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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明) 왕조 멸망사 : 몰락의 전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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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 Belisarius
추천 : 27
조회수 : 3214회
댓글수 : 12개
등록시간 : 2013/12/29 13:22:49
 
Ming_Dynasty_1415.png
 
서기 1415년 경의 명(明) 제국.
 
영락제(永樂帝) 치세의 강역으로, 최대의 전성기를 맞이한 때이기도 했다.
 
 
 
1368년, 태조(太祖) 홍무제(洪武帝) 주원장(朱元璋)에 의해 건국된 이래로 15세기 무렵까지 동아시아 세계의의 최강자로 군림해왔던 명(明) 왕조도 제9대 황제, 효종(孝宗) 홍치제(弘治帝) 주우당(朱祐樘)의 죽음을 기점으로 몰락의 길을 걷기 시작한다. 급격한 쇠락이라기보다는 마치 천천히 가라앉는 난파선 같은 느낌이랄까.
 
홍치제(弘治帝) 이후로 연달아 즉위하는 황제들이 정치에는 무능한 모습을 보이고 여기서 기인한 부정부패가 판을 치며 여러 악재들을 불러왔기 때문이다. 그리고 홍치제 이후로 즉위한 네명의 황제들을 통틀어 흔히 명의 F4라고도 부르기도 한다.
 
 
홍치제.jpg
 
명(明) 효종(孝宗) 홍치제(弘治帝) 주우당(朱祐樘).
 
혼란에 빠져있던 전대의 정국을 수습하고 변방의 여진족과 타타르족(몽골)과의 관계도 개선시켜 
국내외로 나라를 안정적으로 이끌어 나가 중흥을 이룩한 군주로 평가받는다.
 
 
 
 
홍치제(弘治帝)의 뒤를 이어 즉위한 이는 홍치제의 장남, 무종(武宗) 정덕제(正德帝) 주후조(朱厚照). 문제는 이 정덕제(正德帝)가 정치에는 그다지 관심이 없고 그저 놀기만 좋아한다는 것이었다. 뭐 그렇다고 해서 성격이 난폭해서 신하들을 숙청한다던가 주색잡기로 국고를 탕진한다든지와 같은 폭정을 일삼는 폭군은 아니었고 그냥 저 혼자 놀다가 볼일 다 본 사람이었다.
 
 
Zhengde.jpg
 
명(明) 무종(武宗) 정덕제(正德帝) 주후조(朱厚照).
 
엄밀히 말해 폭군이나 암군은 아니었지만 기행을 일삼으며 놀기를 좋아했던 황제.

 
 
과하게 놀다가 몸에 무리라도 왔는지 정덕제(正德帝)는 불과 서른살의 나이로 요절해버리고 그 뒤를 이어 홍치제(弘治帝)의 이복동생인 흥헌왕(興憲王) 주우원(朱祐杬)의 아들인 주후총(厚熜)이 즉위하니 이가 곧 세종(世宗) 가정제(嘉靖帝)다.
 
 
가정제.jpg
 
명(明) 세종(世宗) 가정제(嘉靖帝) 주후총(厚熜).
 
본격적으로 제국의 혼란을 불러온 황제.
근데 뭘했다고 묘호를 무려 세종(世宗)으로 받아먹었단 말인가?
 
 
 
가정제(嘉靖帝)가 즉위했을 무렵에는 왜구와 몽골의 잦은 침입, 소위 말하는 '북로남왜(北虜南倭)의 화(禍)' 에다 선황제 정덕제(正德帝)의 측근들이 벌였던 부정부패로 나라 안팎이 여러모로 시끄러운 때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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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세기~16세기 무렵의 몽골과 왜구의 침입로 및 강역.
 
북로(北虜)는 북에 침입해온 몽골족을 의미하고 남왜(南倭)는 일본해적인 왜구를 말한다.
몽골이나 왜구의 침입 모두 명(明)의 변방과 해안에 접한 성(省)들을 유린하며 큰 타격을 입혔다.
특히 몽골의 침입 같은 경우, 오죽했으면 몽골말을 대거 수입해와 기마병이 주력인 몽골군의 힘 약화를 꾀했는데
여기서 수입으로 인하여 발생한 경제적 피해도 막심했다.
 
 
 
 
 
여기서 가정제(嘉靖帝)는 전대의 폐단을 타파하여 당시 어수선한 민심을 휘어잡고 나라의 기틀을 바로잡고자 하는 노력 보여 치세 초반에는 뭇 사람들로부터 많은 기대를 받고 있었다.
 
 
하지만 이것도 잠시, 가정제(嘉靖帝)는 물론이고 당시 명(明) 조정까지도 뒤흔들어 놓는 대례(大禮) 문제에 부딪히게 된다.
 
 
이 대례(大禮)문제란 가정제(嘉靖帝)의 아버지인 흥헌왕(興憲王) 주우원(朱祐杬)을 황제로 추존하느냐 마느냐를 두고 황제 가정제(嘉靖帝)와 원칙을 중시하는 뭇 신하들간에 벌인 논쟁을 말한다.
 
 
위에서도 밝혔듯 가정제(嘉靖帝)는 선황제 홍치제의 이복동생인 흥헌왕(興憲王) 주우원(朱祐杬)의 아들로서, 직계 후계자가 아니라 방계 후계자로서 정덕제(正德帝)를 이었던 탓에 그 정통성에 있어서는 직계 후계자들 보다는 위축될 수밖에 없는 실정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가정제(嘉靖帝)는 자신의 생부인 흥헌왕(興憲王) 주우원(朱祐杬)을 황제로 추존하고자 했는데, 이는 방계혈통 출신인 가정제에게는 불허되는 일이었고 당시 유교와 직결되는 국가이념에도 부적합한 사안이었기에 가정제와 원칙을 중요시하던 신하들간의 논쟁은 치열했다.
 
 
논쟁은 무려 4년간 지속되었다. 결국 참다못한 가정제는 최후의 수단인 황제의 대권을 이용하여 반대하는 대신들을 모조리 숙청하기에 이른다.
 
 
이 숙청으로 중신 190여명이 하옥되거나 쫓겨났으며 주동자 16명은 아예 처형당했다.
 
 
이 대례(大禮) 논쟁이 갖는 의미는 논쟁 이후로 제 뜻에 거역하는 신하들에 대해 신물이라도 났는지 가정제가 관리 인선에 있어서 제 입맛에 맞는 이들을 등용했고, 이와 더불어 황제의 측근인 환관세력이 성장하는 계기가 되었는데다 황제에 의해 발탁된 관리들의 부정부패가 시작되었다는 점이다.
 
 
가정제의 치세부터를 명(明)의 몰락기로 보는 것도 바로 이러한 현상들 때문이다.

 
특히 환관세력으로 대표짓는 이가 엄숭(嚴崇)이란 환관이다. 가정제는 평소 도교에 심취하여 정치따위는 나몰라라 조정대신들에게 넘겨버린지 오래였는데, 그 틈을 타 엄숭이 등장하여 황제를 대신하여 전횡을 일삼았던 것이다.
 
 
가정제는 무려 45년간 재위에 있었고 서기 1567년에 사망한다.
 
 
가정제의 후계자는 세번째 아들인 주재후(朱載垕)였다.
 
 
Longqing.jpg
 
명(明) 목종(穆宗) 융경제(隆慶帝) 주재후(朱載垕).
 
앞에서 본 연달아 즉위한 무능한 군주 두명에 비해 융경제(隆慶帝)는 그나마 평범했다.
그리고 오해하지 말자. 융경제는 F4가 아니다.
 
 
 
 
융경제(隆慶帝)는 즉위 초기에 선대에 파면된 중신들을 복직시키는 한편, 훗날 명(明)의 명재상이라 불리우는 장거정(張居正)을 등용하고 골머리를 썩히던 '북로남왜의 화' 문제도 외교로 해결하는 등, 나름의 선전을 보여준다.
 
 
250px-Zhangjuzheng.jpg
 
장거정(張居正).
 
융경제(隆慶帝)의 대에 등용되어 그 다음 대인 만력제(萬曆帝)의 치세에는 재상이 되어 무너져가는 제국을
바로잡을 노력의 일환으로 각종 제도와 개혁을 실시하는 한편, 대외로는 당시 골머리를 썩히던 몽골과 왜구도 토벌하는 등,
혼군 만력제(萬曆帝)를 보좌했지만 당시 상황이 상황이었던지라..
 
 
 
거기까지는 좋았지만 융경제(隆慶帝)는 이후 모든 업무를 조정에 위임한채 주색에 전념하더니 5년만에 요절해버리고 만다. 그리고 그 뒤를 이은 이는 주익균(朱翊鈞), 신종(神宗) 만력제(萬曆帝)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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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明) 신종(神宗) 만력제(萬曆帝) 주익균(朱翊鈞).
 
명의 암군 F4의 리더로도 손색이 없을 혼군.
전대의 황제들 치세에는 조금씩 그 기미가 보였다라면 이 만력제(萬曆帝)의 대부터는 본격적으로 몰락이 가속화되는 시점이면서도 더 나아가서는 멸망의 근본적 원인을 제공한 때이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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