숨이 가쁠 정도로 벅차게 달려온 그와 우리의 일주일. 싸움은 더욱 가열찰 것이고, 우리는, 아니 나는, 포기하지 않을 것이다. 이 땅에 상식과 정의가 흘러 넘치는 그 날을 볼 때까지. 요즘 나는 인터넷 공간에서 희망의 싹을 하나 발견한다. “헬조선”이라는 자조 섞인 단어가 쉽게 눈에 띄지 않는다는 것. 분노와 좌절의 자리를 희망과 기대가 대체했다는 반증 아닐까? 이젠 소리 없는 응원에 익숙해진 오십 중반 아재는 거침없이 논리적이며 활화산보다 뜨거운 젊은이들을 보면서 잡풀 솎아내고, 거름 주고, 살뜰히 보살펴서 아름드리 나무로 키울 일만 남았다. 벼는 농부의 발자국 소리를 들으며 자란다고 하지 않던가? 아이러니한 일이다. 한겨레21 안수찬에게 고마워해야 할 일이 생기다니. “덤벼라 문빠들” 댓글에 올라온 이미지 하나가 날 20년도 넘은 과거로 이끌었다. 한겨레신문 창간위원회 사외위원에 문 형님과 나란히 이름을 올린 이가
강정문, 내 길지 않았던 광고인생의 스승 중 한 분이다.
1970년대 지금의 동아가 아닌, 피 끓던 시절의 동아일보에서 언론자유를 위해 싸우다 해직된 기자들 중 한 명이다. 지금은 맘껏 욕을 들이켜고 있는 롯데그룹의 광고대행사인 대홍기획의 중추였다. 능히 수긍할만하다 싶으면 신입사원에게도 감히 설득 당해 주었다. 거나하게 취한 몸으로 호떡 한 봉지를 사 들고 와 “돌대가리 굴린다고 뭐가 나오냐, 얼렁 집에 가”라고 얘기할 줄 알았다. 외국 광고를 베끼는 게 만연해 있던 당시 풍토에서 “베낄 생각 말고 니 대가리를 믿어”라고 누누이 강조했다. 1999년 54세라는 아까운 나이에 고인이 되셨다. 안수찬 덕분에 난 강정문 이사를 추억할 수 있었다. 그리고 새롭지만은 않은 사실을 새삼스레 확인했다. 동아도 한겨레도 한때는 나의, 우리의 심장을 달뜨게 만드는 단어였다는 사실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