게시판 즐겨찾기
편집
드래그 앤 드롭으로
즐겨찾기 아이콘 위치 수정이 가능합니다.
명(明) 왕조 멸망사 : 막장으로 치닫다 - (5)
게시물ID : history_13334짧은주소 복사하기
작성자 : Belisarius
추천 : 27
조회수 : 2262회
댓글수 : 6개
등록시간 : 2014/01/03 14:40:52
 
 
 
- 막대한 낭비와 광세의 해(鑛稅─害) -
 
 
 
전편에서 살펴본 '만력 삼대정(萬曆三大征)' 으로 인하여 명(明)으 재정은 휘청거리기 시작한다. 한때 장거정(張居正)이 일조편법의 시행으로 거두어 들인 은(銀)도 이 바람에 거진 소진되고 남아있지 않은 상태였다.
 
 
재정의 궁핍사태가 최악으로 치닫기 시작할 이 무렵에도 한창 태정(怠政)으로 일절 정사에 관심을 두지않던 만력제(萬曆帝)는 그 혼미함을 유감없이 드러낸다.
 
 
역사의 혼군-폭군을 보노라면 그들의 공통된 행태가 있는데 바로 무리한 토목공사다. 만력제 역시 이 점에서는 완벽한 혼군 그 자체였다. 그가 벌인 토목공사란 다름아닌 자신의 능(陵) 축조였다.
 
 
죽어서도 그 권력을 과시하고 유지하고 싶어했던 중국의 역대 황제들이 예로부터 자신의 무덤만큼은 거대하고 호화롭게 만들었다고는 하지만 축조에 들어가는 비용이 나라를 거덜낼 수준으로 무리하게 축조하는 짓은 삼갔던 것인데 만력제는 무려 2년치 예산을 털어다가 무덤건설에 써먹는 모습을 보인다. 
 
 
만력제가 자신의 무덤축조 공사를 시작한 때는 불과 22살의 나이로, 재위에 오른지 10년째에 접어들 무렵이었다. 시기상으로는 소위 말하는 만력 삼대정(萬曆三大征)의 시기보다 10년 전의 시절로, 재정이 파탄나기 전이었다고는 하나 개인의 사후를 위해 나라의 2년치 예산을 끌어다가 털어먹었다라는 건 전무후무할 돈지랄이었다.
 
 
능(陵)은 약 6년간의 공사 끝에 완공되었다. 아무래도 들인 비용이 비용이었던지라 모습을 드러낸 무덤은 차라리 호화롭게 치장된 지하궁전에 가까웠다.
 
 
%BB%E7%C1%F8_262-tourartist.jpg
 
만력제의 무덤 정릉(定陵)의 외경.
 
%BB%E7%C1%F8_231-tourartist.jpg
 
관이 안치되었던 내부의 모습.
 
천장이며 벽면이며 바닥모두 옥으로 만들어졌다고 한다.
 
%BB%E7%C1%F8_232-tourartist.jpg
 
사후세계에서도 권력의 연장을 꿈꿨듯 무덤에도 옥좌를 만들어두었다.
 
참고로 말하자면 저 옥좌 위의 돈뭉치들은 관광객들이 행운을 비는 의미로 저렇게 돈을 던진 것이라고 하는데 하필이면 나라 말아먹은 황제에게 뭘 바라고 그러는 건지 모르겠다.
 
 
 
만력제의 낭비는 여기에서 그치지 않는다. 아무리 궁핍한 재정이라 해도 민생을 위해 투자하는 모습이라도 보였더라면 낭비라는 표현을 쓰기가 송구스럽겠지만 만력제가 돈을 쓴데라고는 순전히 황실 뿐이었다.  
 
 
앞서 예전에도 밝혔듯 만력제가 파업을 선언하는 계기가 된 쟁국본(爭國本)의 원인이자 논란대상이었던 아들 복왕(福王) 주상순(朱常洵)의 혼인비용에도 상당한 액수의 돈을 쏟아부었는데 은(銀)으로 따져서 30만냥에 달했다고 한다.
 
거기다 당시 주상순(朱常洵)의 임지였던 낙양(洛陽)에다 아비로서 아들에게 축하의 의미로 선물을 해준답시고 28만냥의 거금을 들여 그야말로 거대한 저택을 지어주는 기염을 토한다. 토탈 약 60만냥이 아들의 결혼식에 들어간 셈이다.
 
 
전편에서 다룬 보바이(哮拜)의 난을 진압하는데에 들어간 전비가 약 200만냥이었다는 것을 감안하자면 1/3의 비용 정도를 한낱 결혼식에다 썼다는 얘기가 된다. 그냥 이건 뭐...
 
 
하기사 쟁국본(爭國本)을 벌여 나라의 존망을 초래할만큼 애지중지하던 아들이었으니 그만큼 돈을 갖다 쓰지 않았겠나 싶긴 하다만 한낱 결혼식에 돈을 저만치 들이부었으니 팔불출도 이런 팔불출이 없지 않을까 한다.
 
 
게다가 또 하필이면 1596년에서 1597년, 양년에 걸쳐 궁성에서 한차례 화재가 발생해 황제가 업무를 보는 대전이고 뭐며 중요건물 세 채를 비롯해 몇채의 건물들이 전소되는 사태가 벌어지는데 이를 재건하는데에도 역시 수백만냥, 정확한 수치로는 은(銀) 930만냥이 소비된다.
 
 
궁궐이 타버렸으니 의당 재건하는 것이 맞다 하겠지만 원체 이전부터 돈지랄을 하던 만력제였던지라 오죽했으면 보다 못한 신하들이 극구 말리기까지 한다.
 
 
"하늘이 백성의 고통을 생각하고 폐하께 훈계를 내리고자 세 전(三殿)을 불태운 것입니다. 그런데 어찌하여 또 백성들을 괴롭히려 하십니까?
 
 
돈을 마련하고자 당연히 백성들의 고혈을 쥐어짰을터였다. 그러니 더이상 백성들을 괴롭히지 말라고 진언하는 것이었는데 만력제는 이를 무시하고 제국 각지에서 재건비용은 물론이고 물자까지도 걷어올리라는 명을 내린다.
 
 
명(明)의 도읍 북경(北京) 인근에는 이렇다할 좋은 목재가 없어 새로 건물을 짓는데에 차질을 빚고 있었는데 마냥 좌시하고 있을 수만은 없어 저 멀리 광동성(廣東省), 사천성(四川省), 광서성(廣西省)과 같은 지방에다 갖다 쓸 목재들을 베어다 올리라고 한 것이다.
 
 
그렇다고 이 세금과 물자들이 고스란히 재건에 쓰였느냐, 그것도 아니올시다였다. 태업으로 정치에서 손을 뗀 만력제가 정사의 일부분을 환관들에게 일임했다는 것은 전에 밝혔다. 그 바람에 환관들이 판을 치다가 몽골의 보바이의 난도 초래했던 것인데, 환관들의 전횡은 계속되어 이때 재건에 쓰일 세금 일부가 환관들의 호주머니로 들어가기도 했다.
 
 
지금까지 만력제가 들이부은 예산을 수치로 대강이나마 환산해보자면 이렇다.
 
 
만력치세 초에 장거정이 일조편법으로 벌은 돈은 은(銀) 400만냥 가량된다고 한다.
 
거기다 만력제가 자신의 능(陵) 축조에 들인 무려 2년치 예산 : 은 800만냥
아들 주상순(朱常洵)의 혼례비용 : 은 60만냥
1596년~1597년 궁궐 대화재로 인해 발생한 재건비용 : 은 930만냥
만력 삼대정(萬曆三大征)에 들어간 전비 : 임진왜란 - 은 700만냥/보바이의 난 - 은 200만냥/양응룡의 난 - 은 200~300만냥
 
 
더 이상의 자세한 설명은 생략한다.
 
적자도 이런 적자가 없다. 저때의 은(銀) 가치가 오늘날에는 얼마나 되는지는 몰라 피해규모는 실측하기 어렵지만 한눈에 봐도 막대한 규모의 피해였을 것이다. 장거정이 거두어들인 은 400만냥 따위는 이미 증발해버린지 오래였고 제국의 재정은 휘청거리기 시작한다.
 
 
재정이 어려워지니 자연스레 이를 타파할 방도를 찾게 되는데, 그래서 만력제가 생각해낸 것이 바로 '광세의 해(鑛稅─害)' 라는 폐해를 불러온 세금제도였다.
 
 
파탄나버릴 대로 나버린 구멍난 재정을 메꾸고자 만력제는 주위의 환관들을 광감(鑛監 : 금광이나 은광과 같은 광산(鑛山)을 감독하는 직책), 세감(稅監 : 세금을 걷는 일을 감독하는 직책)으로 임명하고 제국 각지로 파견해 갖가지 명목을 갖다 붙여 세금을 걷게 하는 한편 광산의 개발 및 채굴 허가권을 부여하는 대신 막대한 양의 세금을 징수하게 했다.
 
 
잡세를 만든 일이나 광산의 개발채굴권을 허가하고 그 보수로 세금을 받은 일 자체가 비판받을만한 사유는 못되었다. 아무래도 급하게 돈을 마련하고자 무턱대고 과한 세금을 물려 징세해버리면 자칫 민란의 우려가 있었기에 사전에 백성들이 충분히 납득할 만한 사유를 들어 이해시켰지만 문제는 이 감독관들인 환관들에 있었다.
 
 
0730-100704_3054_3.jpg
 
중국 드라마 <강산풍우정>에서의 위충현(魏忠賢).
 
나라따윈 말아먹어주겠다는 회심의 미소.
 
황제의 무능을 틈타 어느순간부터인가 조정에 깊숙히 침투하여 암세포처럼 자리잡고 있던 환관들은
만력제의 대에 조짐을 보이다가 훗날 다음 대인 천계제(天啓帝)의 대에 표면화되어 본격적으로 전횡하며 
국운을 쇠하게 만든 직접적인 원인이 된다. 특히 사진 속의 인물인 위충현(魏忠賢)이 가장 대표적 인물.
 
 
중국의 역대왕조들의 최후를 보자면 환관의 전횡이라는 고질적 병을 앓다가 무너진 경우가 여럿있다. 후한(後漢)의 십상시가 그러했고 당(唐) 왕조도 무너진 데에는 환관의 입김이 적지않았다.
 
특히 명(明) 왕조가 환관에게 제대로 피 본 경우로, 이후 천계제(天啓帝) 치세를 다루면서 차차 나올 내용이지만 이 만력제의 대부터 슬슬 전횡의 조짐을 보이던 환관들이었다.
 
 
황제로부터 세금 감독관에 임명된 환관들은 이를 악용해 황제의 명을 내세우며 갖은 명목의 세금을 거두어들이고 그 일부를 빼돌리는 등, 가렴주구의 행위들을 일삼기 시작한다. 나중에는 아예 광산까지 사유화해버려 수탈의 수단으로 삼는 짓도 마다하지 않았다.
 
 
환관들의 폭정에 백성들은 항거하여 민란을 일으키기에 이르는데 이를 반세(反稅)운동이라 부르며 여기에 호응한 '항조노변(抗租奴變)' 이란 봉기까지 연쇄반응으로 일어난다.
 
 
이 항조노변(抗租奴變)이란 당시 수탈자로 변모해있던 지주층과 사대부 향신(鄕紳 : 2편에서 언급함)층 및 중소상인 고리대금업자들에게 시달리고 착취당하던 소작농과 노예들이 반발하여 봉기한 사건을 말한다.
 
 
항조노변이나 반세운동 모두 당시 문란한 세태에 항거하여 일어난 민중봉기이었던 만큼 훗날 명조(明朝)를 파멸로 몰아넣는 이자성(李自成)의 난과 같은 대규모 민란을 예고하는 듯한 조짐이 이미 만력제의 대에 보이고 있었던 것이다.
 
 
이 일련의 과정들을 통틀어 '광세의 해(鑛稅─害)' 라 부른다.
 
 
au4540868.jpg
 
 이자성(李自成).
 
훗날 명(明)의 숨통을 끊어버려 완전히 끝장내는 인물.
아시는 분들은 다 아시겠지만 행여나 모르는 분들을 위해 자세한건 차차 보도록 하자.
 


민중의 반란도 심해지고 조정 내에서도 신하들이 환관의 그와같은 전횡을 비판하며 즉각 광감(鑛監), 세감(稅監)의 직책을 폐하고 환관들을 모두 처벌할 것을 주장하여 환관들의 세금징수는 중단되고 '광세의 해' 는 사그라들게 되지만 이도 잠시, 다시 고개를 쳐들어 1620년에 만력제가 죽기 전까지 계속되었다.
 
 
 
지금까지 쭉 보았듯이 이 만력제의 치세기간 동안의 명은 무엇보다 황제 만력제 자신이 국사를 손놓아버리는 사상 초유의 사태에다 황제 주도하의 막대한 낭비, 만력 삼대정으로 요약되는 잦은 전쟁에 들어간 비용으로 인한 재정의 파탄, 민중봉기를 야기할 만큼 그 정도가 심했던 환관의 전횡에다 훗날 천계제(天啓帝)의 대에 본격적으로 불거지는 환관과 당시의 세태를 비판하며 이를 시정하고자 했던 개혁세력인 동림당(東林黨) 간의 당쟁도 점차 조짐을 보이는 등 갖은 악재가 겹쳐 본격적으로 쇠퇴하는 시기였다.
 
 
하지만 뭐니뭐니해도 이 모든 사건 및 사태의 근본적 책임과 명이 쇠하게 된 원인에는 모두 만력제(萬曆帝), 이 한사람에 있다고 봐도 거의 무방하다.
 
 
장거정의 집권을 다룰때에도 언급한 내용이지만 치세초기에 만력중흥(萬曆中興)이라 불리우는 중흥기를 맞이하여 그제까지 있었던 전대의 폐단들을 청산하고 충분히 안정된 중흥기로 발전할 수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만력제 이 한사람의 무능함과 의욕상실 때문에 연쇄반응으로 직접적으로 국운을 기울게 하는 사건들을 야기했다.
 
 
물론 임진왜란 같은 외부적 조건에 의한 타격이야 어쩔 수 없다라지만 그 밖의 사례들을 보자라면 모두가 순전히 실책 탓이다. 한치의 변명도 용납이 되지 않을만큼 야기된 사건들 모두가 만력제의 혼정 탓이었다.
 
 
대대적인 구조개혁이라도 벌어져 나라 자체를 뒤짚어 엎고 다시 시작하지 않는 이상 명(明)은 이미 만력제의 대에 돌이킬 수 없는 지경에 이르러 있었던 것이다.
 
 
물론 만력제의 대부터 서서히 발흥하던 만주(滿州)의 여진(女眞)이 머지않아 성장하여 명(明)에 도전하는 급변했던 외부정세 탓도 있겠지만 그 전에 안에서부터 이미 썩어들어가던 판국에 뭘 더 바라겠는가.
 
 
 
 
- 천계제(天啓帝) 즉위 -
 
 
 
서기 1620년, 만력제(萬曆帝)가 붕어한다. 무려 48년간 제위에 앉아 있었다지만 무치(無治)에 가까운 치세였다.
 
 
그리고 그 뒤를 이어 즉위한 이는 만력제의 장남으로 태자시절 쟁국본(爭國本)에 휘말려 갖은 고초를 겪었던 주상락(朱常洛)이었다.
 
 
태창제.jpg
 
 
명(明) 광종(光宗) 태창제(泰昌帝) 주상락(朱常洛).
 
 
 
선대의 혼정을 무마하기라도 하려는듯 태창제(泰昌帝)는 황실의 내탕금을 빼다가 요동(遼東)과 같은 동북방 변경을 순시하며 변방을 지키는 병사들의 노고를 치하하고 위로하는 등 국방에 치중하는 모습을 보여 나름 선전하지만 즉위한지 불과 한 달만에 급사하고 만다.
 
사인은 정확하게 밝혀지지 않았으나 평소 호색했던 태창제에게 바친 정력제 비스무리한 약이 원인이 되어 죽었다는 소문이 돌는 등 여러 의혹들이 난무해 그냥 병사로 치부된다. 그때 태창제의 나이는 38세. 
 
 
단명해버린 태창제의 뒤를 이어 장남 주유교(朱由校)가 즉위하여 그가 곧 명(明)의 제16대 황제 희종(熹宗) 천계제(天啓帝)다.
 
 
Jianqi_Emperor.jpg
 
명(明) 희종(熹宗) 천계제(天啓帝) 주유교(朱由校).
 
 
 
 
서기 1620년, 천계제(天啓帝)가 즉위했을 무렵의 국내외 정세는 불안했다.
 
 
할아버지 만력제의 대부터 시작된 환관의 전횡과 이를 비판하는 동림당(東林黨)간의 당쟁은 격화되어가고 있었고 환관과 지주층들의 폐단과 악정으로 민생은 피폐하여 민중봉기의 조짐이 역력했던데다 동북방의 만주(滿州)에서는 건주여진(建洲女眞)족의 지도자 누르하치(努爾哈赤)가 4년 전인 서기 1616년에 여진족을 통일하고 '금(金)' 을 세워 도전해오고 있었다.
 
 
무엇보다 군주 천계제의 뛰어난 자질이 절실히 요구되는 형국이었건만, 천계제는 뛰어난 자질은 커녕 문맹에 가까운 무능한 인물이었으니 이 또한 명(明)의 팔자요 국운이라 하겠다.
 
 
 
 
참고로 훗날 청(淸)의 전신이 되는 금(金)의 수립과정에 대해서는 나중에 따로 쓰겠습니다. 
 

 

 





전체 추천리스트 보기
새로운 댓글이 없습니다.
새로운 댓글 확인하기
글쓰기
◀뒤로가기
PC버전
맨위로▲
공지 운영 자료창고 청소년보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