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폴레옹 보나파르트 -혁명 프랑스
영웅이 독재자가 된 전형적인 경우. 프랑스 대혁명 이후 나폴레옹은 왕당파들의 반란을 진압하고
이탈리아 전쟁에서 오스트리아와 사르데냐 반란군을 격파, 이집트를 정복하는 등 위기에 처한 공화정을 구한 영웅이었다.
그러나 브뤼메르 18일의 쿠데타를 일으켜 스스로 통령이 되었고, 영국, 오스트리아, 러시아등 전유럽과 싸워 승리를 거둔뒤
공화정을 뒤엎고 황제가 된다. 수많은 전쟁승리로 거의 전유럽의 지배자가 되었으나, 러시아 원정에서 패한뒤 몰락한다.
전쟁 외에도 나폴레옹 법전을 비롯하여 법을 세우고, 동양의 과거제처럼 능력을 중시하는 관료제를 확립하고 봉건제를
사실상 폐지하게 되는 계기가 되는 여러 업적이 많은 인물로, 헤겔은 그를 '절대정신'이라고 평가한 적이 있었다.
현대 프랑스에선 나라를 구한 영웅이라는 찬사와 나라를 망친 전쟁광이라는 평가를 동시에 듣는 인물.
사실 그가 황제직에 오르지만 않았어도 그가 이룬 업적이 하도 엄청나 찬사를 들었겠지만, 세습이 되는 제정으로 돌아가
스스로 황제직에 앉은 것은 변명의 여지가 없는 일이고(물론 전유럽과 전쟁하는 당시 상황에 비추어 어쩔수없는 선택이라고 변호하는 경우도 있다.)
전쟁으로 프랑스가 황폐해진 것이 너무 큰지라...
네윈 -버마
버마의 독립영웅. 영국에 대항하여 독립운동을 했으며, 일본이 버마를 점령하자 아웅산과 함께 영국군과 손을 잡고 또다시 일본에 대항하여
독립운동을 했다. 1962년, 네윈은 쿠데타를 일으켜 독재자가 되었고, 불교와 사회주의를 결합한
일명 버마식 사회주의를이거 어디서 많이 듣던 소린데 주창했다. 그러나 외국인 기업가 수백명을 추방하고
모든 민간기업을 국유화해 투자가 끊기고 미얀마 경제는 완전히 말아먹혀 최빈국으로 전락하게 된다.
26년만인 1988년, 국민들의 민주화 요구로 권력에서 물러난다.
쿠데타로 정권을 잡은데다가, 경제를 완전히 말아먹고, 점성술로 정책을 결정하는 기행까지 선보인 인물이라 좋은평가는 듣지 못한다.
로버트 무가베 -짐바브웨
영국 옥스퍼드 대학출신의 엘리트로, 로디지아의 백인정권에 맞서 짐바브웨의 독립운동에 헌신했으며, 그 유명한 만델라의 친우이기도 했다.
그러나 1980년 짐바브웨 독립 이후 지금까지 짐바브웨를 통치하는 독재자. 다만 아프리카내에는 옛 추장 및 군주체제의 인식이 많이 남아있기에,
그의 정책을 욕하지 그를 독재자라고 욕하지는 않는다고 한다. 80년대 전반 민간인 2만명을 학살했고, 막장 경제정책으로 인플레이션을 초래,
구골(10의 100승. 참고로 우주의 존재하는 모든 원자수의 총합이 대략 10의 80승이다;;)이라는 단위를
현실세계에 등장시킨 장본인으로 평가는 그다지. 좋지 않다.
필리프 페탱 -프랑스
1차세계대전 프랑스 최대의 위기였던 베르됭 전투에서 열세의 프랑스군을 이끌고 무려 10개월동안 독일군의 공세를 막아낸 인물로,
사실상 전쟁의 승패를 결정지었다. 그는 전쟁영웅으로 추앙받아 프랑스 거의 모든 마을에 페탱의 이름을 딴 거리와 마을이 만들어졌으며,
프랑스의 원수 칭호를 받고 군에서 은퇴하였다. 그러나 그가 80대가 됬을 무렵, 2차세계대전에서 패전의 위기에 처한 프랑스가
국민의 신뢰를 얻기 위해 그의 복귀를 요청했고, 그에게 행정권과 입법권을 맡기는 전권을 주어 독재자의 자리에 올랐다. 페탱은 휴전협상을
주도했고, 나치와 겉으로 협력하며 프랑스의 참전을 막았다. 전후, 나치협력자로 분류되어 사형을 선고받았다.
페탱에 대한 평가는 극과 극이다. 프랑스 내에선 크게 3가지 평가를 받는데, 첫째는 조국을 배신하고 나치에 나라를 팔은 배신자,
두번째는 비록 결과적으로 프랑스에게 해가 되었으나 의도는 좋았던 오판자, 세번째는 전쟁의 참화에서 프랑스를 구해낸 해방자.
나치와 협력하면서 참전을 회피했고, 레지스탕스를 붙잡아 독일에 넘겼지만 유태인이나 노동자들을 나치에게 넘기는 것은
최대한 줄이는 등 나름 실리적인 모습을 보였기 때문. 페탱에 대한 평가는 프랑스내에서도 논쟁거리중 하나다.
호치민- 베트남
베트남의 아버지. 프랑스를 상대로 베트남 독립운동을 펼쳤으며, 일본이 들어왔을때 일부 그들이 우릴 해방시켜줄 거라며 기뻐하던
독립운동가들에게 "조선 사람들이 일본의 지배를 받아 기쁘다고 하던가?" 라는 일침을 날리며 반일투쟁을 하였다.
또한 봉건 군주제를 종식시키고 베트남 민주공화국을 수립, 1차 인도차이나 전쟁에서 프랑스를 베트남에서 몰아내었다.
공산주의자이자 민족주의자로 남베트남의 공산화를 주도하다가 베트남전이 발발, 종전을 맞이하지 못하고 심장병으로 사망한다.
호치민은 매우 청렴하여 낡은 옷을 기워 입기 일쑤였고, 폐타이어를 잘라 신발을 만들어 신었을 정도였다.
그 뿐만 아니라 하노이에 있는 그의 집무실에는 고가 귀중품은 커녕 고물 라디오 한 대와 책 몇 권이 있는 게 전부였다.
또한 3찬만을 하며 살았다고한다. 왜 3찬만을 드시냐고 물으니 "내가 반찬하나를 더먹을때마다 우리 국민 하나가 더죽는다."라고 했다고 한다.
하지만 실은 그도 사람인지라 화려하고 풍족하게 살고픈 욕망이 없던 건 아니다. 친구에게 털어놓은 고백을 보면
"나도 마음껏 먹고 싶은 걸 먹고 편하게 살고 싶다네…"라고 고백했다. 그러나 그는 그걸 실제로 이루지 않으며 살았기에 전설이 되었다
그러나 이런 먼치킨이라고 욕을 안 먹는 것도 아니다. 특히 중국식 토지개혁을 도입한 일이 까이는데, 이 일로 농민봉기까지 일어나고
약 80만에 달하는 이들이 남베트남으로 내려가 버린 것은 유명한 일. 물론 당시 호치민이 중국의 입김을 무시할수 없는 상황이긴 했지만,
그 이후 농민봉기 진압 과정에서 약 5만에서 10만에 달하는 농민을 학살한 일은 쉴드치기 어렵다.
베트남인들에겐 거의 무한한 존경을 받고, 세계적으로도 일부 베트남에서 공적을 지나치게 과장한다 정도의 비판을 제한다면
긍정적인 평가를 듣는다. 다만 토지개혁, 베트남전으로 인해 베트남에서 도망쳐 나온 베트남계 이민자들 사이에선 평가가 바닥이다.
실제로 1999년 한 젊은 베트남인이 미국의 베트남계 이민자들이 모여사는 리틀 사이공에 있는 그의 비디오 가게에 호치민의 사진을 걸었다가
베트남계 이민자들의 거의 테러에 가까운 분노가 섞인 항의를 받았을 정도. 한국 공중파 뉴스에서도 해외토픽 부분에 당시 상황이 나왔는데,
중장년 베트남계 이민자가 격렬하게 항의하면서 경찰이 출동하면서 말리자
"호치민의 사진을 철거하지 않으면 나는 결코 물러나지 않겠다!"라고 절규하는 모습이 나왔다.
아타튀르크- 터키
터키의 아버지. 갈리폴리 전투에서 영국군을 막아내어 사실상 오스만 제국의 멸망을 막았고, 1차세계대전때 러시아군을 여러번 격퇴한 명장.
1차세계대전후 연합군이 패전한 오스만 제국을 해체하려 술탄과 세브르 조약을 맺자 명령을 거부하고 쿠데타를 일으킨다.
전국민적인 지지를 받은 아타튀르크는 프랑스군이나 아르메니아, 그리스군, 러시아군을 격퇴하며 연합군을 오스만 제국에서 몰아내고
세브르 조약을 전면 무효화시켜 나라의 분할을 막아냈다. 또한, 술탄을 추방, 오스만 제국을 뒤엎고 터키공화정을 수립하고
초대대통령으로 오른다. 여기까지만 봐도 멸망위기의 나라를 2번이나 구한 전쟁영웅+제정을 뒤엎고 공화정을 수립한 혁명가다.
거기다 비록 독재자였지만, 초대대통령으로도 많은 업적을 이루어냈는데, 세속주의 원칙을 펼쳐 정치와 종교를 분리시켰다.
또한 터키의 근대화를 이루어내어 남녀평등, 의무교육을 실시했고 언어개혁법을 통해 터키어를 좀더 쉽게 바꾸어 문맹을 근절시키려 노력했다.
경제발전도 이루어냈으며, 국제정세에도 뛰어나 2차세계대전때 추축국편에 서지 않을것을 당부하기도 했다!
그러나 공 못지않게 과도 대단하다. 언론통제와 위험인물의 가택연금등 반민주적 행보를 보였다.
또한 이슬람 신자들 사이에선 이슬람을 파괴한 악마로 까인다. 실제로 아타튀르크는 과도하게 이슬람을 탄압해 오스만 제국인이라면
누구나 쓰던 이슬람 전통모자인 페스를 금지시키기도 했다. 터키판 단발령이라고나 할까?
물론 이에 대해 많은 이슬람 신자들의 반발이 있었지만 군부를 동원해 억누른다.
또한 아르메니아인 150만명이 학살된 아르메니아 학살에도 큰 책임이 있으며, 소수민족인 쿠르드족의 독립운동을 무력으로 진압,
독가스를 살포하여 데르심에서만 8만명을 학살하고 쿠르드 지도자들을 공개처형시켰다. 물론 터키에선 아타튀르크가 지시한 일은 아니라고
주장하고 있지만. 또한 정적들에 대한 암살배후라는 의혹도 받고 있으며, 죽을때까지 권력을 내려놓지 않은 것도 비판의 대상.
하지만 민간인 학살 대상자는 터키인이 아니라 외국인 혹은 소수민족이었고,
사실상 혼자서 터키를 설립했다고 봐도 될만큼 공이 대단한 인물이라 터키인에게는 거의 신앙이다 싶을 수준의 추앙을 받고 있으며,
전세계적으로도 평가가 높다. 다만 아무래도 터키에 의해 학살당한 아르메니아나 쿠르드족 사이에선 악마 수준으로 평가받고 있으며,
극단적인 이슬람 원리주의자들은 그의 동상에 테러를 일으킬 정도로 평가가 좋지 않다.
어쨌든 터키에서 아타튀르크의 욕을 하다간 맞아 죽을수도 있으며, 아예 아타튀르크 모독죄를 만들어
법으로 처벌하고 있다. 재밌는건, 이 아타튀르크 모독죄를 만든게 아타튀르크의 반대입장에 서있던 터키 민주당이었다는 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