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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淸)을 쳐바른 베트남의 패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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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 Belisarius
추천 : 28
조회수 : 3322회
댓글수 : 14개
등록시간 : 2014/01/06 12:57:37
 
 
 
한족(漢族)의 명(明)을 무너뜨리고 중국의 주인이 된 만주족의 청(淸) 왕조는 중국사에서 손꼽히는 명군들인 강희제(康熙), 옹정제(雍正帝)의 치세에 전성기를 맞이하고 그다음 건륭제(乾隆帝)의 대인 18세기 중말 무렵에는 청의 축적된 국력과 정복을 통해 넓혀진 영토는 절정에 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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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륭제(乾隆帝) 대의 청(淸) 최대판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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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淸)의 제6대 황제 고종(高宗) 건륭제(乾隆帝).
 
청 왕조의 최대 전성기를 이룩한 명군(名君).
 
 
 
 
특히 건륭제는 재위 60년간 축적된 국력을 바탕으로 활발한 정복활동을 벌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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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륭제(乾隆帝)의 몽골 준가르 평정도.
 
3년간에 걸친 준가르 원정을 계기로 오랜세월 청(淸)의 위협이 되어오던 준가르 세력은 와해되었고 제국의 북방은 평안해졌다.
 

전대의 강희제-옹정제 시절부터 줄곧 위협이 되었던 몽골의 준가르 세력을 멸하는 것을 시작으로 서쪽의 네팔과 티베트도 원정군을 보내 복속시키고 청을 중심으로 하는 동아시아 조공질서 체제 하로 편입시킴으로서 청의 서쪽변경을 안정시키는가 하면 반청(反淸)을 표명하여 청의 지배 하에있던 대만을 전복시키고자 일어난 반란도 진압하는 등, 총 10차례에 걸친 크고 작은 대규모 원정을 벌였는데 이 모두를 성공한 건륭제는 '십전노인(十戰老人)' 이라고 불리우기도 했다.
 

그러나 이 '십전노인' 건륭제도 차마 굴복시키지 못한 땡벌같은 나라가 하나 있었으니 바로 베트남이다.
 
우리나라와 비슷하게 예로부터 침략과 항쟁의 오랜역사를 지닌 베트남은 여기서 다시한번 대중국 항쟁사의 한획을 긋는다.
 
 
청(淸)이 베트남을 침공하게 된 계기는 자체적으로 벌인 원정이 아니라 요청에 의한 것이었다. 이를 알기 위해서는 먼저 당시 베트남의 정세에 대해 알아둘 필요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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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세기 말엽의 베트남.
 
북에는 정(鄭)씨세력이, 남에는 완(阮)씨가 자리하고 있었다.
 
 
 
15세기 무렵, 오랜세월에 걸친 명(明)의 지배로부터 벗어난 베트남은 최초의 통일왕조를 세우는데 이를 여(黎) 왕조라고 한다.
 
오랜기간 지속되어던 여 왕조는 내란으로 인해 17세기 말엽부터 서서히 쇠락해갔고 18세기 중순에는 정(鄭)씨 가문이 집권, 여 왕조의 황제는 명목상의 황제인 허수아비로 만들어버리고 실질적인 지배자가 되어 수도 승룡(升龙 : 오늘날의 하노이)을 중심으로 하는 북부를 장악했고 한편 그 남부에는 역시 세도가문 완(阮)씨세력이 들어서 북부의 정씨에 대응하는 형국이 된다.
 
그러던 중 남부의 완씨세력은 내부의 반란, 이른바 '서산당의 난(西山黨之亂)' 으로 인하여 멸망했고 이 서산당의 난을 주도했던 완문혜(阮文惠)라는 사람은 이미 정씨에 이해 꼭두각시 정권으로 전락해있던 여 왕조를 부흥한다는 명분을 내세워 북쪽의 정씨세력도 무너뜨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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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산당의 난(西山黨之亂)을 주도한 완문혜(阮文惠)와 그 두형제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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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문혜(阮文惠).

훗날 서산당(西山黨) 왕조의 태조(太祖) 무황제(武皇帝).

옛날 몽골 원(元)의 침공을 격퇴하여 베트남의 이순신이라 할 수있는 진흥도(陳國峻)와 더불어 구국의 영웅으로 칭송받는 인물이다.
 

완문혜는 쇠락한 여 왕조의 복권을 표명했지만 정작 이를 고마워했어야 할 여(黎) 왕조의 군주인 민종(愍宗) 소통제(昭統帝) 여유기(黎維祁)는 완문혜의 등장에 대해 영 탐탁치 않아했다.
 

과거 정씨(鄭氏)가문이 전횡했던 것에 대한 트라우마라도 생긴 것인지 새로 등장한 완문혜 역시 왕조의 복권을 빙자한 야심가로 간주하고 있던 것이다.
 

완문혜가 언제 변심하여 황위를 요구할 지 모른다는 불안감에 소통제(昭統帝)는 남몰래 대국 청(淸)에 연락을 취해 완문혜를 몰아내 줄것을 요청한다.
 
 
이때 청의 황제는 앞서 말한 건륭제. 그렇잖아도 남쪽 베트남에서 정변이 일어났다는 소식에 관심을 기울이던 건륭제는 소통제의 요청에 응했고 베트남 내전에 군사개입을 단행한다.
 
 
청이 단순 소통제의 호소에 응해 군사개입을 결정했다라기 보단 어디까지나 청의 조공질서 체제에 속한 여 왕조가 무너지는 것을 방관만 하고 있을 수는 없었기 때문이기도 했다. (조공 받아먹어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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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뭐 남쪽 오랑캐 놈들의 소란이니 굳이 그렇게 많은 병력을 동원할 필요는 없겠지. 한 20만 주면 되겠나?"
 
 
 
여기서 청군은 무려 20만에 달하는 병력을 동원하는데 이때 동원한 병력의 규모에 대해서는 설이 분분하다. 혹자는 20만은 과장된 수치이며 실제로는 몇만에 불과했을 것이다라고도 주장하는데 충분히 일리 있는 말이다. 내가 생각해도 청에서 베트남 군사개입에 굳이 수십만 대군을 쏟아부을 필요도 이유도 없었기 때문이다.
 
솔직히 말해 청의 입장에서는 조공국의 군주가 누가 되든 무슨 상관이겠는가. 꼬박꼬박 조공바치고 곰살맞게만 군다면 구태여 정변으로 정권이 교체되는 일에 대해 트집잡을 이유는 없다. 그런데 이후로 완문혜가 보여주는 청에 대한 외교태도로 미루어 짐작컨데 아마 이때도 청에 대해 그리 우호적인 입장을 보이지는 않았던 듯하다.
 
그래서 아마 청에서 이를 문제삼아 군사개입을 하고 대군을 동원해서 아예 짓밟으려 하지 않았을까 하는데, 아마 진짜 20만 대군이라기보다는 실제숫자는 몇만을 웃돌았지 않았나 한다. 하지만 몇만이라 해도 규모는 충분히 크다.
 
 
병력의 수치에 대해서는 논외로 하고, 아무튼 서기 1788년, 건륭제는 '20만 대군' 을 동원하여 베트남과 가장 인접한 광동성(廣東省)에 주둔해있던 양광총독(兩廣總督) 손사의(孫士毅)를 원정군 사령관으로 삼아 완문혜를 토벌할 것을 명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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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동성(廣東省).
 
베트남과는 엎어지면 코 닿을 거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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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군(淸軍).
 
청군이라 그런지 죄다 푸르딩딩하다.
 
 
이 손사의로 말할 것 같으면 건륭제의 대에 단행된 대만, 티베트, 미얀마 등의 원정에서 숱한 공적을 세운 베테랑 장군으로 건륭제로부터 신임받는 신하였다. 아무래도 먼 타지에서의 싸움에 익숙할 손사의였기에 그런 그에게 원정군을 맡긴 것이다.
 
 
더구나 몽골, 티베트, 미얀마 등의 전장을 겪으며 정예로 거듭난 청군이었다. 경험많고 노련한 20만의 청군에 대항하는 완문혜의 서산군(西山軍)은 그 반절인 10만으로 청군에 비해 양과 질에서 뒤쳐지는 형국이었다. 거기다 청군을 불러온 원흉이자 장본인인 소통제(昭統帝) 여유기(黎維祁)도 군사를 내어 청군을 돕게하는 난국까지 겹치고 있었다.
 
 
또한 손사의의 청군은 베트남의 국경에 들어 서면서부터 "사라진 것을 다시 일으켜 세우고자 완(阮)씨를 멸하고 여(黎)를 돕는다." 라는 문구를 만들어 행여나 외국의 군사개입으로 흉해질 수 있는 베트남인들의 민심을 잡기 위해 퍼뜨리고 다녀 자칫 베트남인들이 청군에 반(反)하는 일을 예방하기까지 하여 완문혜의 서산군은 일반 베트남 백성들로부터의 협력도 완벽히 보장받지도 못하는 상황이었으니 개전 초장부터 여러모로 완문혜의 서산군에게 불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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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淸)과 서산군(西山軍)의 전쟁 전개도.
 
파란색이 청(淸)군의 진격로고 붉은색이 서산군의 반격로.
 
 
 
이러한 상황 탓인지 개전 초부터 전황은 청군에게 순조롭게 진행되고 있었다. 
 
 
서산군(西山軍)의 선봉장수 번계덕(潘启德)을 격퇴해버리고 이어서 싸움을 걸어온 완문영(阮文艳)의 군세도 무너뜨리는 한편 여(黎) 왕조의 수도 승룡(升龙) 부근의 경북(京北)이란 요충지를 점거함으로서 경북을 방어하던 경북유수(京北留守) 완문화(阮文和)를 패퇴시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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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산군(西山軍)의 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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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산군(西山軍)의 깃발.
 
 
 
그리고 마침내 수도 승룡(升龙)에 입성한 손사의는 여(黎) 왕조의 소통제(昭統帝) 여유기(黎維祁)를 만나고 건륭제의 이름으로 소통제를 안남국왕(安南國王)에 책봉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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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淸)군의 손사의(孫士毅)에게 절하는 소통제(昭統帝) 여유기(黎維祁).
 
손사의가 건륭제를 대행해서 소통제의 안남국왕 책봉식을 거행했기에 손사의에게 절한 것이다.
이때 국왕에 책봉받으면서 청에 대한 조공관계 확립은 물론 건륭제의 팔순잔치에 참석하겠다는 약속까지도 했다고 한다.
베트남 입장에서 봤을 때는 매국노 내지 천하의 개쌍놈이랄까.
 
 
 
이후로 서산군은 승룡을 탈환하고자 몇차례 공격을 감행하지만 번번히 청군의 방어에 막혀 패했고 서산군은 잠시 뒤로 물러나 다음을 기약했다.
 
 
불리한 전황 속에서 서산군의 지도자 완문혜는 포고문을 하나를 공표한다.
 
 
"중국인들은 본래 우리와 다른 족속임에도 불구하고 한(漢 : 중국의 한 왕조) 이래로 오랜세월 간 우리를 침략하고 억압하며 지배해왔다. 이로 인해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살육을 당했는가? 예로부터 우리 조상들은 중국의 억압에 대항하여 싸워왔다. 우리 역시 어느 누구도 이런 수모를 당하고만은 있지 않을 것이다."
 

숨겨진 애국심을 북돋는 완문혜의 포고문에 계속된 패배로 사기가 저하되어 있던 서산군은 단번에 사기가 되살아났고 완문혜는 그 기세를 몰아 그해 11월, 연호를 '광중(光中)' 으로 하는 서산(西山) 왕조를 세우고 황제를 자칭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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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문혜(阮文惠)와 그의 부인.
 
연호를 '광중(光中)' 으로 했던 것에서 연유하여 흔히 '광중대제(光中大帝)' 로 불리운다.


 
완문혜의 칭제는 기존의 여(黎) 왕조의 전면부정을 의미했다. 하기사 이미 청에게 발발 기며 안남국왕이라는 작위까지 받아먹은 정권은 이미 매국노나 다름없었을 것이다.
 
 
칭제로 전열을 가다듬은 완문혜는 속전속결로 승부를 보기로 결정한다.

해가 바뀐 1788년, 청군은 새해를 맞아 한창 춘절(春節) 행사에 여념이 없었다. 거듭된 승리에 도취해 있어 군기가 풀린 것이었는데 이는 사령관 손사의도 다를 바 없었다. 거듭된 전공을 계속해서 건륭제에게 보고해 이에 흡족해 했던 건륭제로부터 많은 포상과 승진을 약속받았던 지라 출세의 부푼 꿈을 품고 들떠 있어 전쟁은 이미 뒷전으로 물 건너가 있었던 것이다.
 
 
바로 이 명절의 분위기와 해이해진 군기강을 틈타 완문혜는 수도 승룡에 기습을 가하기로 한다. 

위에서 말한 속전속결의 전술이 바로 여기서 빛을 발휘한다.
 
 
완문혜는 수도 승룡으로 빠른 시일내에 당도하기 위해 몇가지 방법을 썼다.
 
 
전 병력을 세명으로 묶어 3인조로 만들고 두사람이 세사람 몫의 짐을 나누어 들게 하고 한사람은 휴식을 취하게 하되 세명이서 번갈아가면서 한다.
 
말이나 코끼리를 최대한 이용하여 그 위에서 두세명의 병사를 휴식을 취하게 하며 휴식여건을 최대한 보장한다.
 
 
이 방식으로 서산군은 밤낮으로 북상하여 수도 승룡에 도달할 수 있었고 한창 명절을 즐기던 청군에게 기습을 가하는 데에 성공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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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트남 최후의 왕조 완(阮) 왕조의 병사들 모습.
 
완(阮) 왕조는 앞서 완문혜가 멸한 남쪽의 완(阮)씨의 후예가 세운 나라로 완문혜가 건국한 서산(西山)왕조 이후에 들어서 이 글의 배경인 18세기 말과는 불과 백년도 채 차이나지 않는다. 아마 청(淸)군을 격파한 완문혜의 서산군도 이런 모습이지 않았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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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군은 돌연간 벌어진 이 한방 싸움에 이렇다하게 싸움 한번 못해보고 갈팡질팡하다가 말그대로 개박살이 나 점거하고 있던 수도 승룡을 잃고 인근의 부랑강(富良江 : 홍하(紅河))로까지 밀려난다.
 
 
기서 손사의는 다시한번 병크짓을 저지르는데 부랑강에 도달하자마자 맹추격해오는 서산군을 막고자 황망한 도중에 다리를 끊어버린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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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하(紅河)에서의 전투.
이 싸움에서 완문혜의 서산군은 청(淸)군을 완전히 몰아냈다.
 
 
 
다리가 끊겨버리니 퇴각은커녕 청군은 그자리에서 강으로 몰려 서산군의 맹공을 온 몸으로 맞아야 했다. 사령관 손사의는 겨우 목숨은 부지해 달아났지만 그 휘하의 부장들과 총병(總兵)들은 모두 그자리에서 익사하거나 죽임을 당하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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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하(紅河).
 
베트남의 수도 하노이 인근의 강이다.
 
 
한편 이 광경을 강 건너편에서 모두 지켜보던 소통제(昭統帝) 여유기(黎維祁)도 제 군사를 돌려서 달아나 그대로 청(淸)으로 망명해버린다.
 
 
 
처참한 패전소식은 머지않아 청의 수도 북경(北京)에도 전해졌다.
 
 
 
순전히 손사의의 어처구니 없는 실책으로 인해 당한 패전이니 당연히 책임추궁은 손사의에게로 돌아갔고 그 처벌로 손사의는 관직을 박탈당했다. 
 
 
뭣보다 건륭제가 대노했던 이유에는 명색이 대국인 청이 한낱 남쪽 변방의 오랑캐 베트남에게 쳐발렸다는 사실 그 자체에 있었다. 하지만 또 병력을 동원해 전쟁을 벌이자니 그 또한 그동안 수십년간에 걸쳐 숱하게 벌여온 원정 탓에 소비된 전비의 액수가 만만찮아 무리였다.
 
 
그렇다고 가만히 있자니 구긴 체면이 말이 아니었던지라 건륭제는 차라리 대인배(?)의 모습을 보이기로 한다.
 
 
완문혜에게 양국이 싸움을 그만두자는 어조의 서신을 보내 화친을 꾀했던 것인데, 먼저 선공해온 쪽에서 패해놓고 마치 양측의 타협에 의해 싸움을 그만두는 것처럼 행동하는 노릇이니 대국 청의 입장에서는 실로 굴욕적인 상황이었을 것이다.
 
 
서신의 내용 중 한 문구를 통해 어조를 보자라면..
 
 
"그대가 스스로의 죄를 뉘우치고 있으니 이를 가엾고 대견하게 여기어 더이상 대국에 대항했던 이전의 죄는 묻지 않겠다."
 
 
최소한의 자존심만은 세우고 싶던 건륭제의 심정을 요약하는 대목이라 하겠다.
 
건륭제는 파직당한 손사의의 후임으로 부임한 양광총독(兩廣總督) 복강안(福康安)더러 완문혜와의 강화협상을 맡게 했고 이 협상으로 청과 베트남 양국은 화친을 맺게 된다. 
 
 
그리고 완문혜는 건륭제로부터 예전에 소통제가 책봉된 바 있는 '안남국왕(安南國王)' 에 책봉되는데 이는 곧 청의 제후국이 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비록 어제까지만 해도 청에 대항해 독립이라도 할 기세로 칼을 맞대고 싸운 사이라지만 어디까지나 청은 대국이요, 베트남은 청의 조공질서 체제에 속한 나라였기에 한계가 있을 수밖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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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광총독(兩廣總督) 복강안(福康安).
 
 
 
이 협상의 조약 중에 재밌는 점은 완문혜가 직접 청의 수도 북경을 방문하여 건륭제의 팔순잔치에 참석하겠다고 서약한 부분이다. 당장 우리나라 조선만 해도 국왕을 대행한 사신이 갔지 국왕이 가는 사례는 실로 드물었다. 그나저나 소통제한테도 그렇고 되게 팔순잔치 참석을 요구한다. 
 
 
일국의 국왕이 직접 입조한다니 실로 특단의 결단이라 하겠다만은 웃긴건 완문혜가 건륭제에게 공갈을 쳤다는 것이다.
 
 
가겠다고 해놓고 핑계대며 안간 수준이 아니라 가긴 갔는데 그 간 사람이 완문혜 본인이 아니었다. 완광평(阮光平)이라고 하는 웬 다른사람을 갖다가 자기랍시고 생일축하합니다 하고 보내놓은 것인데 이는 완문혜가 짐짓 본인인척 속이고 배째라 식으로 나오는 패기를 시전한 것이다.
 
 
이는 당시 건륭제의 팔순연회에 참석했던 우리나라 조선사신들에 의해 기록되어있다.
 
 
"안남 국왕(安南國王) 완광평(阮光平)이 황제의 팔순만수(八旬萬壽)를 축하하기 위하여 4월 15일 광서(廣西)의 남쪽 지방에 이르렀는데, 황제가 명을 내려 예부의 만주족(滿洲族) 좌시랑(左侍郞)을 파견하여 미리 열하로 데려가게 하였다."
 
건륭제가 자신에게 패배를 안겨다준 자의 이름 석 자를 모를 리 만무하다. 건륭제가 뻔히 보는 앞에서 사기극을 펼치고 있으니 건륭제가 오죽 어이없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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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 X발.. 이 새끼들을 어쩌지?"
 
 
 
그래도 별말 안하고 오히려 모른체 그냥 받아준 것을 보면 건륭제도 대인배이긴 한 모양이다.
 
 
 
이렇듯 광중대제(光中大帝) 완문혜(阮文惠)는 대국 청을 대상으로 꿀리지 않는 패기와 저항의지를 보여주었고 나아가서는 외침으로부터 나라를 구했다하여 구국의 영웅으로 추앙받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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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중대제(光中大帝) 완문혜(阮文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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