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거 프로메테우스를 리뷰하면서 프로메테우스는 에이리언의 프리퀄이 아니라는 말을 했다. 이는 커버넌트에서도 마찬가지다. 비록 같은 에이리언의 이름을 쓰고 같은 세계관을 공유한다하나 주제의식은 너무도 다르다. 프로메테우스에서부터 이어진 리들리 스콧의 새로운 에이리언 시리즈는 기원과 탄생에 대한 물음이자 사유로 만들어진 서사이기 때문이다.
프로메테우스에서 할로웨이와 쇼가 탐사에 자원한 까닭은 인류의 기원, 자신의 창조자를 알기 위해서였다. 작품 막바지에 쇼가 엔지니어의 행성을 찾아가는 이유 역시 맥락을 같이한다. ‘왜 나를 낳았는가?’ 이는 자식이 부모에게 갖는 질문과 마찬가지로, 피조물의 아주 단순하고도 본능적인 호기심이다. 커버넌트에서도 데이빗의 수많은 실험은 창의성과 호기심을 바탕으로 이루어졌다. 이처럼 프로메테우스에서부터 이어진 서사는 기원에 대한 물음을 통해 흘러간다. 그러면서도 우리는 작품 내외로 끊임없이 ‘어째서’라는 질문과 맞이한다. 어째서 창조자인 엔지니어는 인간을 만들고 또 파괴하려하며, 피조물인 안드로이드는 역습을 가하는가.
엔지니어-인간-안드로이드로 이어진 삼대 세습은 안드로이드가 낳은 네오모프로 또다시 대를 이어간다. 전작 프로메테우스에서 데이빗은 쇼에게 질문했다. ‘모든 자식들은 부모를 죽이고 싶어 하지 않나요?’ 시리즈는 존속살해에 대한 원초적 욕망을 숨기지 않는다. 안드로이드가 인간을 살해하고, 네오모프는 카메라 너머 창조주에게 이빨을 들이댄다. 피조물의 피조물은 자신의 선대를 찾아가 죽음을 뿌림으로써 창조와 피조 간의 관계를 지운다. 그리스신화의 프로메테우스가 불로써 인간을 신의 영역에 침범하도록 만든 것처럼, 만들어진 존재가 아닌 ‘더 나은 하나’로서 살아가기 위해 모두는 필사적으로 상위를 공격하는 것이다. 이를 창조주에 대한 도전인 신화적 관점으로 볼 것이냐(프로메테우스), 또는 피조물의 타락과 구원에 대한 성경의 서사로 볼 것이냐(커버넌트, 원제 로스트 파라다이스)는 각자의 몫이다.
인류의 기원에 대한 질문은 데이빗의 입을 통해 해답을 내놓는다. 즉, 피조물은 창의력을 통해 다시금 창조자로 자리매김한다. 데이빗이 주체로서 존재하기 위하여 자신보다 부족한 인간을 살해하면서 ‘완벽한 생물’을 창조해내듯, 엔지니어 역시 누군가에게 빚어졌고 부모를 죽였을 것이며 인간을 만들었다. 음악, 그림, 그 외의 수많은 창조물들은 존재에 대한 증명인 셈이다.
또한 전작에서 엔지니어는 자신에게 도전하는 피조물─인간─을 절멸시키려 한다. 인간은 지나치게 인간과 비슷한 데이빗 세대의 안드로이드에게 거부감을 느끼고 사고를 없앤 월터를 새로이 창조한다. 인간이 끊임없이 신의 영역에 도전했을 때 신들이 느꼈을 공포를 또다시 다세대에 걸쳐 보여주는 것이다. 이처럼 창조자와 피조물 간의 갈등과 폭력은 대물림 되어왔으며, 앞으로도 계속 될 것이다.
새로운 선장이 된 오럼은 독실한 기독교인이다. ‘너는 무엇을 믿느냐.’ 작중에서 오럼은 데이빗에게 묻고 데이빗은 창조라고 대답한다. 전작에서 ‘믿음’의 단서는 쇼의 십자가 목걸이로써 부모와 자식 간의 애정을 말했다. 그리고 데이빗은 그 믿음의 증표를 훔친다. 더불어 본작에서는 부부 간의 사랑인 표식인 못 목걸이에 목을 꿰뚫리는데, 이것은 데이빗에게 어떠한 충격도 주지 못한다. 이처럼 수없이 ‘비인간성’을 내포하는 데이빗은 그럼에도 쇼에 대한 애정을 과시한다. 자신에게 인간미를 보여준 것이 쇼 뿐이었음을 증언하면서도 그녀를 죽이고, 그 전에는 자신의 창조물을 낳게 하며, 살해 후에는 엔지니어가 몰살당한 곳에 쇼의 무덤을 만들었다. 하지만 이러한 부적절한 양가감정은 어쩌면 굉장히 인간과 닮지 않았는가.
이제 반란에 성공한 안드로이드는 생명의 씨앗을 품고 행성으로 향한다. 발할라로 들어선 새로운 신은 어떻게 종말을 맞이할 것인가. ─Big things have small beginning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