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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새 자꾸 이상한 꿈을 꾼다"
"뭔 꿈?"
"요새 꿈에 자꾸 이효리가 나와"
"너가 연애를 오래 쉬더니 아예 맛이 갔구나 이거 먹고 정신차려라"
20년지기 내 친구는 정신차리라며 소주잔에 소주를 가득 따라주었다.
"하긴 너가 어렸을 때 핑클 엄청 좋아하긴 했지 빠돌이였잖아"
"그치 그때 내 장래희망이 이효리남편이었거든"
"꿈에서라도 꿈을 이루긴 했네 부럽다"
"그러게 내가 영화감독이더라고, 내 장래희망 2지망이 영화감독이었거든, 꿈에선 내가 이효리를 내 영화에 캐스팅하려고 자주 만나다 보니 서로 사랑에 빠진 뭐 그런 스토리였어"
"너 심각한데 병원가봐야 되는거 아냐?"
"나한테 맞아서 너가 먼저 병원갈 수도 있으니까 이거나 마셔라"
나는 친구의 잔에 소주를 따라 주며 말했다.
"근데 그 꿈이 너무 사실적인거야. 일어나서도 이효리 남자친구인 내가 꿈인지, 30살 취준생인 내가 꿈인지, 잘 모르겠는거야"
"아주 구운몽나셨네"
"그래서 자꾸 잘 때가 기대돼, 일부러 잠들려고 할 때도 있고 공부해야 되는데......"
친구는 웃으며 끼고 있던 팔짱을 풀었다 그리고 내 잔에 술을 따라주며 말했다.
"그래도 야 이제 남의 마누라 된 사람한테 왜그러냐? 현실 여자를 만나"
"네가 소개라도 시켜주든가"
"시험붙으면 우리회사 여직원 소개시켜줄게 일단 시험이나 붙어. 공부는 잘 돼가?"
"공부가 잘 돼서 하냐? 그냥 하는 거지, 내일부터 고시원 들어가려고, 너 그거 아냐? 내가 계약한 방에 손바닥만한 창문이 있는데 그거 때문에 5만원 더 냈어. 나름 리미티드 에디션이야 나중에 놀러와 "
나는 친구의 잔에 술을 따라주려 병을 들었다. 그러나 녀석은 다른 곳을 보고 있었다.
"뭐해?"
친구는 웃으며 텔레비전을 가리켰다.
"야 저기 니 여자친구 나온다."
텔레비전에는 화려한 영상의 광고가 나오고 있었다. 그리고 거기에는 어젯밤 나와 데이트를 하던 이효리가 춤을 추고 있었다.
"이쁘다"
"그러게, 저 누나는 늙지도 않네"
그 이후 친구와 나는 몇 병의 소주를 더 마셨다. 그리고 자리를 파할 때 쯤 내가 계산을 하려하자 친구는 말리며 말했다.
"공무원 돼서 이효리같은 여자친구 만나면 그때 너가 더 비싼거 사라"
"그럼 여자친구랑 술 먹지 너랑 왜 먹냐?"
나는 지갑을 다시 주머니에 넣으며 대답했다.
다음날 나는 고시원으로 이사를 했다. 그런데 고시원이 너무 좁다 보니 가져온 짐을 다 넣을 수가 없었다. 그래서 정말 필요한 것 빼고는 다 버리기로 했다.
이삿짐 박스를 하나씩 열어보기 시작했다. 대부분 보지 않는 책이거나 입지 않는 옷들이었다. 그러다 한 박스를 열게 됐다.
그 안에는 먼지 쌓인 잡동사니들이 있었다.
핑클 1집부터 핑클 포스터, 스크랩 북 등 여러 가지 핑클과 관련된 물건들이었다.
'내가 진짜 빠돌이긴 했구나'
오래된 물건들이라 혹시 중고사이트 같은 곳에 팔까 하다 이내 생각을 접고 버리기로 했다. 친구의 말대로 난 현실의 여자를 만나야 했고, 이효리까지 안고 가기엔 내 고시방이 너무 작았다.
쓸데없는 물건들을 다 버리고 나자 방안은 휑하다 싶을 정도로 깔끔해졌다. 방이 디이어트를 한 느낌이었다. 내 고시방은 가지고 있던 모든 지방과 기름기를 싹 뺀 채 보그나 엘르에 나올 법한 빼빼 마른 몸매가 되었다.
그리고 그날 밤 어김없이 내 꿈엔 이효리씨가 찾아왔다.
꿈에서 이효리씨는 환한 미소로 손을 흔들며 나에게 인사했다.
그러나 이제 나는 예전처럼 그녀와 즐거운 시간을 보낼 수 없었다.
"저 만나주시는 건 감사한데요. 이제 아무래도 못 만날 것 같네요. 제가 공무원 시험준비를 해야해서요"
"아 그래요? 그럼 어쩔 수 없죠"
역시 그녀는 쿨했다.
"죄송하네요. 사실 전 영화감독도 아니고요. 또 효리씨는 남편분도 계시고 하니까요"
"에이 뭐 어때요. 꿈인데요 뭐, 엄청 소심하시네"
꿈이었다. 그런데 꿈인데도 꿈한테 자꾸만 미안했다.
"방이 좁아져서 테잎들도 다 버렸네요. 미안해요."
"그건 좀 섭섭하네, 근데 요새 누가 테잎듣나요? 괜찮아요."
"그렇긴 하죠, 테잎은 다 버렸지만, 신곡 나오시면 제가 꼭 다운 받을게요"
그녀는 계속 미안해하는 나를 쳐다보고는 웃으면서 나를 안아 주었다.
"괜찮아요. 시험 꼭 붙으세요. 걱정하지마세요. 다 잘 될거에요."
나는 그녀에게 고맙다고 대답하려 했다.
그런데, 그 순간 나도 모르게 눈물이 나서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그녀와 다시 만나지 못한다는 생각 때문이었을까?
아니면 꿈인데도 너무 따뜻한 그녀의 체온 때문이었을까?
어쨌든 나는 한참을 그녀의 품안에서, 그녀의 옷깃이 젖을 때까지 울었던 것 같다.
그렇게 한참을 지나서야 나는 울음 때문에 쉰 목소리로 겨우 그녀에게 말했다.
"정말 고마워요"
그리고선 잠에서 깼다.
꿈에서 깬 나의 손 끝에는 베게의 축축한 감촉이 전해졌다.
눈 앞에는 철제문이 코에 닿을 듯 가까이 내 앞에 서있었다.
그리고 5만원짜리 햇빛들이 내 방, 안으로 쏟아져 들어오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