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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핵문제의 진행과 햇볕정책의 역할
게시물ID : sisa_919794짧은주소 복사하기
작성자 : 세실마리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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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회수 : 401회
댓글수 : 0개
등록시간 : 2017/05/04 16:24: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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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모님과 이야기 할 때마다 나오는 이야기 중에 하나가 햇볕정책 덕분에 북한이 핵개발 했으니 민주당은 안된다는 말씀을 자주 하시기에, 이에 대한 개인 생각 정리를 겸해서 글써봅니다.

1. 북한 핵개발의 시작
햇볕정책 덕분에 북한이 핵을 가졌다는 사람들이 있긴 하지만, 북한은 이미 60년대 초반부터 영변에 핵 연구 단지를 조성하여 소련으로부터 여러 지원을 받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이게 서방세계에 알려진 것이 89년도에 프랑스 위성이 핵시설을 촬영한 덕분에 늦게 알려진 것 뿐이죠.

(당연히 햇볕정책 실시일을 김대중 대통령 취임하자마자로 잡더라도 98년이 되어서야 시작됩니다. 북한의 핵야욕과 햇볕정책을 엮기에는 무리수이죠.)

어찌되었든 루마니아의 차우세스쿠의 죽음, 동독의 몰락 등 80년대 말에서부터 91년의 소련 해체까지의 급변하는 세계 속에서 김일성은 쇄국 정책을 본격화합니다. 그리고 소련이라는 뒷배가 사라진 상황에서 핵보유만이 자신들의 체제를 보장한다고 생각, 핵보유를 본격적으로 공표하기 시작합니다.

2. 북미 간 갈등의 고조와 극적 타결
당연히 핵보유국의 확산을 용납할 생각이 없었던 미국으로서는 북핵에 대한 강력한 사찰을 추진했습니다. 중간에 여러가지 갈등이 있었지만 어찌어찌 핵사찰도 하고, 1차 북핵위기도 카터의 방북으로 일부 갈등국면 해소도 하면서 클린턴 정권 당시 제네바 합의문이 체결되었습니다. 

핵개발을 포기하는 댓가로 평화적인 핵사용을 위해 미국이 경수로 건설을 지원한다는 내용이였죠. 문제는 제네바 협약 후에도 갈등이 지속되었고, 특히 매파로 가득한 공화당이 장악한 미국 상하원은 중유 공급, 제재 해제 등의 조치를 계속 늦추었습니다. 덕분에 계속 협상 테이블만 계속 열렸고 2000년이 되어서야 북미 공동 코뮈니케가 채택, 한반도 냉전구조를 점진적 해체해 나가자는 포괄적 접근방식에 대해 타결이 이루어졌습니다. 심지어 클린턴 정부 말기에는 직접 대통령이 방북하여 평화협상을 마무리하려고까지 했죠. 이 때가 북핵을 막는 가장 큰 기회였을 것입니다.

3. 부시정권의 집권과 반전
하지만 부시정권이 들어서면서 판이 엎어졌습니다. 마침 911 테러가 터지고 미국 전체가 강경파로 변하면서 북한도 악의 축으로 규정 당하고 제네바 협약에 대한 인증도 유보 당했습니다. 이에 무려 북한이 먼저 북미 대화를 제안하는 일이 벌어졌습니다.

문제는 그 당시 미국 정부는 네오콘이 점령하고 있었고, 점진적 해결보다는 일괄타결방식을 선호했으며 북한을 범죄자 취급하며, (동아시아 국가들이 다 그렇지만 그 중에서도 특히) 자존심을 중요시하는 북한의 자존심을 그대로 구겨버립니다. 2002년 제임스 켈리 국무부 차관보는 북한을 방문하여 북한 관료들을 '취조'한 끝에 열 받은 북한은 폭발하고 말았습니다.

결국 북미 대화는 끝장이 나버렸고, 미국은 제네바 합의 파기를 선언, 북한도 IAEA 사찰관이 보는 앞에서 핵시설 봉인을 제거하고 NPT도 탈퇴하고 미사일도 뿅뿅 쏘며 도발을 감행했습니다. 그 이후로는 그냥 경색국면이였죠.

4. 햇볕정책과 6자 회담
이 때까지의 흐름을 보면 알겠지만 북핵 문제에서 당사자인 한국은 철저히 배제되어 있었습니다. 북한 입장에서는 미국의 괴뢰국 취급하는 남한과 이야기 하는 것보다 미국과 바로 이야기하는 것이 훨씬 효율적이었을 것이고, 미국 입장에서도 굳이 남한을 끼워서 이야기를 복잡하게 만들 필요가 없었지요. 흔히 말하는 통미봉남 전략이었습니다.

햇볕정책의 목적 중 하나는 통미봉남 전략을 해제시키고 북한과의 외교에 대한민국의 목소리를 낼 수 있도록 만드는 것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이 전략은 6자 회담이라는 결실을 맺죠
물론 6자 회담을 가장 먼저 제안한 것은 미국입니다. 하지만 중간자적 입장에서 북한과 우호적인 제스처를 취할 수 있으면서 미국에 동조할 수 있는 국가라는 점에서 대한민국의 역할이 매우 중요했습니다. 물론 여러 차례 회담과 결렬이 반복되었지만, 06년도에 북한이 1차 핵실험을 실시하자, 발등에 불 떨어진 미국으로서는 6자 회담에 적극 참여, 07년에 드디어 2.13 합의가 이루어졌습니다.

즉, 영변 핵시설 가동 중단, 봉인에 대한 합의가 이루어 진 것입니다. 07년 11월엔 본격적으로 핵시설의 불능화 조치가 착수되었고, 08년도 6월에는 원자력 연구소의 냉각탑 폭파라는 엄청난 성과를 거두었습니다. IAEA는 영변 원자로 폐쇄를 공식적으로 확인하는 엄청난 쾌거를 이루는데 햇볕정책이 일조한 것이지요.

5. 재경색~현재까지
문제는 이명박 정권이 들어서면서 햇볕정책이 엎어졌다는 것입니다. 상호비방이 재개되고, 남북 핫라인 붕괴가 일어나는 혼란 속에서 영변 원자로 폐쇄의 중요성을 아는 사람은 한국 정권에 남아있지 않았습니다. 당연히 외교협상권은 사실상 다시 미국의 손에 넘어가고, 미국이 테러지원국 해제를 연기하자 북한은 결국 영변 핵시설 원상복구를 발표, 이를 달랬어야 할 남한은 상기 혼란 속에서 그저 핵시설 복구를 바라보기만 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결론

개인적으로는 햇볕정책이 무조건 답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햇볕정책의 목표는 결국 외교적으로 북을 달래면서, 경제적으로 북을 옭아매어 개방을 이끌어낸다는 것인데, 중국이라는 또 다른 뒷배가 있는 이상 경제적으로 완전히 옭아매기에는 한계가 있었고, 외교적으로는 미국의 기조가 바뀌면 노력이 물거품 되기 쉬운 불안정한 정책이였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햇볕정책은 북핵문제에서 일정 이상의 성과를 내었고, 미국이 좀 더 협조적이거나, 이명박 정권이 들어서지 않았다면 어쩌면 북핵문제는 해결되었을 지도 모릅니다. 거기다 햇볕정책이 엎어진 이명박근혜 정권 동안 북핵문제는 전혀 해결되지 않았고, 최소한의 성과조차 낸 적이 없습니다. 적어도 이명박근혜식 제재만능주의 정책보다는 햇볕정책이 옳았다는 뜻이겠지요.

그런 의미에서 이번 선거에서 문재인 정권이 꼭 들어서서 북핵문제에 대한 답을 내어주길 빕니다.

요약:
1. 클린턴 때 제네바 합의에 따라 북핵문제 해결할 수 있었는데 부시가 엎어버림.
2. 햇볕정책의 도움으로 6자회담이 성립, 영변 핵시설 불능화 진행됐지만 이명박이 엎어버림.
3. 투대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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