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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세기말~13세기초 그루지야황금시대를 통치한 타마르 여왕
게시물ID : history_13329짧은주소 복사하기
작성자 : 맨담
추천 : 10
조회수 : 1354회
댓글수 : 2개
등록시간 : 2014/01/02 23:26:47

위 동영상은 타마르 여왕을 모티브로 한 춤이구요...

SAMAIA는 3명의 여성댄서가 추는...그루지야 옛 수도 므츠헤타의 한 성당의 오랜 프레스코화에 그려져 있는 예술, 시와 음악의 MUSE로 상징되는... 민속춤으로 기원전 부터 전래 되었다 합니다.





그러나 오늘날에는 그루지아의 황금시대인 12~13세기를 통치했던 TAMAR 여왕의 젊음과, 영화, 그리고 권력의 삼위일체를 표현하는 단순하면서도 부드럽고 우아한 춤사위가 하나의 하모니로 어울어져 조화를 이루다는 의미로 해석하고 있습니다.

이 춤꾼들의 의상은 Simon Virsaladze (1908~1989)에 의해 새롭게 디자인 되었으며 1945년에 설립된 그루지아 국립발레단 '수키슈빌리'의 창설멤버인 Iliko Sukhishvili와 Nino Ramishvili에 의해 재해석되었으며 2세인 Tengiz Sukhishvili가 상기 동영상에서 안무를 맡았습니다.

참고로 동영상의 배경음악으로는 오리지날 댄스뮤직 Samaia가 아닌 VAS 밴드의 타이틀 "Garden of Soul"의 Samaya를 사용했습니다. 





이제 타마르 여왕에 대한 설명으로 넘어가서..


타마르여왕은 기오르기 3세(1155~1184)의 장녀로 어린 나이인 1178년에 이미 아버지와 권좌를 나눠 가졌고 이후 1184년 부왕 승하 후에 정식으로 왕위를 계승하였다. 그러나 당시 막강한 세력이었던 제후들이 왕의 죽음을 자신들의 세력강화의 계기로 삼아 왕정에서 귀족 가문들의 역할론을 강력히 요구하자 여왕도 이에 따르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자 당시 재정담당관이었던 Qutlu Arslan이 입법과 사법권을 가진 정치조직인 카라비의 설치를 주장하였고 이를 거부한 타마르에 맞서 그루지아왕국을 내전의 벼랑 끝으로 몰아 넣었다. 그 결과 왕권은 약화되었고 귀족들이 주축이 된 왕실협의회의 권한은 더욱 공고해 졌다. 한편 귀족들은 젊은 여왕의 부군을 간택하는데도 영향력을 행사해 결국은 1185년 수즈달공국의 백작 Andrei Bogolyubsky의 아들인 러시아의 Yuri Bogolyubsky공과 결혼한다. 그러나 유리의 방탕과 일련의 음모로 인해 파혼하게 되고 1189년 바그라티오니(Bagrationi) 왕가의 오세티아 가계 일원인 David Soslan공과 재혼한다. 그후 1189~1191년 사이에 전남편 유리와 몇몇 그루지야 귀족들이 결탁하여 2차례의 반란을 일으키나 모두 실패로 끝나고 만다.


이와같은 내환에도 불구하고 그루지아는 강력한 왕국으로 건재했으며 외교정책에서도 상당한 성과를 거둔다. 1193~1194년 사이 그루지아군은 Bardav 와 Erserum을 포함한 남서부의 여러 지방을 정복하게 된다. 1195년에는 Shamkor 전투에서 무슬림 연합군을 격파하면서 코카서스 남동부까지 왕국의 영토를 확장하였다. 또한 1202년에도 술탄 룸(Rum)이 이끄는 Basian 전투에서 승리함으로써 타마르는 1201~1203년 동안 Ani, Arran과 Dvin까지 병합하게 된다. 또한 1209년 그루지아 군대는 강력한 Armen-Shahs와 Erzzurum 및 Erzinjan의 수장들을 포함하여 Kars의 Emirate를 포로로 잡는 성과를 거두고 북코카서스의 여러 종족들을 다스리게 된다. 그리고 흑해 남쪽해안까지 영향력을 행사하여 그루지야어를 사용하는 많은 신민들을 그곳으로 이주시켰다. 1204년에는 이지역에서 향후 250년간이나 존속하는 Trebizond왕국을 세워 주요한 무역거점으로 삼았다. 한편 아제르바이젠과도 전쟁을 벌려 1208년 Ardabi와 Tabriz까지 진출했으며 1210년에는 이란 북부지역인 Qazvin과 Khoy를 복속시켰다. 

이러한 승리는 흑해에서 카스피해를 아우르면서 코카서스산에서 반(Van)호수까지 영향력을 행사하는 범코카서스 왕국을 건설하게 되었고 이로써 그루지아는 막강한 국력을 과시하며 황금시대를 맞게 된다. 한편 정치 군사적인 번성은 소아시아지방 전역에 걸쳐 그루지야의 종교와 문화를 확산시키는 계기가 되었다. 또한 안정적이고 강력한 중앙권력을 기반으로 자연스럽게 도시들이 번창하고 무역과 기술이 동반 발전하게 된다. 결과적으로 타마르여왕 치세에 그루지야 과학과 예술의 르네상스를 맞이한다. 많은 학술서적과 문학작품들이 츨간되었고 동시에 채색필사본, 세밀화 및 금세공의 기술이 그 정점에 달했다. 또한 여왕의 후원을 받은 그루지아 수도원들이 성지를 포함한 소아시아에서 전성기를 구가하였다. 끝으로 타마르여왕에게 바쳐진 쇼타 루스타벨리의 서사시 '표범가죽을 입은 기사'는 아직도 이 시대의 가장 뛰어난 문화유산으로 남아있다. 한편 타마르의 사망시기에 대해서는 1207년 혹은 1210년 심지어 1213년까지 학자들 사이에도 의견이 분분하며 아직까지 그녀의 시신이 묻힌 장소 조차 비밀에 싸여있다.

 타마르여왕은 그루지야 역사상 가장 위대한 왕으로 칭송되는 다비드대왕(David the Builder: )의 증손녀이기도 한데 사후 800년 후인 21세기에 그루지아 화폐 50라리의 전면 초상화로 다시 부활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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