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만력중흥(萬曆中興) -
명(明)의 제14대 황제, 신종(神宗) 만력제(萬曆帝) 주익균(朱翊鈞).
만력제(萬曆帝)는 불과 열 살남짓한 어린 나이로 황제에 즉위했다. 황제의 나이가 어리니 이를 대신할 섭정이 요구되었고 만력제의 생모인 황태후 이씨(李氏)가 후원을 맡게 된다.
비록 어린 나이였다고 하지만 만력제는 선황제 융경제(隆慶帝)의 대에 등용된 장거정(張居正)을 중용하여 장거정의 개혁안 및 정책들을 적극 지지하고 후원해주는 등, 정치에 대한 의욕을 드러내 후세에 전해지는 혼군의 오명과는 달리 치세 초기에는 명군의 면모를 보였다.
만력제(萬曆帝)가 장거정을 적극 후원해준 데에는 장거정이 만력제의 스승이기도 했던 이유도 있었다. 어린 만력제에게 스승 장거정은 자신의 사상을 적극 강론하였고 만력제 역시 그런 장거정의 뜻에 동의하며 믿고 국정을 맡긴 것이다.
황제의 후원을 등에 업은 재상 장거정은 조정에 구상해오던 개혁안들을 내놓아 공식표명했으며 자신의 뜻을 펼쳐나갔다.
(1) 관료사회의 정비
장거정이 먼저 손댄 것은 당시 문란했던 관료제의 폐단과 해이해져있던 관료들의 기강 바로잡기였다.
선대 황제들의 대로부터 이어져 내려온 매관매직이 판을 치고 있던 실태를 항상 문제시 해왔던 장거정은 조정대신들을 대상으로 한 대대적인 사찰을 벌여 매관매직으로 벼슬을 얻은 자들을 모두 내쫓고 다른 이들에게는 엄중한 경고와 함께 단속강화에 나서 전대의 폐단 청산에 나서는 한편, 신상필벌의 원칙에 입각한 인사제도를 마련하여 관료들의 업무처리 효율을 높임과 동시에 무능함에도 불구하고 관리직에 앉아있던 이들은 가차없이 해고해버리는 법도 제정하여 공평한 관료사회 추구를 꾀했다.
특히 권세가들에게 있어서는 강력한 처벌을 시행했다. 한가지 사례를 들어보자면, 당시 권세를 누리던 검국공(黔国公) 목조필(沐朝弼)이란 이가 있었는데 자주 위헌되는 일들을 벌였다고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감찰기관에서는 목조필의 권세를 두려워하여 차마 건드리지는 못하고 있었는데 장거정은 가차없이 법을 시행해 목조필을 비롯한 그 아들들까지 모조리 붙잡아다 조정으로 끌고 왔다고 한다. 장거정의 과감한 조치에 황제는 물론이고 조정신료들까지 그 기세에 짓눌렸다는 얘기가 전해진다.
이렇듯 당대에 폐단이 판치며 기강이 문란했던 관료사회를 바로잡은 일들은 일찍이 장거정이 만력제에게 강론했던 '어질고 유능한 인재를 가까이하라' 와도 부합되는 개혁이었다.
(2) 경제개혁
장거정이 경제분야에 있어서 개혁의 메스를 들이대 시행한 여러 개혁안들 중에서 무엇보다 장거정의 최대 공적으로 손꼽히는 것은 일조편법(一條鞭法)이 아닐까 한다. 수능 세계사는 물론이고 명(明)나라를 공부하면 필수로 등장하는 부분인데 당시 부정부패의 수단이 되어있던 기존의 세제인 양세법(兩稅法)을 대신하여 새로이 도입한 세금제도다.
일조편법이 등장한 배경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먼저 기존의 세제인 양세법(兩稅法)의 원리에 대해 알아둘 필요가 있다. 당(唐) 왕조에서 도입하여 명(明)대에 이르기까지 세제로 적용되어 왔던 양세법(兩稅法)은 간단하게 풀이하자면 1년에 세금을 두번을 걷는 세법으로, 나라에서 백성들이 소유한 토지의 많고 적음에 따라 세금을 부과하는 것을 원칙으로 했다.
이 양세법 역시 예전 세법의 단점을 해결할 필요에 의해 생겨난 제도였던 만큼, 도입 초에는 상당한 성과를 거두며 보완을 거듭하며 수백년의 세월을 거쳐 명(明) 왕조에서도 적용되어 왔던 것인데, 고인 물은 썩듯이 오랜세월 동안 적용되어 왔던 양세법도 여러 부작용을 낳았다.
토지의 많고 적음에 따라 세금이 부과된다는 원칙의 허점은 아무래도 관청에 제대로 보고하지 않으면 부과되는 세금역시 그에 비례해 나오지 않는다는 점이라 하겠다.
바로 이 점을 이용하여 지방의 향신(鄕紳)층들은 탈세를 범하고 있던 것이다.
명(明)대의 신사(紳士)들과 소유한 토지를 그린 그림.
신사(紳士)란 명(明)대의 당시 지배층을 말한다.
과거시험에 응시하여 합격한 자들만을 지칭했는데, 소유한 지식과 가진 명망을 통해 지방사회에서는 지방관을 보좌해 지방을 다스리는 역할을 담당하는 준관료적인 성격이 강했다. 이들 신사(紳士)들은 다른 말로는 향신(鄕紳)세력이라고도 하는데 명(明) 말기에 이르러서는 지방에서의 권한이 강해져 권력을 휘두르며 각종 비리를 저지르곤 했다.
장거정은 이 문제에 주목하여 전국적으로 토지측정을 명했다. 보고되지 않은 토지들을 조사하기 위함이었다. 이 과정에서 탈세의 수단이 되었던 수많은 토지들이 적발되었고 장거정은 토지를 상대로 과세하되, 잡다한 납세수단들을 모두 없애고 당시 명(明)에 보급되던 은(銀)을 납세수단으로 통일하게 하는 새로운 세법인 일조편법을 시행한 것이다.
이 개혁을 통해 막대한 수입금을 거두어 들여 명(明)의 재정은 크게 호전되었고 그와 동시에 부정부패를 저지르던 지주층들도 적발하는 일석이조의 효과를 거두게 된다.
(3) 변방을 지키다
앞서 '북로남왜(北虜南倭)의 화(禍)' 라 하여 북로(北虜)의 몽골이나 여진족이 발흥하고 남왜(南倭)의 일본왜구가 기승을 부리며 15세기~16세기 무렵의 명(明)을 연신 유린하며 눈엣가시 같은 존재에서 어느덧 안보를 위협하는 세력으로 성장했었다는 것은 서술한 바 있다.
역대 명(明)의 황제들은 강경책과 유화책을 번갈아 쓰며 대응했지만 이 '북로남왜' 의 기세는 여전해 제국의 북쪽변방과 동남쪽의 해안가에서는 싸움이 끊이지 않고 있었다.
명(明)대의 왜구 침입로.
왜구는 비단 당시 우리나라 조선 뿐만 아니라 명(明)에서도 골치아픈 존재였다.
각설이마냥 잊을만하면 오고 또 오는 그런 존재..
여기서 장거정은 유능한 장군
척계광(戚繼光)과 이성량(李成梁)을 기용해 말썽이던 몽골과 왜구를 토벌할 것을 지시한다.
명(明)의 명장(名將), 척계광(戚繼光).
이성량과 더불어 몽골과 왜구의 침입을 격퇴하는데에 지대한 공을 세웠다.
이성량(李成梁).
임진왜란에 조선으로 출병한 명(明)의 장수 이여송(李如松)의 아버지이기도 하다.
척계광과 이성량은 충실하게 각자 몽골과 여진, 왜구를 격퇴하며 제국을 외침으로부터 굳건하게 지켜냈다.
왜구와 접전을 벌이는 명(明)의 수군.
그리고 왜구의 처참한 말로.
특히 척계광의 왜구토벌은 수년간 이어져 왜구의 주력군은 완전히 격파당해 1564년, 광동성(廣東省)에서의 토벌을 마지막으로 왜구는 그 이후로는 별다른 침입없이 자취를 감추게 되었고 만주 및 요동반도에서의 여진족 토벌에 임한 이성량 수십년간 요동사령관으로 부임하면서 당시 분열되어 있던 여진족들을 교묘하게 이용하여 변방을 지켜내는 전공을 세운다.
다만, 여기서 이성량은 여진족을 진압하는 방법으로 여러 여진족들 중 한 부족인 건주여진(建州女眞)족을 후원함으로서 다른 여진부족들을 억누르게 하는 이이제이(以夷制夷)를 택했는데, 이는 여러 여진부족을 동시에 상대하는 것보다 상대적으로 효율적인 전략이었다. 물론 이용된 건주 여진의 명(明)에 대한 복속 전제하에.
문제는 그때 건주 여진족의 지도자는 그 유명한 청(淸) 태조(太祖) 누르하치(努爾哈赤)였다는 점이다.
청(淸) 태조(太祖) 천명제(天命帝) 누르하치(努爾哈赤).
더이상의 자세한 설명은 생략한다.
여기서 오해말아야 할 것이 지금 이 글의 배경시기가 되는 명(明) 만력제(萬曆帝) 치세 초기 당시의 건주 여진족의 지도자가 누르하치는 아니라는 것이다.
위에서 서술했듯 이성량은 수십년간, 정확히는 22년간 요동사령관으로서 만주와 요동에서의 여진족 방비를 맡으며 이이제이의 목적으로 건주 여진족을 지원해왔다고 했다. 세월이 수십년에 이르다보니 꼭 누르하치에만 국한되는 것이 아니라 여기서는 그 윗대인 누르하치의 아버지, 할아버지가 건주 여진의 부족장이던 시절도 포함된다.
이성량의 지원도 지원이지만 나중에 가면 이성량은 그동안 세워온 수많은 공로로 자만해진 나머지 여진에 대한 감시를 소홀히 했고 훗날에는 누르하치의 여진통일을 허용하게 되는 사태를 낳게 된다. 사실 이건 이성량의 개인 실책이라기 보다는 명(明) 왕조 자체가 방관한 탓이 크다.
이건 나중에 다룰 내용이니 굳이 여기서 길게 언급하지는 않겠다.
아무튼 위에서 쭉 살펴보았듯이 만력제(萬曆帝) 치세 초반에는 훗날 명재상이라는 타이틀을 달게 되는 장거정의 여러 내정 개혁책과 외침으로부터의 방비성공으로 명(明)은 중흥(中興)을 이룩하는데, 이를 만력중흥(萬曆中興)이라고도 한다. 물론 어디까지나 일시적으로다.
그러던 중 만력제(萬曆帝)의 치세도 어언 10년째에 접어들 무렵인 서기 1582년, 재상 장거정이 사망한다.
사인은 과한 업무로 인한 과로사였다고도 하고 약을 잘못먹었은 탓에 급사라고도 했다.
장거정의 사망이 갖는 의미는 그동안 황제를 보좌해오던 장거정이라는 조력자가 사라지고 이제는 어엿한 성인이 된 만력제(萬曆帝)가 자신의 뜻과 포부를 비로소 펼칠 친정이 시작되었다는 뜻이기도 했다.
과연 만력중흥(萬曆中興)이라는 거창한 타이틀이 재상 장거정의 사후로도 만력제에 의해 중흥기로 이어질 것인지 아닌지는 이제 순전히 만력제의 친정에 달린 문제였다.
황제와 신하의 관계이기도 했으나 사적으로는 제자와 스승의 사이이기도 했다. 10여년간 장거정을 스승으로 모시며 개혁자였던 그에게서 사상적으로 여러가지를 주입받고 배웠을 만력제의 치세는 순조로워 보였지만 실상은 그게 아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