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년 전 먼저 꽃나라로 떠나신 나의 할아버지는 키가 크셨다. 꼬마시절, 할아버지와 청량리 시장을 다녀오는 날에는 종일 팔을 위로 쭉 뻗어 손을 잡고 다니느라 겨드랑이가 아팠다. 그래도 돌아오던 청량리역 지하철 입구에서 늘 사주시던 콩고물 가득 묻은 인절미 천 원 어치는 언제나 나를 따라 나서게 했다.
오른손 검지의 두마디, 중지의 한마디 그리고 왼손 약지의 한마디와 새끼의 손톱이 없으셨던 그 분의 손을 만지며 '할아버지, 안아파요? 호~'하면 '안아프다. 이제 다 나았다. 괜찮다' 하시던 기억이 난다.
이따금씩 할아버지는 불같이 화를 내시곤 했는데 놀라서 울던 내게 할머니께서 '너희 할아버지는 지금 몸이 아파서 저러시는거다'라고 하셨다. 다 커서 들었지만 젊은 시절 허벅지에 맞았던 총알때문에 평생을 다리에 통증에 시달리셨다 한다.
그 분은 눈에도 총알이 스쳐 한쪽눈은 거의 실명상태로 사셨다는데 난 전혀 눈치채지 못했다. 어린 나에게 할아버지는 무엇이든 해결할 수 있고 세상에서 제일 크고 강한 분이셨으니까.
17살의 할아버지는 어느 날 시장에 갔다가 사람들이 몰려있는걸 보셨단다. 키가 큰 할아버지가 사람들 뒤에서 고개를 빼고 무슨 일인가 들여다보는데 그 무리 중간에 있던 사람이 너 몇 살이냐고 묻더란다. 열일곱이요. 그 길로 할아버지는 부모님을 뵐 수 없었고 전쟁이 끝난 후 홀로 고생이란 고생은 다 하다 중매로 할머니를 만나 결혼을 하셨다.
우리 집은 증조부모의 생사도 모른 채 매년 제사를 지냈다. 언젠가 오랜 시간 미동도 없이 이산가족 상봉을 텔레비전으로 보시던 할아버지의 뒷 모습이 생각난다. 거동도 힘드실 정도로 쇠약해지셨을 때 속상한 나는 괜히 아빠한테 화를 냈다. 왜 건강하실때 이산가족 상봉 신청도 안했냐고. 아빠는 '아무리 신청해도 쉽게 되는게 아니더라...' 며 병실을 나가셨다. 지금은 평생 그리웠던 부모님을 만나셨겠지..
돌아가시면 대전으로 모실것이냐 동작으로 모실것이냐 하는 의논 자리에서 '대전이면 애들이 너무 멀어서 오기 힘들잖아. 서울로 하자.'셨던 그 분께 나는 왜 벌써 이런걸 의논하고 있냐고 역정을 내 버렸다.
얼마 전 '고지전'이라는 영화를 보는데 오열하듯 눈물이 터져 나왔다. 저 지옥에 열일곱 나의 할아버지가 계셨었구나. 영문도 모른 채 살기 위해 그렇게 계셨었겠구나. 2년 전만 해도 전쟁영화를 볼 때엔 그냥 그 현실이 너무 슬퍼서 영화 마지막에 조금 울고 그랬는데 그 날은 엉엉 소리까지 내며 울었다.
오늘은 6월 25일. 지금의 내가 있을 수 있게 해주신 그 분들의 희생에 감사드린다. 그리고 다시는 이 땅에 그런 지옥이 드리우지 않기를 바라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