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임지 표지가 화제입니다.
타임지가 문재인을 ‘협상가’라 지칭한 것은 매우 적확합니다.
그것은 바로 제가 심상정보다 문재인을 더 지지하는 이유이기도 합니다.
그 이유를 설명합니다.
일부 심의 열성지지자 분들은 공약이나 워딩에서 보이는 선명성의 차이에서
심을 ‘정의’로운 개혁의 적임자로, 문을 결국 현 시대를 연장할 타협자로 ‘믿는 것’ 같습니다.
공약을 세세히 따지는 것은 여기서 하지 않겠습니다. 정보가 넘쳐나고, 각자 판단이 할 부분입니다. 저는 문의 공약이나 워딩이 현실가능한 선에서의 점진적 변화로서 이해되고, 동의된다는 것으로 갈무리합니다.
제가 지적하고 싶은 것은 진보 유권자들이 가진 ‘정의로움에 대한 믿음’입니다.
다시 말해, “심과 문중 누가 더 불의와 적폐에 맞설 정의의 구현자인가?” 라는 관점에서 정치를 보는 것이 위험하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사실 심의 열성지지자뿐 아니라, 문의 열성지지자가 가진 문제기도 합니다.
저는 정치를 정의의 구현으로 보는 관점의 위험성을 20년 가까이 진보정당을 지지해오며 깨달았습니다. 97년에 tv에서 처음 봤던 권영길 후보가 2002년 tv토론에서 말했던 “여러분 행복하십니까? 살림살이 좀 나아지셨습니까?”라는 사이다 발언은 제 가슴을 두근거리게 했었습니다. 물론 노무현 역시 저를 뜨겁게 만드는 정치인이었습니다.
하지만 정치는 정의롭고 깨끗한 자가 권좌에 오르면 만사를 형통하게 하는 복불복 게임 같은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보다 훨씬 길고 복잡한 투쟁과 합의의 과정이고 현실인 것 같습니다.
“노무현을 지켜주지 못했다”는 친노 유권자의 부채의식은 일부에선 종교적 신념처럼 오독되지만(물론 그런 지지자들도 일부 있습니다.) 제 생각에 그것은 시민의 참여민주주의에 대한 각성으로 읽힙니다.
시민의 감시와 견제, 그리고 참여와 지지로 사회정의를 구현하는 것이지. 특정 정치인으로 구현할 수 없다는 깨달음 같은 것이 친노의 변화를 준 것 같습니다.
포장하는 것이 아니라, 친노들은 2~3년 전, 문재인 지지율이 저점을 찍고, 김무성에게도 밀리던 당시, 그를 단단히 지지하면서도 대안을 동시에 찾았었습니다. 이재명과 안희정도 그때 이미 대안으로서 모색되고 있었습니다.
논점을 집중해서, ‘정의의 구현’을 정치의 본연으로 삼는 정치세력은 언제나 불의한 방식을 택하는 역설을 보여 왔습니다. 정의의 구현을 위한 정치세력은 자신들의 승리가 정의요. 자신들의 패배는 정의의 패배기 때문에 ‘결과론적 정의’에 매몰될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해방 후 분단사가 그렇고, 진보정당의 분열의 역사가 그렇고, 운동권내 NL과 PD의 반목이 그렇고, 친노가 노무현을 버렸던 역사가 그렇습니다. 또 박정희의 개발신화도 결과론적 정의로서 방법적 결함을 용인하는 입장을 보인다는 면에서 이러한 문제는 좌우를 가리지 않는 것 같습니다.
그렇게 결과론적 정의를 목표로 하면 언제나 과정을 희생하게 되는 건 인간사의 섭리인지도 모르겠습니다.
하여튼, 그러한 과정을 거쳐 깨시민으로 조롱(?)받는 민주시민이 탄생했다고 생각합니다. 그들은 4.19 와 87혁명에 이은 촛불혁명의 온전한 주체로서 이전 어떤 혁명도 해내지 못한 완벽한 비폭력의 혁명을 완성해 나가고 있습니다. 그들은 앞선 세대들이 주장한 것과 같은 결과적 정의의 구현이 아닌 과정에서의 정의. 바로 ‘민주주의’를 구현코자 하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물론 적폐에 대한 분노가 중심인 분들도 있겠습니다. 하지만 그들보다 민주시민의 수가 더 많았기에 비폭력 시위가 실현되었다고 봅니다.
심상정을 지지하기 때문에 문재인을 미워하는 분들. 또 그 반대인 분들은 피아를 구분해 적의 불의함에만 집중하는 확증편향을 경계해야 합니다. 그리고 심상정과 정의당은 한 번도 대선 급의 매서운 검증을 받은 적이 없습니다. 최근 불과 몇일? 몇주? 뿐입니다. 그것도 주요언론이 아닌, 온라인에서지만, 이미 여러 문제점이 발견되고 있지 않습니까? 저는 오래전부터 익히 알던 사항들이나... 이 역시 일일이 열거하지 않겠습니다.
중요한 것은 완벽한 정의의 세력이나, 완벽한 정의의 구도자는 없다는 것입니다.
때문에 모든 지지는 비판적 지지여야 합니다. 주인이 객을 집에 들이는 데, 일말의 의심이 없다면 주인이 위험해지지 않겠습니까.
다시 말해, 민주사회의 지도자는 정의의 구현을 대리할 메시아가 아니라, 민주시민의 충돌하는 요구를 민주적 절차에 입각해 타협적 결론을 도출하는 중재자여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타임지가 문재인을 ‘협상가’ ‘교섭가’라 표현한 것이 저는 너무 맘에 듭니다.
제가 문재인을 지지하는 이유는 바로 그가 인권운동가요. 민주주의자요. 확고한 원칙주의자이기 때문입니다. 닮고 싶은 사업가나, 따라가고 싶은 선동가가 아닌 우리의 각기 다른 요구를 중재하며 과정의 정의를 중시할 ‘협상가’이기에 그를 지지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심상정은?
심상정과 심지지자들은 문재인과 문지지자를 비난하지만. 저는 비판을 삼가겠습니다. 하지만 분명한 건, 진보정당이 오랜 역사를 통해 역설적이게도 반민주적인 작태를 너무나 많이 보여 왔다는 사실입니다. 그리고 심상정이 당대표를 하던 시절에도 마찬가지였습니다.
하여튼, 이것이 제가 심상정보다 문재인을 지지하는 가장 결정적인 이유이고,
또 하나 중요한 이유가 있습니다.
저는 심상정이 10%를 넘는 것보다. 문재인이 50%를 넘는 것. 그리고 마지막 여론조사들에서 나왔듯. 문재인의 40%선이 붕괴되는 최악의 사태를 막는 것. 이것이 훨씬 중대차한 문제라고 생각합니다. 이에 대한 정치공학적 얘기를 한마디로 하자면,
“문재인이 40%선 붕괴로 당선되면 홍준표와 자유한국당이 완전히 부활한다는 것입니다.”
지금은 문재인 정부를 견제할 왼쪽 힘을 키우는 것보다. 문재인이 오른쪽 극단과 맞서 싸울 힘을 최대한 물아 주는 것이 더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글이 길어졌지만 이렇게 두 가지가 제가 생각하는 심보다 문이어야 하는 이유입니다.
누군가에게 조그마한 참고가 되길 희망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