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점만 말하자면,
"이 정당은 투자하여 키울만한 당인가."에 근본적인 회의가 들었기 때문이고,
그 핵심은 정의당의 정체성이나 사상 자체보다는 '수권 가능성'에 대한 회의 때문이라고 봐야합니다.
새로운 정당이 수권 가능한 거대 정당으로 성장하기 위해서는 밟아야 하는 몇가지 단계가 있습니다.
첫째로, 스타 정치인이 필요합니다. 그래서 단 한두군데에서라도 일단 선거를 이겨야 합니다.
그리고 토론회 같은 데에 나가서도 좋은 모습을 보이구요.
그러면 사람들에게 정당의 존재가 조금씩 알려지기 시작합니다.
둘째로, 유의미한 수준의 원내 진출입니다. 정확히 말하면 비례 후보 당선이죠.
1단계의 스타 정치인 한둘의 개인적인 힘이 아니라, 정당 자체에 대한 지지로 비례 후보를 당선시키면
이제 스타 정치인 한둘이 아닌 정당 자체가 정당으로서 인정받기 시작합니다.
셋째는, 기존 거대 정당과의 연정 및 협치를 통한 정권 지분 확보입니다.
2단계까지 성공한다 해도 독자적 정당으로 인정받는 정도지, 적은 의석 수로 혼자 할 수 있는건 별로 없습니다.
이를 위해서는 뜻을 같이할만한 거대 정당과 연정 및 협치의 단계는 필수죠.
본인들 뜻에 좀 맞지 않는 부분이 있더라도 몇번 꾹 참고 거수기 역할 좀 해주는 대신
한두개의 법안, 한두개의 정책이라도 확실히 본인들 뜻을 관철시켜 통과시키는게 중요한 겁니다.
그리고 그 법안이나 정책이 성공하고 국민들의 좋은 평가를 받기 시작하면
"시발 그 존나 좋은 법안/정책을 우리가 발의했다고요!!"라는 홍보가 가능해지고
그러면 이제 본격적으로 국민들 뇌리 속에 "국정을 맡겨도 될만한 능력 있는 정당"이라는 인식이 생기는 겁니다.
유럽의 군소 정당들이 성장해간 과정을 보면 거의 예외 없이 위의 과정을 거칩니다.
혁명이나 전쟁 같은 대격변급 변수가 생기는 것이 아닌 한, 위의 과정은 필수나 다름 없어요.
정의당을 봅시다.
심상정, 노회찬이라는 스타 정치인들을 기반으로 정당으로 정착하는데 성공합니다.
당직자는 아니고 평당원 신분으로이긴 하지만 유시민이라는 거물도 영입하는데 성공하죠.
여기서 1단계는 통과됩니다.
그리고 지난 총선에서 "지역구는 야권 단일 후보에게, 비례는 정의당에게"라는 전략이 먹혀들어가
유의미한 수준의 원내 의석 확보에 성공합니다. 정당 자체로서의 입지도 다지는데 성공했죠.
2단계까지는 이룩한겁니다.
그럼 다음은 3단계죠.
헌대 이 3단계를 진행하는 데에 있어서 이번 대선은 그야말로 절호의 기회입니다.
물론 정의당 입장에선 현 민주당의 정책 방향도 충분히 진보적이지 않을겁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어쨌든 민주당이 자한당이나 바른당, 국민의당과는 비교할 수 없을만큼 가장 정의당에 가까운 거대 정당인 것도 사실이죠.
게다가 그 어느 때보다도 민주당에 의한 정권교체 가능성도 높습니다.
여기에 더하여 대선후보인 문재인 후보 본인 역시 정의당에 호의적이고, 과거 개인적으로 도와준 적도 많습니다.
게다가 민주당이 원내 제1당이긴 해도 과반은 확보하지 못한지라 의석 하나하나가 중요한데
이런 상황이면 정의당이 지닌 소수의 의석이라도 캐스팅 보트 역할을 할 수가 있습니다.
그 어느때보다도 연정을 기대할 근거는 충분한거죠.
이건 정의당 입장에서도 그야말로 3단계를 진행하라고 하늘이 내려준 기회나 다름 없어요.
여기서 민주당을 지원하여 정권교체에 공을 세운 뒤,
민주당과 연정 및 협치를 추진하여 가능하면 정권 내에 유의미한 공직 몇 개를 확보하고,
더 나아가 안보나 외교 같은 분야에서 민주당에 협력하는 댓가로
노동이나 복지 등 정의당의 주요 관심 분야에서 정의당이 입안한 법안이나 정책을 몇 개라도 통과시키는 겁니다.
그리고 그 법안/정책이 성공하면 정의당의 업적으로 국민들에게 홍보하고요.
근데 어제 토론에서 심상정 후보는 공식적으로 3단계로의 이행을 걷어 차버린 셈입니다.
사실상 "우리는 민주당으로 정권 교체가 이루어지는 것을 도울 뜻이 없다."라고 천명한거나 다름 없는 모양새가 되었어요.
정권 교체를 돕지 않아 놓고는 정권 교체 이후에 연정과 협치를 요구한다?
이건 본인들도 말이 안 된다는걸 알겁니다.
문제는 당원들과 지지자들의 입장입니다.
당원들과 지지자들이 정의당을 지지하는건 장기적으로 위의 단계를 거쳐서 수권 정당으로 성장하기를 바라는 겁니다.
많은 정의당 지지자들이 이야기하곤 하는 비전이죠.
"정의당과 민주당이 각각 진보당, 보수당으로서 양당체제를 구축하고 (구)새누리는 사라지거나 군소 정당으로 명맥만 유지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그래서 많은 정의당 지지자들, 당원들은 이번 대선에서 정의당이 3단계로 나아가기를 누구보다 바랐을 겁니다.
근데 심상정 후보가 이걸 걷어차 버렸죠.
즉 "응 우린 수권 정당으로 성장할 생각 없어. 그냥 재야에 머물면서 주류 세력을 비한만 하는 군소정당으로 영원히 남을거야"
이렇게 천명한 것과 다름없는 겁니다.
그러니 지지자들이 실망하고 떠나는겁니다.
수권 정당으로 키울만한 진보 정당의 등장이라 생각해 기뻐하고 투자하고 자기 돈으로 후원금 내면서 정당에 가입해서 지지했는데
정의당은 수권 정당으로 성장할 가장 큰 기회를 스스로의 의지로 걷어차 버렸으니까요.
이제 지지자들은 이렇게 생각할 수 밖에 없는 겁니다.
"수권 정당으로 성장할 뜻이 없는 정당이면 굳이 내가 지지할 이유가 있나?
재야에 남아서 비판만 할거면 코어 지지층만 가진 군소정당이어도 상관 없고 심지어 정당이 아닌 시민단체여도 상관 없지 않나?
내가 내 돈과 노력을 들여서 이 정당을 키울 이유가 있는걸까?"
혹자들은 그럼 정의당이 민주당 2중대냐, 민주당 시녀짓을 해야하냐라고 말하는데
애초에 정의당 지지자들은 당연히 정의당이 민주당 2중대가 되기를 바라지 않습니다.
정의당이 민주당과 어깨를 나란히 하는 거대 수권 정당이 되어
정의당과 민주당의 양당체제를 구축하거나 정의당과 민주당, (구)새누리의 삼당체제를 구축하기를 원하는거죠.
근데 현실적으로 이런 수권 정당으로 성장하기 위해서는
100% 맘에 들지는 않더라도 어쨌든 정책적으로 가장 가깝고
연정에 대해 열려 있고 진보 정당에 호의적인 거대 정당과의 연정이라는 단계는 거치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그래야 정부의 요직 한두자리라도 차지하고 법안 한두개, 정책 한두개라도 정의당의 뜻대로 관철시키는게 가능하고
그 성공을 계기로 수권정당으로 성장을 할 수가 있으니까요.
근데 그걸 걷어차면서 "우린 수권 정당으로 성장하지 않겠다!!"라고 외쳐버렸으니
지지층은 힘이 빠지고 지지 자체에 대해 회의감을 가지지 않을 수가 없는거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