없다. 마지막으로 보낸 문자를 돌려보며, 웃음 지을 수 있다. 우리의 마지막 연결점이었던 내 물건들도 다시 내 품으로 돌아왔다. 더 이상 너에게 연락할 명분도, 이유도 남아있지 않다. 그래서 더 정리할 수 있다. 끊을 수 있다. 자기 최면에 가까운 말들을 계속 한다. 그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안 될 것 같아서.
너와 헤어지면서 나는 내가 첫 번째가 됐다. 놀랍지만, 이제까진 네가 내 첫 번째였다. 내가 첫 번째가 된 건 사실 처음이라 적응할 수 없었다. 이유 모를 우울감과 지루함이 찾아왔고 내가 이렇게 살아도 되는가에 대한 불안감이 밀려왔다. 그건 마치 파도 같아서 흩어져 보일 뿐, 다시 밀려왔다.
이 글을 한 달을 남짓하게 쓰며 난 참 많이 변했다. 생각보다 나는 더 예쁜 사람이란 걸 깨달았고, 아직 사랑 받을 수 있는 사람이란 걸 알았다. 네가 아니고도 나는 너무나도 예쁘게 웃을 수 있다. 이 걸 깨닫기 위해, 나는 우리가 처음 헤어진 작년 11월부터 다시 헤어진 4월말까지 너를 애타게 찾았다. 너는 나와 헤어지고 무엇을 깨달았니. “우리는 이제 우리에게서 벗어나야 돼.”라고 말하며 나와 이야기하니 편하다고 하던 너는. 나와 헤어지고 무엇을 깨달았니. 나보다 좋은 사람이 많다는 걸 깨달았겠지. 생각보다 우리 추억이 별 개 아니라는 것도 깨달았을 거다. 짐작하는 건 좋지 않지만, 이렇게 짐작이라도 하지 않으면. 네가 아직 나를 좋아할 지도 모른다는 착각에 빠질 거 같아. 짐작하게 된다.
나는 그 선 어딘가에 서 있다. 너를 만날 때보다는 나를 더 사랑하지만, 여전히 너를 그리워하고 있고. 너를 그리워한다곤 하지만 다시 만난다면 끔찍한 미래를 계속해서 가져와야 할 것 같다. 요즘 듣는 노래에서 그러더라. “많이 보고 싶지만 널 다시는 만나지 않았음 좋겠어. 아파 울지만 다신 너로 인해 웃지 않았음 좋겠어. / 전부 알 것 같아도 더 이상의 이해는 없었음 좋겠어. 묻고 싶지만 끝내 그 대답을 듣지 못했음 좋겠어.” 그 선 어딘가에는 이 노래가 있고, 내가 있고, 네가 있다.
엄청나게 많이 한 말. 잘 지내. 안녕. 그만하고 싶어도, 매일 입에서 맴돌아 어쩔 수 없다. 정말 잘 지내. 안녕. 우리가 우연히 스쳐지나가게 된다면 그 땐, 안녕이라고 다시 말할 수 있기를. 안녕? 안녕. 하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