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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례]조선의 금속 활자는 왜 세상을 못 바꿨나
게시물ID : history_13385짧은주소 복사하기
작성자 : 알렉산드리아
추천 : 10
조회수 : 1453회
댓글수 : 2개
등록시간 : 2014/01/06 14:52:05

독일 마인츠의 금속기술자 요하네스 구텐베르크가 금속활자를 발명해 180권의 성경을 인쇄했을 때가 1450년대다. 고려에서 <직지심체요절>이 금속활자로 인쇄된 것은 그보다 앞선 1377년이다. 구텐베르크의 금속활자 발명은 인쇄문화의 대폭발을 일으켰고 이른바 ‘근대’의 형성에 핵심적 기여를 하며 서구 역사의 물길을 바꿨다. 우리 역사에선 어떤 일이 일어났을까?

강명관 부산대 교수의 <조선시대 책과 지식의 역사>는 ‘세계 최초’ 금속활자는 세상을 바꾸지 못했다고 말한다. 고려의 인쇄기술을 이어받은 조선에서 활자의 제작, 인쇄와 출판, 유통은 ‘주자소’와 ‘교서관’ 같은 국가기관이 사실상 독점했다. 즉 지식의 공급처 및 유통 주체는 국가였다. 어떤 책을 찍을지는 왕과 관료들이 결정했다. “그들은 체제 유지를 위한 책만 찍어냈다.” 사서삼경 같은 유학 서적과 대중 윤리서가 가장 많이 인쇄됐다. “군신, 부자, 부부 사이의 차별적 윤리의식”을 담은 <삼강행실도>는 아예 법률(<경국대전>)로 정해 보급에 주력했다. 구텐베르크 인쇄술이 중세를 붕괴시키는 쪽으로 작용한 반면, 조선의 금속활자는 중세 체제를 고착화하는 방향으로 나아갔다는 것이다.

강 교수는 3일 <한겨레>와 한 인터뷰에서 “우리 금속활자가 ‘세계 최초’라고 과도한 의미를 부여할 필요도, 그것이 서구처럼 근대를 만들어내지 못했다고 자괴감을 느낄 필요도 없다”며 “둘 다 서구에 대한 콤플렉스의 소산”이라고 말했다. 그는 “중요한 것은 실제 조선 사회를 정확하게 파악하는 것, 책과 지식이 지배체제에 어떻게 이용됐는지를 이해하는 것”이라고 강조했다.

안선희 기자 [email protected]


조선시대 인쇄문화의 특징은 국가의 독점이다. 국가가 출판권을 독점한 결과는 지식 유통의 제한으로 나타났다. 사진은 조선 금속활자와 조판을 복원한 모습. 1455년 ‘을해자’본 <주자대전>. 청주고인쇄박물관 제공

세계 최초 금속활자는 ‘그들’만의 것이었다

고려의 금속활자는 구텐베르크보다 수십년 앞섰지만, 유럽처럼 책의 대중적 공급과 지식 독점 해체, 독서인구 팽창으로 이어지지 못했다.

<조선의 뒷골목 풍경> <열녀의 탄생> 등 조선 시대를 오늘의 눈으로 새로 읽는 역사교양서를 활발하게 저술해온 강명관 부산대 교수(한문학)가 이번에는 책을 다룬 책, <조선시대 책과 지식의 역사>를 내놓았다. 조선시대 책에 대한 ‘모든 것’을 담겠다는 욕심이 엿보이는 책이다. 책의 물질적·형식적 측면인 인쇄기술, 출판 시스템, 유통 구조와, 책의 내용적 측면인 출판된 책의 내용과 사회에 끼친 영향을 함께 다룬다. 일반적으로 전자는 서지학, 문헌학 등에서, 후자는 지식사회학, 철학, 문학, 역사학 등에서 다뤄지는데, 이 둘을 종합하겠다는 것이다. 조선 전기를 집중적으로 다루되, 전체 조선시대를 개괄하는 이번 책을 필두로 하여 앞으로 조선 전기·후기 세권, 개항기 한권 등 네권을 더 내겠다는 것이 강 교수의 계획이다.

이 책이 금속활자 이야기로 시작하는 것은 한편 자연스럽고 한편 의도적이다. 많은 한국인은 서구인들이 칭송해 마지않는 구텐베르크(1450년대)보다 수십년 앞선 1377년, 고려가 ‘세계 최초 금속활자’를 발명했다는 데에 자부심을 느낀다. 하지만 이 책은 묻는다. 세계 최초라는 사실이 중요한가? ‘자랑스런 민족유산’이라는 광채 때문에 정말 봐야 할 것을 못 보고 있는 것은 아닌가? 그리고 <조선왕조실록>과 조선의 장서가 유희춘의 일기 <미암일기초> 같은 사료들을 꼼꼼히 훑으며 ‘조선시대 책의 역사’라는 커다란 태피스트리를 직조해 나간다.

강 교수가 보는 조선 인쇄문화의 결정적인 특징은 ‘국가의 독점’이다. 당시 책의 인쇄와 출판은 선조 6년(1573년) 이전까지는 주자소와 교서관이, 그 이후에는 주자소를 통폐합한 교서관이 관장했다.

금속활자 역시 여기서만 제작됐다. 교서관은 금속활자를 소유하고, 관련 기술을 보유한 장인들을 거느리고, 인쇄·출판의 시스템을 갖춘 유일한 기관이었다. 18세기 말에야 방각본이라는 민간의 상업용 서적이 출현했는데, 그 양과 영향력은 크지 않았다. 이는 유럽에서 구텐베르크 이후 50여년 동안에만 4만종 가까운 책이 발간되고 인쇄소가 250여개까지 늘어난 것과는 대조되는 것이다.

유통 역시 마찬가지였다. 인쇄된 책은 먼저 임금에게 진상하고, 중앙 관청에 배포된다. 그 뒤 왕실 친척, 고위 관료들에게 임금이 하사한다. 일반 민중은 물론 중하급 관료, 지방 양반은 하사 대상이 아니었다. 이 외에는 개인간 거래, 필사, 기증 등으로 유통됐는데, 이 역시 주로 양반계층 안에서였다. 홍문관이라는 국가도서관이 있었지만, 출입이 허락된 관료들만 접근할 수 있었다. 조선 최초의 서점은 19세기에 가서야 생겨난다. 지금은 연암의 <열하일기>와 다산의 <목민심서> 등이 조선시대 중요한 책으로 평가되지만, <열하일기>가 책으로 간행된 것은 1932년, 다산의 저술이 일부나마 출판된 것은 19세기 말의 일이었다. 이들 생전에는 지식인 사회 일부에서만 필사본으로 돌려본 정도였다.

조선 인쇄문화는 ‘국가 독점’ 
활자서 출판까지 교서관 관장 
서적 배포는 고위 관료서 멈춰 
도서관 출입도 허락된 사람만 
19세기 가서야 최초 서점 등장

지식 대중화 이끈 서유럽 달리 
지배체제 굳히는 도구로 이용 
수준 높은 기술·지식 빛바래 
값비싼 종이 등도 걸림돌 작용

이런 국가 독점은 중국, 일본과도 다른 조선만의 특징이다. 중국은 13세기 이미 민간 출판업자와 서적상이 등장했고, 18세기에는 베이징에 류리창 같은 거대한 서적시장이 출현했다. 일본은 임진왜란 전까지는 인쇄문화가 미미했지만, 임진왜란 때 조선에서 약탈해간 금속활자와 서적들을 밑천 삼아 도쿠가와 막부 이후 출판업이 급속도로 발전한다. 1710년께 서점·출판업자가 359개에 이르렀다.

국가, 즉 왕과 관료가 출판권을 독점한 결과는 유통되는 지식의 제한으로 나타났다. “지배계급의 이익을 위한 서적을 인쇄·출판한다는 데 대해 이들 사이에 이견은 없었다.” 문학·역사 서적도 있었지만, <사서대전> <오경대전> <성리대전> 같은 유학 경전들, <삼강행실도> <열녀전> <소학> 같은 교화서가 대종을 이루었다. 이렇게 국가가 발행하는 책으로 “사대부는 지배계급으로서 교양과 이데올로기를 갖출 수” 있었고, 백성들과 여성들에게 ‘충’, ‘효’, ‘열’ 같은 “강자에 대한 복종을 요구하는 윤리”를 주입시킬 수 있었다.

왜 국가 독점이 유지됐을까? 지은이는 몇가지 이유를 제시한다. 일단 표음문자인 알파벳과 달리 표의문자인 한자는 글자 수가 너무 많다. 알파벳은 24자×α의 활자를 만들면 되지만, 한자는 4만여자×α의 활자를 만들어야 했다. 조선은 금속활자 제작 때 한 글꼴당 10만~30만개의 활자를 만들었다. 더구나 금속활자의 원료인 구리는 국내에서 거의 나지 않아 일본에서 수입해야 했다.

이런 작업을 감당할 수 있는 곳은 국가밖에 없었다. 유럽과 달리 기계식 인쇄기가 발달하지 못해 여전히 장인들이 손작업으로 인쇄를 해야 했던 점, 종이의 원료인 닥나무가 부족하고 백성들의 공물로 충당돼 종이값이 비쌌던 점, 한자로 된 책을 읽고 살 수 있는 수요층이 양반계층으로 아주 얇았던 점 등도 복합적으로 작용했다.

결과적으로 책값은 아주 비쌌다. “유생 중에 비록 학문에 뜻이 있지만 서책이 없어 독서를 하지 못하는 사람도 많이 있습니다. <대학>이나 <중용> 같은 책은 상면포 3~4필(쌀 21~28말)은 주어야 살 수 있습니다.”(<중종실록>) 책은 관직을 가진 양반이나 지주계층만 소유할 수 있었다.

유럽에서는 금속활자가 급속도로 확산되면서 다른 인쇄방법들은 거의 소멸됐지만, 금속활자가 인쇄비용을 크게 낮추지 못한 조선에서는 목판본이 존속했다. 조선에서 금속활자는 ‘대량인쇄’가 아니라 국가가 필요한 책들을 빨리빨리 찍어내기 위한 기술이었다. 한번에 찍는 양은 일반적으로 수십부, 많아야 300부를 넘지 않았다. 목판인쇄는 목판을 한번 파놓으면 두고두고 쓸 수 있다는 점 때문에 오히려 많이 찍어야 하는 책에 이용됐다. 하지만 목판을 새기는 데 많은 노동력과 시간이 들었다.

서양의 금속활자는 상업적 목적으로 민간에서 제작된 반면, 조선의 금속활자는 국가의 필요에 따라 국가에서 제작됐다. 그 결과 서양은 지식독점을 해체해 그 지식 위에 서 있던 특권계급의 약화로 이어졌지만, 조선에서는 지배체제를 더욱 공고히 하는 데 이용됐다는 것이 지은이의 결론이다.

조선은 그러나 고려 금속활자를 발전시켜 인쇄물 종수를 폭발적으로 늘렸다. 세계 전체적으로 보면 당시 “중국을 제외하고 서적의 인쇄·출판·보급에 국가 차원에서 의미를 부여하고, 인쇄기관과 인쇄술을 갖추었던 나라는 거의 없었다.” 단지, 조선시대 인쇄술은 “지식의 전면적 확산이라는 방향으로 나아가지 못하고, 사족, 즉 양반 지배층을 위한 것에 그쳤을 뿐이다”.

안선희 기자 [email protect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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