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대 망국의 군주들이 나라를 말아먹은 시나리오들을 보노라면, 흔히 말하는 주색(酒色)잡기로 대표되는 혼정을 일삼다가 외침이나 내부의 반란으로 나라를 내어주는 경우가 대다수다.
과거에도 주지육림으로도 대표되는 은(殷)의 주왕(紂王)이 그랬고 주(周)의 유왕(幽王) 역시 포사(褒姒,라는 미녀에 빠져 망국지군이 되었다. 그 외에도 수많은 군주들이 이 주색(酒色)에 빠져 나라를 시원하게 말아잡수셨으니, 예나 지금이나 술, 도박, 색(色)은 패가망신의 지름길임은 불변의 진리인 듯하다.
이 글에서도 다룰 진숙보(陳叔寶)라는 황제도 위의 절차를 그대로 밟은 전형적인 암군(暗君)이다.
들어가기에 앞서 당시 배경을 설명해보자면..
위의 연표에서도 확인할 수있듯이 서기 5C 무렵의 중국은 화북(華北)과 화남(華南)에 각각 북조(北朝)와 남조(南朝)가 들어서서 양립하는 구도였다.
남조(南朝)는 동진(東晉) - 제(齊) - 양(梁) - 진(陳)의 순서로 왕조가 들어섰고 진숙보(陳叔寶)는 남조(南朝)의 마지막 왕조, 진(陳)의 마지막 황제였다.
진(陳) 후주(後主) 진숙보(陳叔寶).
시호나 묘호가 없고 그냥 후주(後主)로 불리운다.
촉(蜀)의 후주(後主)로 칭해지는 유선(劉禪)과 같은 경우.
유선도 나라 망하게 한 군주인지라 동격취급하는 것이다.
진숙보(陳叔寶)는 서기 582년, 아버지 고종(高宗) 선제(宣帝) 진욱(陳頊)의 뒤를 이어 제위에 올랐다.
당시 물려받은 나라는 북조(北朝)와의 전쟁과 오랜세월 동안 이어진 남조(南朝) 특유의 황족내란으로 인하여 발생한 자체적 소모로 인하여 국력은 감소해 있었지만 이를 회복하는 것은 재량껏 노력 하기나름에 달린 문제였을 뿐, 돌이킬 수없는 수준에 이르렀다거나 재생불가의 수준은 아니었다.
진(陳)의 제4대 황제, 고종(高宗) 선제(宣帝) 진욱(陳頊).
북조(北朝)의 북제(北齊), 북주(北周)로부터의 맹공에 선방하며 오히려 반격으로 영토를 넓히는 치적을 거두었다.
즉, 군주 진숙보(陳叔寶)만 정신차리고 내치에 힘썼더라면 해결되는 문제였던 것이었는데, 안 그랬으니까 암군이라는 욕을 먹어가며 후대의 왕조는 물론이고 오늘날 우리에게도 몸소 겪은 망국의 지름길이 무엇인지를 알려주어 교훈을 주고 있는 것이다.
사실 진숙보(陳叔寶)는 황제의 재목이라기 보단 차라리 감성 풍부한 예술가에 가까운 인물이었다. 태자시절부터 문장에 능했고 그가 창작한 시 또한 많은 이들의 심금을 울리곤 하여 주로 문학 쪽으로 이름이 높던 사람을 갖다가 황제자리에 앉혀두니 애시당초 지도자의 자리가 요구하는 덕목과 능력에는 별로 관심도 없었을 뿐더러 해당되는 사항도 거의 없던 진숙보는 자연스레 정사를 멀리하게 된다.
더구나 온실 속 화초처럼 곱게 자랐기에 오랜 전란과 황족간의 내란으로 어려워진 민생의 실태나 세상살이의 괴로움에 대해서는 아예 무지했다. 황족이니까 그럴 수도 있지 않겠냐고 반문할 수도 있겠는데, 그에 비해 다른 황족들은 일찍이 제국 각지의 임지로 나가 변경을 지키며 북조(北朝)와의 전쟁에서 참전하여 장수가 되거나 일찍부터 정계로 나아가 고위관료로 있는 경우가 허다했다. 유독 진숙보만이 세상 때를 거의 타지 않은 황족이었다.
이렇듯 아무것도 모르는 상태로 조정에서 업무를 보니 정치에 있어서는 무능하기 짝이 없을 수밖에. 그래서 아예 정사를 신하들에게 위임해버렸는데, 결국 암군 곁에 꼬여든 간신들의 손에 조정의 일이 넘어가버리니 이들이 선정(善政)이란 걸 베풀리가 만무했다.
종친, 조정대신, 환관을 가리지 않고 매관매직이 성행하고 이 바람에 뜻있는 선비들은 관직에 등용되지를 못할 뿐더러 간신들과 뜻을 함께하는 자들만 조정에 입조했으니 이들이 백성들을 착취하는 것은 이미 예정된 수순이었다.
나라 꼴을 아는지 모르는지, 진숙보가 노상 즐기고 하는 것이라고는 연회와 문인들과 술마시며 시 짓기, 화원에 나가서 수목이나 꽃 감상하기와 같은 것들이었다.
특히 유독 밝히는 것은 색(色). 아름다운 궁녀들이나 후궁들에 둘러싸여 즐기는 것이 그의 낙이었다.
중국 드라마 <수당연의>에서의 한 장면.
자막에도 나와있듯이 미녀궁녀들에게 둘러싸인 중앙의 후덕한 남자는 진숙보(陳叔寶)다.
수많은 후궁들 가운데서도 유독 진숙보의 총애를 받는 후궁이 있었는데 장려화(張麗華)라는 귀비(貴妃)였다.
진숙보는 장려화(張麗華)를 본 순간 첫눈에 반해 매일같이 장려화의 처소를 드나드며 놀았다. 그리고 그 아름다움을 기려 평소 자랑하는 시작 실력을 뽐내어 <옥수후정화(玉樹後庭花)> 라는 시까지 지어주었다고 한다.
중국 드라마 <수당연의>에서의 장려화(張麗華). 반할만 하다
어찌나 총애했는지 조정에서 대소신료들과 회의를 할때도 장려화를 용상에 함께 앉혀 무릎에 앉히고 했다고.
황제의 총애를 등에 업은 장려화는 그 위세로 나중에는 조정의 일에도 간섭하여 진숙보를 졸라 기존의 태자를 폐위시키고
자신의 소생을 황태자로 책봉시키는 전횡을 보여준다.
진숙보는 토목공사에도 관심을 가졌는데, 이는 무능한 군주들이 벌이는 전형적인 행사로 여겨지는 일이기도 했다. 우선 세개의 누각을 세우게 했는데 각 탑의 규모는 높이 수십 장(丈), 너비는 수십 칸에 이르렀는데 그 이름은 임춘각, 결기각, 망선각이라 했다.
워낙 예술미를 중요시 하는 진숙보였기에 그 거대한 누각들을 치장하는데도 돈지랄을 했다. 세 누각을 모두 다리로 연결했을 뿐더러, 기록에 따르면 문과 창문, 난간들은 금, 은, 옥, 비취 등으로 장식되어 있었고 거기다 누각 아래에는 흡사 신선이 노닐만한 풍경을 조성하고자 연못과 향나무숲도 만들어 그 향이 2~3리 밖에서도 맡을 수 있게 했다하니.. 국고를 탕진하다시피 돈을 쏟아 부은 것이다.
황제가 갈수록 맛간 행동만 일삼자 이를 우려하여 충언을 올리는 신하도 있었다.
"군주란 모름지기 하늘을 섬기고 백성들을 자식처럼 사랑하며, 아첨들을 멀리하고..(중략)..이것이 은혜를 입고 거처를 보호하며 자손에게 흐르는 복입니다. 후궁들은 호화로운 비단 옷을 끌고 창고에는 곡식이 넘치는데, 백성들은 궁핍하여 죽은 자가 들을 덮었고 뇌물들이 오가며 국고에 보관된 재산들이 바닥이 났으니 이에 신령들이 노하시고 백성들은 모두가 조정을 원망하니, 무리들이 배반하고 친척들이 흩어집니다...(중략)...다만 신이 두려운 것은 동남(東南)의 왕기(王氣)가 여기서 끝나는 것입니다."
비서감 부재란 신하의 상소다. 내용에서 보듯이 현재 나라의 실태를 고발하여 경각심을 일깨워주고자 올린 충성어린 상소였지만, 대개 망국지군이 그러하듯 씨알도 안 먹히고 부재는 오히려 대노한 진숙보에 의하여 처형당하고 만다.
위에서 주재가 상소문의 마지막에서도 경고했듯, 이처럼 난국을 겪는 진(陳)을 예의주시하며 노리는 세력이 있었으니, 바로 북조(北朝)를 종결짓고 화북(華北)을 통일한 수(隨)나라였다.
서기 560년의 판도.
빨간색 : 진(陳)
파란색 : 북제(北齊)
하늘색 : 북주(北周)
분홍색 : 서위(西魏)
여기서 서위(西魏)라는 나라는 예전 5호 16국 시대를 통일한 북위(北魏)가 분열하여 생긴 나라 중 하나다.
서기 566년에 서위(西魏)는 북주(北周)에 의해 멸망당했고 북제(北齊)도 그로부터 10여년 후에 무너졌다.
마지막으로 북주(北周)는 당시 실권자인 수국공(隨國公) 양견(楊堅)에 의해 황위 양위의 형식으로 막을 내린다.
그리고 양견(楊堅)은 수(隨)를 세우니 이때가 서기 581년이다.
수(隨) 고조(高祖) 문제(文帝) 양견(楊堅).
중국사에서 손꼽히는 명군(名君) 중의 하나.
북조(北朝)를 통일하고 남조(南朝)의 진(陳)도 멸하여 대륙통일을 이룩했다.
치세동안 스스로 모범이 되어 법제와 각종 제도와 정책의 실시 및 정비를 통해 부국강병을 이루었지만
다만 자식농사는 실패해서 말년에 좋지 않은 최후를 맞이했다.
수(隨)가 건국되었을 때는 서기 581년, 진(陳)에서 진숙보가 제위에 오르기 1년 전이다.
진숙보 치세 하의 진(陳)의 동향을 주시하며 혼군 치하에서 정신 못차리는 진(陳)을 보고 때가 무르익었음을 감지한 수(隨) 문제(文帝) 양견(楊堅)은 서기 588년 정월, 차남인 진왕(秦王) 양광(楊廣)에게 50만의 대군을 주어 진(陳)을 공격하게 했다.
수(隋) 세조(世祖) 명제(明帝) 양광(楊廣).
흔히 수(隋) 양제(煬帝)라 하여 '고구려 백만대군 꼬라박기' 로 우리에게도 많이 익숙한 중국 황제다.
여기서 왜 시호가 양제(煬帝)가 아닌지에 대해 의문을 품는 분들이 많을 것 같은데, 사실 정식 시호는 명제(明帝)다.
양제(煬帝)는 훗날 수(隋)를 멸하고 세워진 당(唐) 왕조가 명제 양광을 비하하여 붙인 시호다.
수(隨)군의 대규모 남하에 진(陳)의 방어라인은 순식간에 무너졌고 패퇴를 거듭한다. 전선은 속수무책으로 계속 밀렸고 위급을 알리는 파발마가 연신 수도 건강(建康)으로 날아들었지만 이미 황제의 눈과 귀를 막은 간신들에 의해 도중에 묵살되기 일쑤였다.
그러다 결국 그제서야 수(隨)의 대군이 몰려온다는 급보가 진(陳)의 조정에 도달했지만 진숙보는 사태파악도 못하고 그와 같은 장계를 듣고도 별거 아니라는 듯한 반응이었다.
"우리에겐 장강(長江)이 있고 아직 동남(東南)에 왕기(王氣)가 서려있거늘, 어찌 수(隨)군이 우릴 멸한단 말인가?"
진숙보가 믿고 기대고 있던 것은 순전히 진(陳)의 북부를 끼고 흐르는 장강, 즉 양자강이라는 천혜의 요새였다. 수(隨)의 대군이 장강을 넘지 못하리라 생각했던 것이다. 거기다 되도않은 왕기(王氣) 타령, 즉 왕의 기운이 동남(東南)에 위치한 진(陳)에 서려있으니 수군이 해하지는 못한다는 말이나 하고 있었다.
그저 간단하게 대응할 지시만 내리고는 평소 즐기던 꽃 구경에 몰두했는데 진숙보의 그와 같은 기대는 곧 깨지고 만다.
며칠 지나지 않아 수(隨)군이 이미 장강을 넘어 수도 건강(建康)으로 진군해 들어오고 있다는 급보가 날아든 것이다.
평소 수(隨)로부터의 공격을 우려한 신하들의 진언에도 "우리 두 나라는 그동안 평화롭게 공존해 왔다. 어찌 저들이 우릴 침범한단 말인가?" 하며 큰소리만 떵떵치던 치곤 했던 그때의 모습은 온데간데 없고 그저 장강의 천험함만 철석같이 믿고 있던 진숙보는 이 급보를 접하자 소스라치게 놀라 어쩔 줄 몰라하며 밤낮으로 울기만 했다고 한다.
설상가상으로 수(隨)군이 진(陳)의 백성들에게 환영받고 있다는 소식도 전해진다. 진(陳)에 대한 민심이 좋지 못한 것을 이용한 수(隨)군이 찌라시를 뿌려 악독한 진(陳)가 놈들을 끝장내러 왔다고 선전하고 다닌 탓이었다. 그리고 위에서 서술했듯이 평소 진(陳)악정에 시달리던 진(陳)의 백성들은 수(隨)군의 바램대로 쌍수들어 환영했으니 이래저래 자국민들로부터도조차 지지 못받는 실정이었다.
진숙보는 매일마다 신하들을 붙잡고 "우야면 좋노ㅜㅜ" 하며 애가 말라 징징댔지만 조정에서의 부정부패로 인한 실망 탓에 이미 나라에 대한 충성이라곤 쇠털만큼도 안남아 있던 조정대신들은 그저 묵묵부답이었다.
그야말로 절체절명의 위기 상황에서 아무도 애국심을 불사르지 않던 차에 수(隨)군을 막겠다고 자청하고 나선 신하가 있었는데, 소마가(簫摩訶)라는 장군이었다.
소마가(簫摩訶)는 본래 남조(南朝)의 세번째 왕조인 양(梁) 왕조의 황족출신으로, 그 뒤에 들어선 진(陳)을 섬긴 이른바 망국의 후예였다.
평소 망국의 후예를 거두어 준 것에 대해 진(陳)에게 감사함을 느끼고 있던 소마가(簫摩訶)는 진(陳)이 존망의 위기에 처하자 그 은혜를 갚고자 출전을 자청한 것이다.
소마가라고 해서 진(陳)의 멸망을 예감 못했을리는 없다. 말그대로 은혜 갚고자 출전했을 뿐.
소마가(簫摩訶)가 나서자 진숙보는 기뻐 어쩔 줄 몰라하며 소마가의 벼슬을 올려주고 또한 그 가족들도 황궁으로 데려와 살게 했다고 한다.
오오 님이 막아줄거임??
대신에 내가 님 벼슬 올려주고 님 가족들 황궁에서 안전하게 보살펴 주겠음 ㅇㅇ
저 수가놈들 몰매 줘서 쫓아내 달라는..
소마가(簫摩訶)는 남은 병력을 긁어모아 수(隨)군을 요격하러 출전했고 최후의 저항이라 사뭇 비장했는지 나름 선전하며 수(隨)군을 막아낸다.
그리고 위에서 밝혔듯, 진숙보는 소마가(簫摩訶)의 가족들을 보호해준답시고 황궁으로 불러들였는데, 여기서 진숙보는 다시한번 일을 그르치고 만다.
소마가(簫摩訶)의 아내가 미인이었는지 진숙보가 색(色)을 탐하는 성격을 못버리고 소마가의 아내에게 집적댄 것이었다.
그것도 자신을 위해 목숨걸고 전쟁에 나가 있는 신하의 아내를.
소마가가 그 소식을 접하게 된 때는 몇달이 지나서였다. 가솔들이 직접 소마가에게 찾아와 일의 전말을 낱낱이 고해바쳤던 것이다.
아내가 궁중에 갇혀 있으며 황제라는 호색한이 밤낮으로 희롱하고 있다는 청천벽력 같은 소식을 들은 소마가는 분통이 터지다 못해 기가 막혀 환장할 지경이었다.
그나마 남아있던 일말의 충성심도 싹 가셔버린 소마가는 오랫동안 생각하던 끝에 수(隨)군에 대한 저항을 그만두기로 하고 퇴각해버린다.
마지막 방어선인 소마가가 뚫려버리자 수(隨)군은 바로 진(陳)의 수도, 건강(建康)으로 진격해 들어갔고 결국은 수군은 건강에 입성하는데에 성공한다.
수(隨)군이 궁성 안으로까지 들어와 진숙보를 찾을 때, 진숙보는 애지중지하던 장려화(張麗華)와 손귀인(孫貴人)이라는 후궁을 데리고 궁중의 어느 우물 안으로 숨어 있었다고 한다.
거기 들어가 숨는다고 해서 뭐가 달라지겠냐만은 진숙보가 내놓은 최고의 자구책이었다. 하지만 막상 들어가니 춥고 답답했을터. 결국은 항복하기로 마음을 먹었는데, 수(隨)군이 우물까지는 뒤져보질 않아 진숙보와 두 귀비를 못찾는 웃지 못할 일이 벌어진다.
보다못한 진숙보가 "나 여기있어! 꺼내줘!" 라고 외치고 나서야 그 소리를 들은 수나라 병사들에 의해 구조(?)되었다고 한다.
우물에 걸린 두레박으로 한명씩 꺼냈다고 하는데 이때 진숙보를 끌어올리던 수나라 병사 曰,
"황제라 그런가 무게도 무겁구나."
진숙보와 진(陳)의 유신들은 수(隨)군의 총사령관, 양광(楊廣)에게 정식으로 항복했다. 서기 589년, 재위 7년만의 황제 생활이었다.
그리하여 남조(南朝)의 최후의 왕조, 진(陳)은 멸망하고 수(隨)는 천하통일을 이룩한다.
그들은 곧장 수(隨)의 도읍, 장안(長安)으로 압송되었고 거기서 수(隨) 문제(文帝) 양견(楊堅)과 조우한다.
문제(文帝) 양견(楊堅)은 망국의 황제 진숙보에게 알맞은 작위를 하사하고 집도 줘서 사는데에 부족함이 없게 조치해줬다.
그렇게 남은 여생을 편안히 지내던 진숙보가 하루는 문제(文帝) 양견(楊堅)에게 궁성도 크게 짓고 향락 좀 누리라고 권했다고 한다.
양견(楊堅)은 그자리에서 그냥 알겠소 하고 말았지만 나중에 대신들 앞에서는,
"자신이 어쩌다 망했는지도 모르고 그걸 뉘우치기는 커녕 이제는 나에게까지 향락을 권하는구먼."
하며 웃었다는 얘기가 전해내려온다.
그리고 진숙보는 서기 604년, 54세를 일기로 사망한다.
문제(文帝) 양견(楊堅)은 진숙보에게 '장선양공' 이란 시호를 올려주었는데, 여기서 '양(煬)' 자는 위에서도 밝혔듯, 후세의 당(唐) 왕조가 수(隨) 양제(煬帝)를 폄하하고자 고의로 올린 시호와 동일하다.
'양(煬)' 자는 시법으로 '여자를 좋아하고 예를 멀리한다' 라는 의미를 담고 있는데, 문제 양견이 무슨 의도로 그런 시호를 올렸는지 아실터.
진숙보는 낙양(洛陽)의 북망산(北邙山)에 안장되었는데 공교롭게도 삼국시대 오(吳)의 마지막 황제인 손호(孫皓)의 옆자리였다.
삼국지연의를 읽어본 독자라면 손호(孫皓) 역시 폭정을 일삼던 망군지군이었을을 알 것이다. 이 또한 양견의 의도였으리라 생각된다.
그리고 먼 훗날에는 백제(百濟)의 마지막 왕인 의자왕(義慈王)도 백제 멸망 후에 당(唐)으로 끌려와 낙양에서 여생을 마친 뒤에 의자왕도 자국의 혼군들이었던 손호와 진숙보와 다를 것없는 무능했던 군주라는 것을 표현하고자 했던 당(唐)에 의해 나란히 묻히는 얘기는 유명하다.
아무튼 이리하여 남북조 시대는 막을 내리게 되고 수(隨) 왕조의 시대가 시작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