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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明) 왕조 멸망사 : 고자들의 세상 - (6)
게시물ID : history_13341짧은주소 복사하기
작성자 : Belisarius
추천 : 18
조회수 : 2070회
댓글수 : 3개
등록시간 : 2014/01/04 09:32:56
 
 
 
- 동림당(東林黨) vs 엄당(閹黨)-
 
 
 
明熹宗~1.JPG
 
명(明) 희종(熹宗) 천계제(天啓帝) 주유교(朱由校).
 
 
 
천계제(天啓帝)의 즉위는 당시 부패한 환관의 횡포에 항거하던 유학자 및 사대부들이 모여 이룬 동림당(東林黨)이 적극 중용되는 계기였다. 천계제가 제위에 오를 수 있었던 데에는 이 동림당의 공헌이 컸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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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림당(東林黨).
 
엄밀히 말해 동림당은 '당(黨)' 이라고 해서 정당이 아니라 일종의 파(派)다.
환관의 부정부패로 도탄에 빠져있던 당시 현실을 개탄하여 뜻 있는 학자들과 사대부들이 모여 형성한 집단이 바로 동림당이다.
환관세력으로 정의되는 '엄당(閹黨)' 과 대립하며 폐단을 척결하고 사회를 개혁하는데에 앞장선 개혁가들로 서서히 무너져가던
명(明) 왕조 최후의 자정작용이었다.
 
 
 
동림당의 중심에 위치한 신하들이 대거 등용됨으로서 비로소 동림당의 뜻이 정책에 반영되기 시작한다. 그동안 환관들이 저지른 각종 비리와 폐단들이 청산되었고 특히 만력(萬曆) 치세부터 논란이 되던 '광세의 해(鑛稅─害)' 는 천계제의 치세에는 이미 수탈직으로 전락해있던 '광감(鑛監)' , '세감(稅監)' 이 폐지됨으로서 거의 자취를 감춘다.
 
 
동림당은 비단 환관들의 부정부패 척결에만 국한되지 않고 경제, 군사 등의 여러분야에 걸쳐 혁신을 꾀했다. 윗대가리들의 횡포로 도탄에 빠져있던 백성들에게 농업을 적극 권장하고 국가적 차원에서의 전폭적인 지원을 약속하고 또 실제로 그렇게했다. 더불어 그때 만주(滿州)에서 흥기한 여진족의 후금(後金)에 대항해 훗날 명(明)의 최후의 명장으로 이름을 남기는 원숭환(袁崇煥)웅정필(熊廷弼) 등의 유능한 장군들을 동북전선으로 파견해 대비케 하기도 했다.
 
 
이렇듯 동림당의 집권과 개혁으로 명 왕조는 잠시나마 드리운 암운에서 벗어나는 듯 했지만 동림당의 집권기는 얼마 가지못했다.
 
 
황제 천계제의 총애를 등에 업고 정계에 등장한 환관 위충현(魏忠賢)을 필두로 하는 환관세력인 '엄당(閹黨)' 이 다시 발호했던 탓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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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충현(魏忠賢).
 
나라를 시원하게 말아먹은 원흉.
명(明)을 망국의 지름길로 이끈 공로(?)에 있어서 만력제가 그냥 커피라면 위충현은 단언하건데 TOP라 할수있다.
 
 
 

위충현(魏忠賢)으로 말할 것 같으면 본래 한낱 범부에 불과했지만 당시 권력의 대명사로 여겨지던 환관이 되는 것이 한창 유행이었던 흐름을 따라 제 스스로 거세하고 환관이 된 인물이다.
 
일개 필부였기에 궁성에서 살아가는 환관이라는 직책이 요구하는 기본 교양 및 덕목이나 기본지식 따위가 있을리 만무했다. 다만 하늘이 그에게 부여한 능력이 있었으니 바로 만렙을 찍는 고난이도의 아첨스킬이었다.
 
막말로 순전 주둥아리만 살아 그걸 밑천삼아 살길을 마련한 위충현은 세치 혀를 적극 활용하여 나중에는 무려 태자시절 천계제의 스승이 되는 위업을 달성하기에 이른다.
 
 
일자무식의 위충현이 어떻게 태자의 스승이 되었는지는 실로 미스터리하다. 아무튼, 위충현의 아첨능력은 여기서도 십분발휘되어 곧 태자와 가까운 사이가 된다.
 
그리고 태자는 즉위하여 천계제가 되었고 태자시절의 스승 위충현 역시 덩달아 벼락출세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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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드라마 <강산풍우정>에서의 천계제(天啓帝)와 위충현(魏忠賢).
 
천계제 : "쌤, 요즘따라 정치고 뭐고 다 하기 싫고 망치질이나 하고 싶네요."
위충현 : "그렇다면 정치는 소신에게 맡기소서."
 
참고로 천계제는 가히 맥가이버의 수준에 가까운 목수질 능력을 보였다고 한다. 
그래서 재위 7년동안 목수질만 하다 볼일 다봤는데 그 역시 명의 F4라는 명예의 전당에 당당히 이름을 남겼다.   

 
위충현이 본격적으로 정계에 등장할 때는 동림당이 천계제의 비호로 대권을 쥐고 전 분야에서 한창 개혁을 펼치고 있을 무렵이었다. 애시당초 권력을 탐해 제 스스로 고자가 되어 환관이 된 위충현이었다. 위충현은 이때부터 동림당을 몰아낼 궁리를 하기 시작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황제 천계제와의 돈독한(?) 관계가 필요했다. 그래야 자신이 무슨 짓거리를 하더라도 황제가 눈감아 줄 수있었기 때문에.
 
앞서 말했듯 위충현은 천부적 재능에 가까운 아부실력을 가지고 있었다고 했다. 무념무상으로 살아가던 천계제에게 접근해 살살 꼬드기니 대번에 '사례병필태감(司禮秉筆太監)' 이라고 하는, 황제를 보좌하며 황제를 대신하여 올라온 상소문에 회답하고 그 의사를 전달하는 역할의 관직을 하사받는다. 오늘날로 말하자면 대통령 비서실장 격이랄까. 황제의 측근 중 최측근이라 할 수있는 위치였다.
 
 
원하는대로 황제의 최측근이 된 위충현은 본격적으로 동림당 몰아내기에 몰두한다. 하지만 위충현이 제아무리 혼자 온갖 중상모략을 꾸며도 황제가 명을 하달하여 동림당을 실질적으로 몰아내지 않는 이상은 동림당의 입지는 굳건했다.
 
 
그래서 천계제의 유모, 객씨(客氏)에게 접근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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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계제(天啓帝)의 유모 객씨(客氏). 정확한 이름은 객인월(客印月).
 
말그대로 천계제에게 젖을 먹여 키운 일개 유모(乳母)로, 천계제가 어느정도 나이가 차면 더는 필요가 없어지는 팔자였지만 천계제는 어린시절 유모 객씨에 대한 기억이 좋았는지 성인이 되고 황제가 되어도 객씨를 총애하여 그대로 자금성에 머무르게 했다고 한다.
 
여담으로 말하자면 위충현과 객씨는 나중에 가면 무슨 불륜관계로 발전해버려 둘은 천계제 몰래 간통까지 서슴치 않고 벌인다. 천계제는 이것도 모르고 그저 자신을 키워준 유모랍시고 떠받들고 있었으니... 그런데 위충현은 고자인데 대체 무슨 수로 객씨와 간통했는지에 대한 의문은 각자의 상상으로 해결하길 바란다.
 
그나저나 사진속 복식이 모자 때문에 그런지 명나라 때보단 청나라에 가까워 보인다.
 
 
 
한때 천계제를 키웠다는 공로를 제외하면 그저 한낱 유모에 불과했지만 객씨는 천계제가 총애하는 귀비(貴妃)였다.
 
 
위충현은 바로 이 점을 이용해 객씨에게 뇌물을 갖다바치며 천계제에게 말해서 동림당을 음해해줄 것을 부탁했다. 그리고 객씨는 뇌물 받아먹은 값을 톡톡히 해내어 천계제로 하여금 동림당을 멀리 하도록 하는데에 성공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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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드라마 <강산풍우정>에서의 천계제(天啓帝).
 
객씨 : "동림당이 폐하더러 무능한 놈이라고 비방했다네요."
 
천계제 : "뭐라고요? 아니 동림당 이 새끼들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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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 안되겄다. 동림당 이 새끼들 싹다 요직에서 끌어내."
 
 
 
결국 동림당은 천계제의 배척으로 여러 중요인사들이 실권했고 그 자리는 위충현을 비롯한 엄당(閹黨) 세력이 대신하여 꿰차게 된다.
 
 
이러한 상황에서 동림당의 사대부들이 할 수있던 것이라고는 위충현과 그를 따르는 환관세력을 '엄당(閹黨 : 閹이란 한자 뜻이 고자라는 의미다)' 즉, '고자놈들의 무리' 라고 싸잡아 낮추어 부르며 분을 삭이는 일 뿐이었다. 지금까지 계속 엄당이라 써놓고 이제와서 엄당이라 부른다는게 무슨 말이냐고 반문하시는 분들도 계실 법한데, 달리 이들을 지칭할 말이 없어 나중에 등장한 표현일지라도 그냥 편의상 써왔으니 양해부탁드린다.
 
 
위충현은 한술 더떠 내각과 조정 6부, 외지에 자신을 따르는 인사들을 앉히고 자신은 본래의 직위인 '사례병필태감(司禮秉筆太監)' 에다 '동창제독(東廠提督 : 동창(東廠)은 명 초에 영락제가 만든 일종의 비밀경찰 기구로 황제가 신임하는 환관이 동창을 감독하는 동창제독 직에 임명되곤 했다)' 의 자리까지 겸해 실질적인 권한까지 쥐게 되니 조정은 완전히 위충현에 의해 장악당한 꼴과 다름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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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충현(魏忠賢).
 
남자의 그것과 권력을 맞바꾼 남자(?).
 
 
게다가 동림당의 실각으로 그동안 숨죽여오던 동림당의 반대파들과 심지어는 몇몇 동림당 인사들까지 위충현을 위시한 엄당(閹黨)에 가담하는 일마저 일어났고 위충현의 세력은 점점 불어나 나중에 이르러서는 모든 권력은 오직 위충현, 한 사람이 쥐게 된다.
 
 
뒤에는 황제가 태산같이 받쳐주고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두르는 실권자로 군림한 위충현은 가히 두려움의 대상이었기에 심지어는 조정의 고관들도 위충현이 지나갈 때에는 길을 비켜주고 고개를 숙였다고 한다.
 
 
그 뿐이랴, 오직 황제에게만 허용되는 "만세(萬世 : 만년을 살아라라는 뜻으로 황제의 만수무강을 빌며 외치는 구호로 흔히 말하는 그 만세가 맞다)" 를 흉내내어 위충현은 자신에게는 "구천세(九千世 : 황제의 만년보다 조금 깎아 구천년으로 정함)" 를 외치게 하는가 하면 자신을 살아있는 신으로 모시게 하여 도읍 북경의 곳곳에 위충현 자신을 모시는 사당을 만들게 지시하기까지 했다.
 
 
이렇듯 그 위세가 하늘 높은 줄 모르고 한없이 치솟을때 졸지에 쫓겨난 동림당은 과연 가만히 있었을까.
 
 
한낱 고자들에게 밀려났는데 지체높은 사대부 양반들 자존심에 그럴 리 만무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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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나라를 고자놈들의 허전한 사타구니에 맡길 수는 없는 노릇입니다!"
 
"그렇다면 어디 기똥찬 계획이라도 있으시오?"
 
"상소를 올리면 되지요!"
 

 
사실 실질적으로 동림당이 위충현에 대항해 할 수있는 일은 그저 사대부들의 재주인 글솜씨를 적극 발휘해 위충현의 죄명을 낱낱이 드러내어 황제에게 상소로 고발하는 천편일률적인 방법 밖에 없었다.

 
서기 1622년, 대학사 유일경, 예부상서 손시행, 좌도어사 추원표, 부도어사 풍종오 등이 위충현의 횡포에 항거하는 의미로 관직을 사직.
 
서기 1624년, 동림당 인사 황존소란 사람이 위충현과 객씨로 인하여 망국이 우려된다는 내용의 상소를 올림.
 
같은 해 6월, 좌부어사 양련이 위충현의 죄상 24가지를 들어 상소.
 
황존소, 이응승, 위대중, 원화중의 주도로 동림당 인사를 포함한 명(明) 최고의 학부기관인 국자감의 학자들까지 도합 천여명이 100여건의 상소를 올려 위충현을 규탄.
 
 
이 무렵 동림당의 반(反) 위충현 투쟁은 최고조에 달했고 상소의 내용이 워낙 구구절절 옳은 말인데다 허를 찌르는 부분도 있어 위충현은 잠시 주춤하지만 정작 판단을 내려야 할 황제 천계제의 귀와 눈은 가려진지 오래였고 조정의 주인은 위충현이었으니 도중에 죄다 묵살되어 동림당의 피끓는 상소문들은 모두 공허한 외침에 지나지 않았다. 
 
사실 처음부터 안될 싸움이었다. 황제는 물론이고 조정의 실질적 대권은 위충현과 엄당이 꽉 쥐고 있는 상황에서 그깟 몇장의 상소문만 주구장창 올린다 한들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이것이 그저 공자왈 맹자왈 하며 글짓는 재주 밖에 없는 학자 및 사대부들의 한계였을지도 모르겠다. 차라리 후한(後漢)의 십상시를 토벌할때 마냥 물리적으로라도 군사를 동원해서 그 도당을 싹다 제거한다는 시나리오라면 모를까, 당시 동림당의 투쟁의지를 표명하는 수단이 고작 상소문 뿐이었다라는 점이 안타까울 따름이다.
 
 
아무튼, 동림당이 예상 밖으로 만만찮게 대항해오자 위충현은 위기를 느낀다.
 
 
그냥 쫓아낸 것으로 만족하고 있었으나 이제는 그것에만 안주할 때가 지났음을 알아차린 위충현은 아예 동림당 일파를 숙청해버릴 계획을 품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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