질문글:
http://www.todayhumor.co.kr/board/view.php?table=phil&no=15169&s_no=15169&page=1질문글 올라온게 있는데, 댓글로 대답하기엔 너무 길어서 여기에 제가 아는 선에서 정리하겠습니다. 가톨릭 신학으로 기준 잡고 대답하는 이유는.... 그야 뭐 제가 가톨릭 신자니까요.
일단 세가지 면에서 정리를 해야 합니다.
Q1. 악이란 무엇이냐?
Q2. 하느님은 악을 만드셨는가?
Q3. 왜 세상에는 악한 일들이 벌어지는가?
Q1에 대해 대답을 하자면, 가톨릭 신학(뿐만 아니라 그리스도교 신학 전체)에서 악은 '유(有, ens)'의 결핍으로 봅니다.(ens는 흔히 철학에서 '존재자'로 번역되는데, 스콜라학에서는 유로 번역하는게 적절하다는 정의채 몬시뇰의 의견에 따라, '유'로 적겠습니다)
즉 사람이 사람으로서 갖추어야 할 것을 갖추지 못할 때, 생존하기 위한 최소한의 식량이 결핍될 때.... 이런 것들이 악입니다. 다만 악이라는게 단순히 '없음'을 뜻하는 것은 아닙니다. 사람에게 조류의 날개가 없다고 해서 그게 악은 아닙니다. 다만 사람이 사람으로서 뭔가 부족하다면 그게 악입니다. 이를테면 사람에게 팔 하나가 없다면 그게 악이죠.(주의할 점은, 장애인이 악한 사람이라는게 아닙니다. 인간이 장애라는 현상으로 고통 받는 상황 자체가 '악'이라는 것입니다) 그렇기에 '악'은 '악'이라는 그 자체로 존재하는 무언가가 아닙니다. 신학적으로 보자면 궁국의 '선'은 있지만 궁극의 '악'은 없습니다. 심지어 사탄이라고 할 지라도, 궁극의 악은 아니며, 단지 매우 많이 결핍된 '유'일 뿐입니다. 이를테면 (비록 교리적으로 정해진 바는 없지만) 많은 민담에서 악마들은 아름다운 미남 미녀의 모습으로 등장합니다. 그런 의미에서는 민담 속 악마들은 '아름다움'이라는 '선'(스콜라에서 말하는 '선'은 good... 그러니까 '좋음'으로 보는게 더 적절합니다)이 있다고 할 수 있겠죠.
하느님은 악의 존재에 있어 원인도 아니며, 악이 고유한 실체를 갖고 있다고 생각해서도 안 된다. 타락은 마치 살아 있는 그 어떤 것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며, 마치 참으로 존재하는 것처럼 그렇게 눈앞에 그 실체가 제시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왜냐하면 악은 선의 결핍이기 때문이다.
- 성 바실리오-그리고 이제 Q2에 대해서 간단히 대답을 할 수 있게 됩니다. 당연히 그리스도교의 관점에서 보자면, 하느님은 악을 만들지 않았습니다. 만든 것은 온갖 유들, 즉 만유입니다. 제가 예술품을 만들었다고 해서, '예술품이 파손된 상태'를 만들었다고는 할 수 없는 것과 같습니다.
하지만 이렇게 한다면 우리는 자연스럽게 Q3에 도달합니다. 하느님이 악을 만들지는 않았다는건 이해할 수 있다고 쳐도, 이 세상에는 분명 굶주린 사람, 장애로 고통 받는 사람.... 등등이 있습니다. 하느님은 마치 악을 허용하는 것처럼 보인다는 것이죠. 그리고 Q3에 대한 대답은 어찌보자면 충격저일 수 있습니다. 네 그렇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악을 허용합니다. 만들진 않으셨지만 허용한다는게 가톨릭의 대답입니다. 하지만 여기서 끊어놓으면 다들 ??????로 끝날 것입니다. 그렇기에 스콜라학의 거장인 토마스 아퀴나스가 <신학대전> 제1부 제19문제 제9절에서 한 설명을 덧붙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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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러두기
1. 각주 1, 2, 3....은 번역 대본(S. Thomae Aquinatis, Summa Theologiae, cum textu et recensione Leonina, Marietti, 1952)의 각주입니다.
2. ㄱ, ㄴ, ㄷ, 등 한글 각주는 역자인 정의채 신부님께서 달으신 주석입니다.
3. a, b, c 등 로마자는 레오니나판과 피아나판의 서로 다른 곳을 표시하는 주석입니다.
4. () 안의 것은 라틴 원문에 없으나 문장 중 앞에 있었거나 아니면 문장에 흐르는 내용입니다.
5. []의 것은 라틴 원문에는 없으나 번역시 문맥상 필요하여 정의채 신부님께서 넣은 것입니다.
6. 성경은 우리말 번역본을 참조하여 정의채 신부님께서 토마스의 라틴 원문에 맞게 번역한 것입니다.
제1부 제19문제 제9절: 하느님은 악을 원하는가병행문헌: 아래의 제48문제 제6절. <명제론집> 제1권 제46구분 제4절. <이교도 논박대전> 제1권 제95장. <능력론> 제1문제 제6절. <악론> 제2문제 제1절 제16이론에 대한 해답. Denz 816.아홉째에 대해서는 다음과 같이 진행된다. 하느님은 악들을 원하는 것으로 생각된다. [그 이유는 다음과 같다.]
1. 사실 생성되는 모든 선을 하느님이 원한다. 그런데 악들이 생성되는 것도 선인 것이다. 사실 아우구스티누스는 <제요>(주1)에서 악인 것들은 그것들이 악인 한 선들은 아닐지라도 그러나 선들뿐만이 아니라 악들도 존재한다는 것은 선이다.'라고 한다. 그러므로 하느님은 악들을 원한다.
2. 그 밖에도 디오니시우스는 <신명론> 제4장(주2)에서 '악은 만유의(곧 우주의) 완성에 기여할 것이다.'라고 한다. 또 아우구스티누스는 <제요>(주3)에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우주의 경탄스러운 아름다움은 모든 것에서 이루어진다. 그 안에는 악이라고 불리는 것도 잘 정돈되어 있으며 자기 자리에 놓여 있어 선들을 더 탁월하게 돋보이게 한다.곧 선들은 악들과 대비될 때 더욱 즐겁고 찬탄스러운 것이 된다.' 그런데 하느님은 우주의 완전성과 장식에 속하는 모든 것을 원한다. 그 이유는 이런 것은 하느님의 피조물 안에서 최고로 원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하느님은 악을 원한다.
3. 그 밖에도 악들이 생성되는 것과 생성되지 않는 것은 모순적으로 대립한다. 그런데 하느님은 악들이 생성되지 않는 것을 원치 않는다. 그것은 어떤 악들이 생성될 때에 하느님의 의지가 항상 충족되는 것은 아닐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다음과 같은 반론이 있다.
아우구스티누스는 <83 문제집>(주4)에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어떤 지혜로운 사람도 그 작자(作者, 원인자)가 되어, 사람이 더 나쁘게 되지는 않는다. 그런데 하느님은 어떠한 지혜로운 사람보다도 더 출중하다. 그러므로 더더욱 하느님이 원인자가 되어 어떤 사람이 더 나쁘게 되지는 않는다. 그(하느님)가 원인자로서라고 하는 것은 그가 원함으로써라고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하느님이 원함으로써 사람이 더 나빠지는 것은 아니다. 그런데 어떤 악으로도 어떤 것이 더 나빠지는 것은 명백하다. 그러므로 하느님은 악들을 원치 않는다.
나는 이상의 것에 답하여 다음과 같이 말하여야 한다.
선의 근거는 위에서(주5) 말한 바와 같이 가욕구적(可欲求的) 이유이며 악은 선에 반대 대립되기 떄문에 어떤 악이 악인 한 자연적 욕구에 의해서도 동물적 욕구에 의해서도 의지인 지성적 욕구에 의해서도 욕구될 수 없다.(주6) 그러나 어떤 악은 우유적으로 욕구되는데 그것은 그런 악이 어떤 선을 수반하는 한에 그런 것이다. 그리고 이런 것은 어떤 욕구에서도 나타나는 것이다. 사실 자연적 능동자가 박탈(결여)이나 부패(파괴)를 지향하지 않고 형상(形相)을 지향한다. 이런 형상에는 다른 형상의 박탈이 결부된다. 그것은 또한 어떤 것의 출산을 지향하는데 이런 출산은 다른 것의 파멸인 것이다. 사자가 사슴을 죽이는 것도 음식을 지향하는 것인데 그 음식에 동물의 살해가 결부된다. 마찬가지로 간음자가 지향하는 것은 쾌락인데 그 쾌락에는 죄과(罪科)의 추악함이 결부된다.
어떤 선에 결부되는 악은 다른 선의 박탈이다. 그러므로 악이 그것에 결부된 좋음(선<善>)이 그 악에 의해 박탈되는 선 이상으로 욕구되는 것이 아니라면 악은 비록 우유적일지라도 요구될 수 없을 것이다. 그런데 하느님은 어떤 선도 자기 선성 이상으로 원하지 않는다. 그러나 [개별적 선들에 관해서는] 어떤 선을 다른 어떤 선 이상으로 원한다. 그러므로 하느님은 하느님의 선에 대한 질서를 박탈하는 죄과의 악(주7)을 결코 원하지 않는다.(주8) 그러나 하느님은 자연적 결함의 악 또는 벌의 악을, 이런 악에 결부되어 있는 어떤 선을 원함으로써 원한다. 예컨대 하느님은 정의를 원함으로써 벌을 원한다. 또한 자연의 질서가 보존되기를 원함으로써 어떤 것은 자연적으로 멸망되기를 원한다.
1. 그러므로 첫째에 대해서는 다음과 같이 말하여야 한다. 어떤 사람들(주9)은 다음과 같이 주장하였다. '하느님은 악들을 원하지 않을지라도 그러나 악들이 존재하거나 생성되는 것을 원한다. 그것은 악들이 선들은 아니지만 그러나 악들이 존재하거나 생성되는 것은 선이기 때문이다.' 그들은 이렇게 주장한 것은 그 자체에 있어서 악인 것들은 어떤 선에 질서지어져 있기 떄문이라는 것이다. 곧 그들은 '악들이 존재하거나 생성된다.'고 하는 데에 그런 질서가 포함된다고 믿었다. 그런데 이런 주장은 올바른 것이 아니다. 그 이유는 악이 그 자체로서 선에 질서지어지는 것이 아니고 우유적으로 선에 질서지어지는 것이기 때문이다. 사실 범죄자의 경우 그 범죄에서 어떤 선이 도출되는 것은 범죄자의 의도 밖인 것이다. 예컨대 폭군의 경우 그드들의 박해들로 말미암아 순교자들의 인내가 빛나게 되는 것은 폭군들의 의도 밖의 것이었다. 그러므로 악이 존재하거나 생성된다고 말함으로써 선에 대한 이런 질서가 포함된다고는 말할 수 없는 것이다. 곧 그것은 어떤 것도 우유적으로 그것에 적합하는 데 따라 판단되지 않고 그 자체로 그것에 적합하는 데 따라 판단되기 때문이다.
2. 둘째에 대해서도 다음과 같이 말하여야 한다. 악은 우유적으로가 아니면 우주의 완성과 장식을 위해 작용하지 않는다. 이것은 위에서 말한 바와 같다.(주10) 악은 우주의 완성에 기여한다고 함으로써 디오니시우스는 말하자면 부당한 것에로 논리를 전개하여 결론지었다. 곧 그는 말하자면 귀류법적(歸謬法的)인 귀결을 내린 것이다.
3. 셋째에 대해서는 다음과 같이 말하여야 한다. 악들이 생성되는 것과 생성되지 않는 것은 모순적으로 대립하맂라도 그러나 악들이 생성되는 것을 원하는 것과 악들이 생성되지 않는 것을 원하는 것은 모순적으로 대립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두 경우가 다 긍정적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하느님은 악들이 생성되는 것을 원하는 것도 아니고 악들이 생성되지 않는 것을 원하는 것이 아니다. 그러나 하느님은 악들이 생성되는 것을 허용하기를 원한다. 그리고 이것은 선이다.
주1: 제96장. <라틴교부전집> 제40권 276.
주2: <그리스교부전집> 제3권 717 B. 성 토마스의 주해 제15강.
주3: 제10장, 제11장. <라틴교부전집> 제40권 236.
주4: 제3문제. <라틴교부전집> 제40권 11.
주5: 제5문제 제1절.
주6: 제1부 제59문제 제1절 주문, 제80문제 제1절 주문 참조.
주7: 제1부 제48문제 제5절 참조.
주8. Cfr. a. sq. ad 2; 제2부의 1 제79문제 제1절.
주9: Cfr. Hugonem De S. Victore(✝ 1141), De sacramentis christianae fidei, 1. I, p.4, c. 13. <라틴교부전집> 제176권 239D
주10: 제1이론에 대한 해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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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마스 아퀴나스의 설명은 많은 부분에서 왜 악이 허용되는지를 깔끔하게 설명합니다. 하지만 우리는 여전히 의문을 가질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전지전능한 하느님이니까, 손가락 좀 까딱해서 최고의 상태를 만들어줄 순 없냐... 하는 의문이 생기니까요. 결국 이 문제는 철학적으로 보자면 끊임없는 물음의 연속일 수 밖에 없습니다.
다만 '신학'에서는 이야기가 다릅니다. 물론 신학은 철학을 상당히 받아들이고 수용합니다. 당장 위에 적은 토마스 아퀴나스만 하더라도 아리스토텔레스를 적극적으로 수용한 사람이며, '믿음에 대한 반역' 뿐만 아니라 '이성에 대한 반역' 역시도 신성모독이라고 봤던 사람입니다. 이성에 대한 반역은, 진리(로고스)이신 그리스도를 모독하는 것이라는게 토마스 아퀴나스의 사상입니다.
하지만 신학은 '이성'이라는 육신을 가진 학문이면서도, 특정한 세대가 겪었다고 전해지는 어떤 강렬한 경험에 대하여 신뢰를 보내고 시작하는 학문입니다. 서기 1세기의 로마 제국 동부에 살았던 사람들은 다음과 같은 경험을 했습니다.
1. 나자렛 마을 출신으로, 자신을 하느님(의 아들)이라고 주장하는 예수라는 사람을 만나고 이야기해봤다.
2. 그 예수라는 사람은 십자가형을 받아서 죽었는데, 그것을 목격했다.
그리고 예수와 직접 만나보고 대화했던 1세대, 2세대의 증언들이 모여서 신약성경의 많은 부분을 형성했습니다. 예수의 부활이라는 초자연적 현상을 긍정하든 부정하든, 예수와 이야기해보고 죽는걸 목격했던 목격자들이 뭔가 엄청난 강렬한 인상을 받았다는건 부정할 수 없겠죠. 그리고 이들의 증언에 신뢰를 보내고 시작하는게 신학이라 할 수 있습니다. 성시비평학적으로는 성경의 텍스트에 대해서 아직까지도 여러 이설들이 많지만, '예수라는 사람은 하느님(의 아들)이다', '예수는 부활했다'라는 증언들만큼은 '믿는 것'이 신학입니다. 그렇기에 신학은 철학과는 구분되는 것이죠. 순수하게 이성으로 시작하여 진리에 접근하고 싶다면 철학과에 가야합니다. 그 '강렬한 경험'을 신뢰하는게 옳은지 옳지 않은지는 여기서 논하기가 어려울 것입니다. 그러나 신학은 서기 1세기의 특정한 세대가 겪은 '강렬한 경험'에 대한 신뢰에서 시작한다는 '사실'을 인정해야, 왜 그리스도교라는 거대 종교가 21세기에도 살아남았는지를 이해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제 다시 돌아와서, 왜 악이 허용되고 있는지를 검토해봅시다. 전지전능한 하느님이 왜 손가락을 까딱하여 세상의 악함을 쓸어버리지 않는지는, 여전히 가톨릭 내부에서도 미해결 떡밥입니다. 그러나 여기에 대한 단서 몇몇은 추적할 수 있을 것입니다.
가톨릭 교리서 309항 ~ 312항을 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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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9 만일 질서 있고 선한 세계의 창조주이신 전능하신 하느님 아버지께서 당신의 모든 피조물을 돌보고 계시다면 어째서 악이 존재하는가- 절박하고도 피할 수 없으며, 고통스럽고도 신비한 이 질문에 그 어떤 성급한 대답도 충분하지는 못할 것이다. 그리스도교 신앙 전체가 이 질문에 대한 답이다. 창조의 선성(善性), 죄의 비극, 그리고 무엇보다도 당신의 계약, 구원을 위한 당신 아드님의 강생, 성령의 파견, 교회의 형성, 성사의 효력으로써, 그리고 자유로이 응할 수 있는 인간을 행복한 삶에 초대함으로써 인간에게 다가오시는 하느님의 고통스러운 사랑이 그 답이다. 그러나 사람들은 어떤 두려운 신비 때문에 이 초대를 회피할 수도 있다. 그리스도교 메시지 가운데 그 어느 것도 어느 모로든 악에 대한 대답 아닌 것이 없다.
310 하느님께서는 왜 악이 존재할 수 없는 완전한 세상을 창조하시지 않으셨을까- 하느님께서는 당신의 무한한 능력으로 항상 더 나은 무엇인가를 창조하실 수 있다.149) 그러나 무한히 지혜롭고 선하신 하느님께서는 궁극적 완성을 향해 가는 ‘진행의 상태’로서 자유로이 세상을 창조하기로 하셨다. 하느님의 계획에 따른 이러한 변화는 어떤 존재들의 출현과 더불어 다른 존재들의 소멸을, 더 완전한 것과 더불어 덜 완전한 것을, 자연의 건설과 더불어 파괴를 포함하고 있다. 그러므로 피조물이 그 완성에 도달할 때까지는, 물리적 선은 물리적 악과 공존한다.
311 지성과 자유를 지닌 피조물인 천사와 인간은 자유로운 선택과, 더 나은 것에 대한 사랑으로 자신들의 궁극적 목적을 향해 나아가야 한다. 그들은 그릇된 길을 갈 수도 있다. 실제로 그들은 죄를 지었다. 그리하여 물리적 악과는 비교할 수도 없이 중대한 윤리적 악이 세상에 들어오게 되었다. 하느님께서는 결코 직접적으로든 간접적으로든, 윤리적 악의 원인일 수 없다. 그러나 하느님께서는 당신 피조물의 자유를 존중하여 악을 허락하시는 것이며, 신비로운 방식으로 악에서 선을 끌어내신다.
전능하신 하느님께서는……최상의 선이시므로, 만일 악에서 선을 이끌어 내실 충분한 능력과 선을 가지고 계시지 않다면, 당신의 피조물들 안에 어떠한 악도 존재하도록 방치하지 않으실 것이다.
312 이리하여 시간이 흐름에 따라, 전능하신 섭리로 하느님께서 당신의 피조물에서 야기된 악의 결과에서, 물론 윤리적 악의 결과에서도, 선을 이끌어 내실 수 있다는 것이 드러나게 되었다. 요셉은 형제들에게 이렇게 말하였다. “나를 이곳으로 보낸 것은 여러분이 아니라 하느님이십니다.……형님들은 나에게 악을 꾸몄지만, 하느님께서는 그것을 선으로 바꾸셨습니다. 그것은 오늘 그분께서 이루신 것처럼, 큰 백성을 살리시려는 것이었습니다”(창세 45,8; 50,20).
이제까지 저지른 가장 큰 윤리 악은 모든 인간의 죄로 일어난 하느님 아들의 배척과 살해였다. 이 악에서 하느님께서는 당신의 충만한 은총으로 그리스도의 영광과 우리의 구원이라는 가장 큰 선을 끌어내셨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악이 선이 되는 것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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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 그리스도의 생애에 대한 신비들은 고통이란 주제를 살펴보고 그 의미를 발견할 수 있게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태도와 행동은 가톨릭 신학에서, 사랑과 고통이 인간의 삶에 있어 함께 가도록 불림 받았다는 점을 신자에게 보여줍니다. 만일 그렇지 않다면, 사랑은 이기적으로 변할 것이고 고통은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것이 되고 말 것입니다. 그리고 또한 '고통'이라는 것은 구원의 관점에서 결코 무가치하고 무의미한 무언가는 아니라고, 그리스도의 죽음은 증언합니다. 도대체 왜 악을 허용한진 알 수 없지만, 그리스도는 '창조주 살해'라는 가장 큰 악에서 '인류의 구원'이라는 최고의 선을 도출했습니다. 악에 대한 이해는 여전히 미스테리로 둘러쌓여 있지만, 신학적 관점에서 보자면 '창조주 살해'에 의한 '인류 구원'은 분명하게 이 세상에 일어난 역사적 경험입니다. 부정할수가 없죠.
신앙의 밖에서 보자면, '악에 대한 물음'은 전지전능하고 선한 초월자가 존재할 수 있는지에 대한 논증입니다. 대답에 실패한다면 '그런 초월자는 존재하지 않는 것 같다'라는 잠정적 결론이 도출될 수 있겠죠. 하지만 신앙인의 입장에서 보자면, '그리스도의 죽음'과 '인류 구원'은 이미 일어난 역사적인 경험입니다. 악에 대한 물음은, 이 경험을 어떻게 설명하느냐....에 대한 물음이지, 초월자의 존재 여부에 대한 논증이 아닙니다. 어차피 '전지전능'이라는 속성을 고백한 이상, '인간이 이해할 수 있는 무언가를 넘어선 어떤 이유가 있다'고 말해도 그건 모순이 없습니다. '그렇게 복잡하게 생각할바에 안 믿고 말지'라는 결론을 내릴 수도 있지만, 앞서 말한 것이 그 자체로는 모순이 없는 것이죠.
상당히 내용이 길어졌는데, 결국 요약하자면 이렇게 됩니다.
1. (신학적 관점) 악은 유의 결핍
2. (신학적 관점) 하느님은 악을 만들지 않았음.
3. (신학적 관점) 하느님은 악을 허용하고 계심
4. (신학적 관점) 왜 그런지는 모르겠는데, '하느님 살해'라는 가장 큰 악에서 '인류 구원'이라는 가장 큰 선이 도출되었는 것은 확실하니, 뭔가 구원사적으로 이유가 있는건 분명함.
5. (신학적 관점) 전지전능한 분이시니 뭔가 우리의 이해를 넘어선 관점이 있겠지
6. (철학적 관점) 1번~5번은 그 자체로는 모순이 없지만, '전지전능하고 선한 초월자'가 없다고 결론내리는게 더 간결함. 다만 '간결함'은 답안에 대한 매력을 말할 순 있지만, 간결함 그 자체가 답안이 맞다고 확정하는 무언가는 아님.
7. '옳냐 그러냐'라는 논쟁과는 별개로, 신학은 특정한 세대가 겪은 강렬한 경험에 대한 신뢰에서 시작했다는 점을 인정 할 때, 그리스도교라는 종교를 이해할 수 있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