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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明) 왕조 멸망사 : 몰락의 시작 -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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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 Belisarius
추천 : 19
조회수 : 1900회
댓글수 : 4개
등록시간 : 2013/12/31 12:30:21
 
 
장거정(張居正)의 사망 이후, 성인이 된 만력제(萬曆帝)는 친정을 시작했다.
 
중흥기를 맞이하여 당시 사회에서 문제시되던 각종 폐단의 청산, 경제개혁의 성공, 외적격퇴 등 완벽하다고 하기엔 부족하지만 어느정도 안정된 제국은 젊은 황제가 마음껏 자신의 포부를 펼치기엔 더할나위 없이 좋은 조건이었으리라.
 
 
장거정의 뜻을 이어받아 중흥기를 이어나갈 것이라 기대되었던 황제의 친정은 기대와는 상반되게 다름아닌 피바람으로 시작했다.
 
 
01-1.jpg
 
만력제(萬曆帝)의 능에서 출토된 익선관.
 
 
만력제(萬曆帝)의 치세가 2년째에 접어들 무렵, 만력제는 죽은 장거정의 묘를 파헤치고 그 시체를 꺼내 훼손하는 이른바, '부관참시' 형벌을 행한데다 그 가솔들도 모두 형벌로 다스릴 것을 명한다.
 
 
갑자기 이 무슨 짓인가 싶은 조치였다. 마치 죽은 장거정이 대역죄라도 지어 처벌하는 듯한 느낌이었다.
 
 
사실 만력제의 이와같은 행동은 장거정의 비리와 관련이 있었다.
 
 
 
 
- 삐뚤어질테다! -
 
 
 
정치판의 생리는 비리다. 이는 생전에 재물축재와 유흥에 극도로 엄격한 모습을 보였던 장거정에게도 모순되게 해당되는 말이었는듯 하다.
 
전편에서 서술한 철혈재상의 모습 그 이면에는 온갖 비리와 사치로 얼룩진 물밑작업이 있었던 것이다.   
 
 
hb1_199_i1.jpg
 
장거정(張居正).
 
훌륭한 내치성적을 거두었다라지만 그에 못지않게 비리도 저질러 평가가 갈리는 인물이다.
 
 
 
장거정은 만력제에게 엄격한 스승이었다. 특히 재물축재나 과한 유흥에 있어서는 과거에 사치와 유흥으로 패가망신한 제왕들을 사례로 들며 어린 만력제에게 누누이 경고하곤 했다. 어린 만력제는 그런 장거정에게 경외심을 가지고 마치 어려운 신하대하듯 했는데 그 두려움과 존경심은 대단했던지라 한번은 장거정이 집을 짓는다고 하자 개인 용돈을 빼주어 보태줄 정도였다고 한다.
 
 
문제는 그 경외스럽던 스승이 죽은 후에 발생했다. 일찍이 장거정이 자신의 뜻을 실현하고자 조정에서의 반대파를 근본적으로 차단할 목적으로 관리 탄핵기관인 언관과 지방의 서원을 철폐하는 등, 독재체제를 구축했음은 앞서 밝혔다.
 
 
하지만 그 독재자가 죽은 지금, 장거정 집권기 동안 억눌려있던 반대세력들은 고개를 쳐들고 벌떼같이 일어나 황제 만력제에게 생전 장거정이 저지른 각종 비리와 사치를 들추어내 낱낱이 고했다.
 
 
이에 만력제는 진위조사를 명령했고 그 과정에서 실제로 장거정이 벌인 비리가 쏟아져 나왔다.
 
 
그 중에는 만력제도 도저히 용납못할만한 충격과 분노를 불러온 건수도 몇가지 있었다.
 
 
무엇보다 생전 장거정이 모은 자산이 실로 막대했다는 것이 문제였다. 어찌나 많았는지 항간에는 장거정의 재산이 황제의 그것보다 더 많다는 소문이 돌 정도였다고 한다. 
 
재물축재의 그릇됨을 부르짖던 장거정의 생전모습이 선했을 만력제에겐 엄청난 충격이었다. 게다가 전국 곳곳에 그의 명의로 건립된 별장들과 저택들이 즐비하다는 사실도 머지않아 밝혀져 만력제의 충격은 곧 실망과 분노로 발전한다.
 
 
明神宗~1.JPG
 
아마도 멘붕이 왔을 만력제(萬曆帝).
 
 
 
경외의 눈길로 바라보며 그토록 자신이 믿어왔던 스승의 표리부동한 모습을 본 만력제의 심정은 참담했을 것이다.
 
 
결정적으로 만력제가 죽은 장거정에 대한 분노의 형벌을 결단하게 된데에는 당시 한창 몽골과 왜구를 막느라 여념이 없던 척계광에게 일러 장거정이 자신의 가마를 호위할 병력을 보내달라고 한 사건이 크게 작용했다.
 
 
적을 막으라고 척계광을 내보낼 때는 언제고 이제는 마땅히 토벌에 이용되어야 할 병력을 자신의 사적 일에 쓰려고 했던 것이었다. 거기다 한술 더떠 그 요구를 거절한 척계광을 파직하려 들기까지 했으니... 이를 알게된 만력제는 위에서 서술한대로 죽은 장거정과 그 유족들을 형벌로 다스릴 것을 명령했다.
 
 
이 사건을 계기로 만력제(萬曆帝)는 정치에 있어서 일종의 환멸을 느끼고 의욕과 뜻마저 상실하게 된다. 믿었던 신하의 도덕적 탈선이 본인의 의욕상실은 물론이고 색안경을 끼고 조정대신들을 보게 되는 불신의 사태까지 불러온 것이었다.
 
 
그러나 결정적으로 만력제가 정치에 뜻을 완전히 잃은 계기가 된 사건이 있었으니 1586년, 치세 15년째에 접어들 무렵에 벌어진 쟁국본(爭國本) 문제가 그것이다.
 
 
 
 
- 쟁국본(爭國本) -
 
 
 
 
쟁국본(爭國本)이란 그대로 풀이하자면 '국본(國本)을 두고 싸우다' 란 뜻으로, 여기서 국본(國本)은 다른 말로 태자나 왕세자를 뜻한다.
 
태자를 두고 싸우다, 즉 후계자를 누구로 정할 것인가를 두고 논쟁을 벌였다는 뜻이 되겠다.
 
대결주체는 만력제(萬曆帝)와 조정대신들.
 
 
논쟁은 만력제(萬曆帝)가 후궁 소생이었던 주상순(朱常洵)을 총애하여 태자로 책봉하려 했던 것에서 비롯되었다. 그러나 이는 곧 원칙을 중시하던 조정대신들의 완강한 반대에 부딪혔는데 신하들이 중요시하는 그 원칙이란 이러했다.
 
 
'정실(正室 : 황후)의 소생을 후계자로 세우되 정실 소생의 황자(皇子)가 없으면 장자(長子)를 세운다.'
 
 
이 종법(宗法)은 대대로 명(明) 왕조의 황위계승 원칙이었다. 그런고로 이 종법에 따르자면 만력제의 황후에게는 소생의 자식이 없었기에 다음의 우선순위에 해당되는 황자(皇子)는 주상순(朱常洵)과 마찬가지로 후궁소생이지만 장남이었던 주상락(朱常洛)이었던 것.
 
 
Taichang.jpg
 
 명(明) 광종(光宗) 태창제(泰昌帝) 주상락(朱常洛).
 
만력제(萬曆帝)의 장남으로 종법에 따라 응당 황태자가 되었어야 했지만 아버지 만력제(萬曆帝)가 다른 후궁소생의 자식을 총애하여
태자로 책봉하려 했기에 많은 어려움을 겪어야만 했다. 하지만 당장 위에 그의 묘호와 시호가 증명하듯이 결국엔 만력제(萬曆帝)의 뒤를 이어 명(明)의 15대 황제로 즉위했다.
 
 
 
논란은 불거져 만력제의 생모인 자성황태후(慈聖皇太后) 이씨(李氏)도 나서서 신하들의 주장에 동의하며 주상락(朱常洛)을 지지하고 대다수의 여론이 주상락(朱常洛)을 지지하고 있었지만 만력제(萬曆帝)는 요지부동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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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성황태후(慈聖皇太后) 이씨(李氏).
 
이씨(李氏) : "너 왜 상락이를 황태자로 책봉안하니?"
만력제(萬曆帝) : "애 엄마가 궁녀출신이잖아요. 그래서 싫어요."
이씨(李氏) : "....."
 
태후 이씨도 사실은 궁녀출신으로 만력제(萬曆帝)의 아버지인 융경제(隆慶帝)의 승은을 입어
만력제(萬曆帝)를 낳아 태후의 자리에까지 오른 사람이었다. 되려 자식놈에게 패드립 당한 셈.
 
 
만력제와 신하들 간의 대립은 절정에 달해 1589년에는 만력제가 병을 핑계로 '태정(怠政)' (한자 그대로 풀이하자면 '정치를 게을리 하다' 란 뜻으로 일종의 파업을 말한다)을 선언하는 사태에 이른다.
 
말이 간단해서 태정이고 파업이지 한 나라의 군주가 업무를 내팽개치고 나라 다스리는 것을 때려치웠다는 말은 실로 엄청난 사건이었다.

끝까지 지지않고 대드는 신하들에게 나름의 불만의 표시를 보인 것이었지만 문제는 그 방법과 수단도 찌질했을 뿐더러 잘못되었다는데에 있었다.
 
 
군주된 자로서 마땅히 결과가 자신이 원하든 원하지 않던 간에 어떤 식으로라도 결판을 봐서 국론을 하나로 통일시켜야 했음에도 불구하고 만력제(萬曆帝)는 이도저도 아니게 애매하게 결론도 나지 않은 상태로 무려 파업을 선언해버리니 정국이 어수선해졌음은 두말할 것도 없다.
 
 
이렇게 시작된 만력제(萬曆帝)의 파업은 무려 30년간 이어졌다.
 
 
서기 1589년 부로 손 뗐으니 그로부터 30년이면 서기 1620년.
만력제의 사망년도 역시 서기 1620년.
 
결국 죽을 때까지 일절 정치에 손도 안댔다는 얘기다.
 
 
중국사는 물론이고 세계사 전체를 통틀어서도 이런 군주가 있을까 싶다. 군주가 통치를 포기하니 조정은 물론이고 나라꼴이 제대로 돌아갈리 만무했으며 이 틈을 타 한때 장거정의 개혁으로 일소되었던 매관매직과 같은 관리들의 부정부패와 환관세력이 발호해 권세를 잡고 황제를 등에 업고 전횡하는 사태를 야기했다.
 
장거정의 개혁으로 명(明)은 잠시나마 중흥기를 맞이했다라고 하지만 문제는 개혁 직후 시작된 만력제의 태업 30년 동안 그 어떠한 제도나 개혁도 이루어지지 않았을 뿐더러, 당시 사회문제를 해결하고자 등장하는 동림당(東林黨)의 개혁도 무시되어 결국은 그 현상이 유지되어 몰락의 길로 접어든다.
 
 
 
이 글의 제목이 '몰락의 시작' 이듯, 만력제(萬曆帝)의 태정은 말 그대로 몰락의 시작이었다. 그리고 만력제는 정치에서 손뗀다는 태정기간 동안에도 그 몰락을 가속화시키는 짓들을 일삼게 되는데 이는 다음편에서 다루도록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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