브라질 월드컵
32일간의 열전이 끝났습니다.
넓은 나라 브라질에서 국제선 같은 국내선 이동을 하느라 중계진도 고단했지만
한 달 넘게 새벽 잠 쫓으며 시청하느라 대한민국 축구 구단주 여러분 고생 많으셨습니다.
조직력의 독일과 메시의 아르헨티나가 마라카낭에서 결승전을 펼쳤는데 토너먼트 8강전부터 전 포지션에서 약점을 거의 드러내지 않은 독일이 왕좌를 차지했습니다. 개인 능력만 놓고 보면 '축구의 신'이라 불리기에 충분한 메시였으나 펠레와 마라도나처럼 '월드컵 신전'에 입성하지는 못했습니다.
바르셀로나와 아르헨티나는 사정이 다릅니다. 월드컵 무대에서 메시는 줄곧 상대팀의 파상적인 압박을 받아왔습니다. 2006 독일 월드컵과 2010 남아공 월드컵에서 메시는 결국 큰 결과물을 만들지 못했죠
이번 브라질 월드컵에서 메시는 번뜩였습니다. 활동량이 줄어들고, 상대 압박도 강력했고, '원맨쇼'가 부족했던 건 비슷했습니다. 하지만 경기를 지배하지는 못하더라도 결과를 지배하는 것은 메시에게 불과 몇 초의 시간이면 충분했습니다. 조별리그부터 16강전까지 4경기 연속 MOM에 선정됐고, 결정적인 도우미 디 마리아와 아구에로가 번갈아 빠졌음에도 팀을 결승전까지 견인했습니다.
아르헨티나는 현재 '메시 세대'가 이끌고 있습니다. 메시, 사발레타, 가라이, 가고, 빌리아 등으로 이뤄진 2005년 U-20 월드컵 우승 세대와 디 마리아, 아구에로, 로메로 등으로 이뤄진 2007년 U-20 월드컵 우승세대가 지금의 아르헨티나 주축입니다. 이 두 연령대에 마스체라노와 리켈메가 합류해서 2008년 베이징 올림픽 금메달을 따기도 했죠.
연령별 대회를 연달아 제패한 '메시와 친구들' 세대가 A대표팀에서 주축으로 뭉쳤으나 2010년에 이어서 2014년에도 월드컵 정복에 실패했습니다. 개최 대륙 이점을 안은 남미에서의 월드컵 대회였고, 선수들이 20대 중후반 최전성기에 다다랐다는 점에서 아르헨티나와 메시 팬들의 아쉬움이 클 수밖에 없습니다. 다음 대회인 2018 러시아 월드컵은 유럽 대륙이고, 지금의 주축선수들이 그만큼 나이를 먹기 때문에 메시를 비롯해 30대를 넘기는 선수들도 꽤 됩니다. 물론 모든 징크스와 예단을 누르고 4년 뒤 '월드컵 신전'에 입성할 가능성도 충분합니다.
차범근 해설위원은 결승전 해설에서, 피파컵을 들어올리지 못한 축구의 천재 '요한 크라위프'와 현재 리오넬 메시를 비교했습니다. '두 선수는 축구 역사의 다섯 손가락 안에 드는 천재들이지만, 피파컵을 들어올리지 못해 가산점이 부족하다'라는 평가입니다. 다음 월드컵에서 리오넬 메시는 월드컵을 들어올리고 월드컵 역사에 남을 수 있을까요?
(출처 : 다음스포츠 월드컵 중계 캡쳐)
독일은 개최 대륙 징크스를 깨며 아메리카 대륙 월드컵에서 우승한 첫 유럽 팀이 됐습니다. 특히 남미의 양강이라고 할 수 있는 브라질을 4강에서 무려 7:1 스코어로 짓이겼고, 결승전에서는 축구의 신이 버티고 있는 아르헨티나를 눌렀습니다.
월드컵 역사에서 남미의 양대 축인 브라질과 아르헨티나를 한 대회에서 연파한 팀은 딱 세 팀 밖에 없습니다.
1974년 요한 크라위프의 네덜란드(준우승)와
1974년 득점왕 라토의 폴란드(3위),
1982년 파울로 로시의 이탈리아(우승) 뿐이었습니다.
위의 세 팀은 2차 리그전이나 3/4위전에서 브라질-아르헨티나를 꺾은 것인데, 이번 독일은 준결승전과 결승전 무대에서, 그것도 남미 월드컵에서 남미의 양강을 연파했기 때문에 더욱 대단합니다. 브라질 월드컵은 독일 축구 역사에 길이 남을 기록입니다.
(출처 : 다음스포츠 월드컵 중계 캡쳐)
커플 셀레브레이션도 역사에 남을만한 염장샷인 듯. 전세계 솔로 축구팬들을 위해 피파에서 여친-아내 그라운드 난입을 금지하는 규정을 만들 것을 촉구합니다.
브라질 월드컵에서 한국의 성적이 부진해서 침통한 분위기지만 분데스리가 영웅은 독일의 선전과 함께 신명이 났습니다. 오프닝때부터 목소리가 엄청 갈라지면서 흥분을 감추지 못했습니다. (해설 내용은 매우 공명정대했습니다)
독일의 마지막 월드컵을 들어올렸던 1990년 영웅 마테우스가 바로 옆에서 오프닝을 촬영하다가 분데스리가 선배를 발견합니다.
< 아이구 차붐 형님 아니십니까~~~ >
< 이야~~ 이게 얼마만입니까 형님!! 허벅지는 여전하시죠? >
< 차붐 : 딱 보니까 이번에 너네 우승할 거 같어!
마테우스 : 형님도 촉이 오십니까? 편파해설 오케이? 따봉? >
< 차붐 : 야, 야, 안돼! 한국말 잘하는 독일인이라고 아르헨티나 팬들이 욕해 >
< 마테우스 : 그럼 형님 오랜만에 게르만 쎄쎄쎄나 한 게임 하시죠 >
독일어를 알아들을 수는 없지만 대충 이런 분위기였습니다..
결승전 중계를 끝내고 나오는 길에, 프랑스 방송국에서 해설을 마친 아르센 벵거 감독이 차범근 해설위원에게 축하 인사(?)를 건넵니다. 차붐도 이유를 모르겠다고 합니다^^
< 프랑스의 독일어권 지역 출신 벵거와 차붐 >
< 기념 사진은 두 분의 대화를 방해하지 않는 선에서 >
< 결국 차붐 빽으로 같이 한 장 찍었습니다. 누가 포토샵으로 그림자 조절 좀.. >
아스날의 새 시즌 기대합니다
2010 남아공 월드컵 때 차붐과 클린스만의 위엄 넘치는 사진을 아래처럼 망가뜨린 경험이 있어서 벵거 감독과 차붐의 투샷을 충분히 찍은 뒤에 합류했습니다.
그러고 보니 한국 축구 최고의 영웅이자 역사상 최고의 국민해설자와 벌써 4년째 호흡을 맞췄습니다.
2010 남아공 월드컵 개막 직전에 섭외된 차범근 해설위원과 호흡을 맞추며 사상 첫 원정 16강의 소식을 전하는 영광을 누렸고
2011 카타르 아시안컵과 2012 런던올림픽 중계도 함께 할 수 있었습니다.
< 런던올림픽 8강 영국전 >
< 런던올림픽 한일전 >
감격적인 사상 첫 동메달의 쾌거를 중계했었죠. 2년간 스브스 중계시 무패 기록도 세웠습니다. (시청률도~)
본래 타사에서는 월드컵 본선만 중계했던 차붐인데 스브스가 각종 대회에 소환하며 U-20 월드컵과 여자축구까지 예전과 다른 광폭 행보를 보여준 차붐입니다.
우승후보였던 콜롬비아에게 16강에서 승리하고 8강 진출 쾌거를 이룬 터키 대회. 저도 덕분에 정말 다양한 나라에서 다양한 축구중계를 경험할 수 있었습니다.
저와 차붐 콤비가 2년 넘게 유지하던 중계 불패 기록이 깨진 곳은 아자디 스타디움입니다. 박지성의 은퇴 이후 A매치 폼이 들쭉날쭉하던 대표팀은 2012년부터 결국 문제를 드러내기 시작합니다. 꼬여가던 실타래가 여기서부터 더 뒤엉키기 시작한 것 같네요.
차범근 해설위원의 목소리는 2002년부터 항상 기분좋은 승리의 샤우팅이었는데 10년이 지난 2012년 가을 이후 중계에서 탄식이 조금씩 섞여 나오기 시작합니다. 사회 분위기와 함께 마음도 무거워하시는 게 느껴졌고요
결국 브라질 월드컵에서 한국 축구는 2002년, 2006년, 2010년 세 번의 대회에서 보여줬던 감동을 이어가지 못했습니다.
…..
그리고 여러 사건들이 있었지만 중계방송은 결승전까지 무사히 끝났습니다.
< 결승전 중계까지 마치고, 숙소 근처 바하 비치 >
차범근 해설위원은, 오랜만에 메이저대회 왕좌에 오른 독일을 보면서 너무나 부럽고 배울 점이 많다고 말합니다.
유로1996 우승 이후 1998년 월드컵도 8강에 머물렀고, 역사상 최고의 대회로 불린 유로2000에서 조별리그 최하위 탈락이라는 수모를 겪은 독일이 협회부터 뼈를 깎는 구조조정에 들어가서 청소년 선수와 지도자를 육성하고 분데스리가를 최고의 시스템을 갖춘 리그로 끌어올리는 노력을 기울인 결과 최근 독일의 리그/대표팀 경기력 상승과 월드컵 우승까지 만들어냈다는 이야기입니다.
K리그와 유소년축구부터 다시 시작하면 우리 세대에 우리도 감동의 무대에 초대받을 수 있을겁니다. 브라질 월드컵은 끝났지만 월드컵 공인구 브라주카는 이미 재개된 K리그 그라운드에서 여전히 매치볼로 사용되고 있습니다.
< K리그 경기장에서 만나요 >
선수로서, 감독으로서, 해설자로서 언제나 존경받았던 전설 차붐의 커리어에서 중계석 옆자리에 제일 많이 앉은 캐스터였기에 영광이었습니다.
승리의 샤우팅을 다시 즐길 수 있는 시대가 빨리 돌아오기를!
고생하셨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