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하세요, 절름발이 Toddle입니다.
지난 3월 4일, 저는 제목 그대로 무려 6년만에 누구의 도움도 받지않고 혼자 힘으로 세상을 여행하고 왔습니다.
그래서 여행게에 그 후기를 한번 써 봅니다.
우선, 왜 6년만에 바깥세상을 보게 된 것인지부터 설명해야겠네요.
저는 2011년 5월 22일 바이크를 타고 도로를 달리다 큰 사고를 당했습니다.
차에치여 바이크와 함께 공중에서 빙글빙글돌다 땅에 처박히고도 수십미터를 날아갈 정도로 대차게 사고를 당했는데요
아스팔트 바닥에서 이게 뭔 일인지 어리둥절하다 제 꼴을보니 헬멧은 턱끈이 찢어져 날아가버렸고 왼쪽 발목은
상대방 차의 범퍼와 제 바이크의 엔진사이에 끼어 으깨져서 그야말로 뼈와 살이 다 날아가버린 상태였습니다.
발목뼈가 아예 산산히 부숴져 날아가버렸고 발은 아킬레스건 인대만 남아 다리에 덜렁덜렁 붙어만있던 상태였습니다.
그때부터 기나긴 치료와 수술의 나날이 시작되었습니다.
발목은 일단 재건해보기로 결정을했기에 일리자일로프라는 키크는 수술을 할 때 쓰는 금속 외고정장치를 박았습니다.
요렇게 생긴 물건입니다. (발바닥에 묻은 빨간색은 피가 아니라 소독약입니다ㅎ)
저걸 박고나서 유실된부분이 열려있는 채 매일매일 소독을 받았는데 결국 기적적으로 살아있던 신경이 염증으로
죽어버려서 발목 아래로는 다신 쓸 수 없는 상태가 되어버렸죠.
없어진 신체를 다시 만드는 작업은 생각보다 무척 어렵습니다.
우선 뼈가 너무 많이 사라져서 제 골반뼈를 깎아내고 거기에 시신을 기증해주신 도너분께 뼈를 기증받아 채워넣었습니다.
근육은 왼쪽 활배근에서 떼어내 이식했고 마지막으로 피부는 허벅지에서 떼어내 붙였습니다.
이러다보니 몸의 왼쪽은 몽땅 생채기가 나 버렸네요ㅋ
발목은 십수번의 수술로 간신히 이어붙였지만 겉보기엔 화상입은 것처럼 우둘두둘 색깔도 이상하고
허벅지에는 피부를 긁어낸 직사각형의 흔적이 두군데 생겼습니다.
골반에도 뼈를 긁어내기위해 살을 짼 자욱이 남았고 왼쪽 겨드랑이부터 허리까지 깊고 긴 수술자국도 났습니다.
게다가 제 다리라고는 하지만 기능면에서는 의족보다 딱히 나을게 없는 상태죠.
의족보다 좋은점은 발바닥에 감각이 남아있으니 좀 더 세밀한 걸음을 걸을 수 있다는 것 정도고
단점은 귀찮게도 때가되면 발톱을 깎아줘야 한다는 것입니다ㅋ
플러스 너무 장기간 링거를 통해 방코마이신(항생제)을 투약했더니 팔과 다리의 핏줄들은 다 경화되고 사라져버려서
사내자식 팔뚝이 핏줄 하나없이 매끄러워진건 덤입니다ㅋ
(아, 독한 항생제를 매일매일 맞았더니 지난 6년간 감기 한번 걸리지 않았던건 좋더군요.)
결국, 저는 6년에 걸쳐 열다섯번 이상의 수술을 견뎌내고 병원침대와 제 방 침대 두군데만을 오고가며
맨탈을 어찌어찌 부여잡고 끈질기게 살아남았습니다.
강한놈이 살아남는게 아니라 살아남는 놈이 강한거라는 말이 참이라면 전 쫌 짱인듯 합니다ㅋㅋㅋㅋ
뭐 이제 치료도 끝났겠다 슬슬 재활을 해야하는데 제 경우는 재활이라고해봐야 6년간 움직이지 않아서 다 빠져버린 근육을
다시 복구시키는 것과 이젠 기능을 하지않는 왼쪽발목을 가지고 정상인처럼 걸어다닐 수 있게 훈련하는 것 뿐입니다.
그래서 따로 재활치료를 받는건 아니고 생활을 통해서 서서히 복구시켜가는 것이지요.
음... 6년만에 다시 생활전선으로 돌아간다는것은 낮설고 두려운게 솔직한 기분입니다.
너무 오래 방콕을했더니 버스, 지하철 요금도 얼마인지 모르겠고 택시기본요금도 모릅니다.
요즘사람들은 어떻게 옷을 입고다니는지도 모르겠고 뭐가 잴 핫 이슈인지도 모르겠군요ㅋ
밖에 나가는 것도 무섭지만 나가서 뭣부터 해야하는지도 중요하잖습니까?
아, 왜 나가야하는지 동기부여도 중요합니다, 아무것도 안한지 6년이 지나면 그 관성이 붙어서 뭘 시작하기가 힘들기도하구요.
그래서 일단 밖에 나가게되면 뭘 할까 리스트를 써 봤습니다.
요렇게요ㅋㅋㅋㅋㅋㅋㅋㅋㅋ
몇몇 의미없어 보이는 것들은 혼자만 알아보기위해 쓴 것이고 때로는 진짜 의미없는 것들도 있습니다.
다른 항목을 적을때는 뭘할까 고민을 좀 하긴했는데 (1)번 항목을 적을때는 한치 고민없이 적었습니다.
네, 대전 국립현충원에 가는게 지난 6년동안 가장 하고싶던일 1순위였습니다. 쭈욱~ 이요.
그럼 왜 제 (1)순위가 현충원에 가기인지 설명을 드려야 할 차례겠네요...ㅎㅎ
저는 공익근무요원이었습니다.
1997년인가 신검을 받았는데 IMF여파로 직장도 못구할테니 어서 군대나 다녀오자는 생각의 사람들이 한꺼번에
너무 많이 몰려들어 TO가 도통 나질않던 시절이었죠.
저도 국방부가 불러주기만을 기다리다 2000년 5월에서야 느즈막히 훈련소에 입소할 수 있었네요.
훈련소에서의 4주훈련을 끝마칠 때 즈음 이제 나두 하늘색 잠바에 쑥색 모자를쓰고 주차딱지나 떼러 다니겠구나했는데 웬걸...
훈련소 동기들이 거희 다 구청에 배정을 받았는데 저와 몇명만은 소방서로 배치를 받아버렸네요.
그래서 훈련소를 퇴소한 뒤 가게 된 곳은 서울시 은평구 녹번동에 있던 (지금은 은평소방서로 바뀌어 구파발로 옮겼습니다)
서부소방서 였습니다.
게다가 제가 근무지로 배정받은곳은 지령실(상황실)이라는 곳이었습니다.
지령실은 영어로 번역하자면 커맨드센터입니다ㅋ 뭔가 막 멋지죠?
네, 지령실이 바로 119신고를 받고 소방차나 구조대, 구급차에게 출동을 지시하고 그 외 상황정리와 무전임무를 총괄하는
소방서의 머리와도 같은 곳입니다.
지령실에서 근무를 하다보니 관내에서 벌어지는 모든 사건,사고,재해를 다 보고 들을 수 밖에 없없습니다.
그때의 에피소드는 너무나 많지만 페르마의 대정리에 의해 여백이 부족하므로 설명은 생략하겠습니다ㅋ
암튼, 소방서에서 3교대로 주야간 근무를 몇달 하고나니 소방관 분들에 대해 든 생각이...
(이렇게 말하면 오해를 살 수도 있겠지만 솔직하게 말씀 드립니다)
저 사람들 바보아닌가? 였습니다...
현장은 너무 위험하고 장비는 열악하기 짝이없으며 급료는 가장으로써 한 가정을 건사하기에 턱없이 부족하고
사람들은 구급대원들에게 폭력을 휘두르고 어이없는 일로 소방차를 부르고 등등...
이 소방관이라는 직업은 정말이지 사람을 구하는 일에서 카타르시스를 느끼는 Natural born HERO가 아니면
못해먹을 직업이라고 느꼈습니다. 실제로 제가 본 소방관분들이 그런분들 이셨구요.
정말 영웅들이라고 불리기에 한점 모자람없고 숭고한 직업이지만 저처럼 남보다 자기 자신을 먼저 걱정하는
범부는 저 소방관이라는 직업을 절대절대 할 수가 없겠더라구요. (신체능력도 안되지만요ㅋㅋㅋ)
사람목숨이 촌각을 다투는 현장의 최 일선에서 딱 한발자국 뒤에 있던놈으로 늘 바랬던건
화재나 사고현장에 출동하실때 제발 다치지 마시고 건강히 돌아오시라는 것 뿐이었습니다.
근데 제 바램은 2001년 3월 4일 새벽 산산히 날아가버렸습니다.
사고는 순식간에 일어나버렸고 여섯분의 영웅분들이 끝내 돌아오지 못하셨습니다.
소방장 박동규님, 소방교 김철홍님, 소방교 박상옥님, 소방교 김기석님, 소방사 장석찬님, 소방사 박준우님
이렇게 여섯분이 덮쳐오는 화마에 순직하셨습니다.
저를 비롯한 모든 소방서 식구들의 비통한 심정은 이루말할 수 없었습니다.
모두가 절망에 빠져 반쯤 정신이 나간 채 사고를 수습하고 또 그 도중에도 평소와 같이 인명을 구하러 출동했습니다.
공익이었던 저도 며칠밤을 세우며 수습을 도왔는데 그때 사고후 며칠간 너무 현실감이 없어서인지 뭔일을 했었는지도
잘 기억이 나질 않더라구요...
재난이 없는 세상이란게 있을 수 없다는건 알고있지만 늘 모두가 무사하게 돌아와 건강히 지내는 세상정도는
감히 바래왔더랬는데 그게 알고보니 참 허망한 바램이었다 싶었습니다.
시간이 지나 공익근무요원신분을 벗고서 딱 한번 참배를 간 적은 있었지만 그 뒤로는 사느라 바빠서
이런일이 있어서 저런일이 있어서 등등 갖은 핑계때문에 찾아가 인사드리는게 소흘했었습니다.
그리고 그 부채의식은 늘 가슴 한켠에 남아있었더랬죠.
그래서 사고 이후 제가 다시일어나 처음으로 해야할 일은 고민할 것 없이 대전국립현충원에 찾아가
꽃 한송이 놓아드리는 일이었습니다.
놀랍지 않습니까? 여기까지가 여행기의 프롤로그였습니다!!! ㅎㅎㅎ
이런 이유로 전 3월 4일 새벽에 일어나 6년만의 첫 외출을 시도했습니다.
새벽 6시, 처음으로 혼자 마을버스를 타 봤습니다. 교통카드가 없어 현금으로 냈는데 요금이 얼마였는지는 까먹었네요ㅎㅎ
버스가 요동치는군요. 어찌나 요동치는지 사진도 돌아가 버렸습니다... (수정하는 방법을 모르겠네요ㅠㅠ)
저를 태운 버스는 시골길을 달려달려 수도권전철 경의, 중앙선 금촌역으로 달립니다!!! (옆으로 누워 달린거 아닙니다.)
금촌역에 도착했습니다. 계단 올라오느라 죽을 뻔 했습니다. 근데 알고보니 장애자, 노약자용 엘리베이터라는게 있더군요.
역시 머리가 적당히 멍청해야 몸이 운동을 합니다.
행신역에 도착했습니다. 솔직히 첨 들어보는 역인데 왜 이런곳에 KTX 정류장이 있는건지는 잘 모르겠더군요ㅋ
08시 30분 출발 KTX표를 구입했습니다. 본래는 이것보다 한타임 먼저 출발하는것을 탈 계획이었는데 시간에 늦어서
그 다음 편성을 구입한 것입니다.
역시 인생은 계획대로 돌아가는게 아닌것이더라구요, 이렇게 된 김에 "이런게 여행의 묘미지!!"라고 스스로를 세뇌해 봅니다.
하의는 너풀거리는 태국 전통의상입니다ㅋ
그동안 누워지내느라 살도 너무 많이 쪄버렸고 이게 그나마 편해서 이걸로 입었습니다.
왼쪽발목이 수술흔적으로 많이 굵어졌기에 신발의 선택도 쉽지가 않습니다.
일단 오니즈카 호랭이 스니커를 신고와봤는데 나중에 피눈물 흘리며 후회했습니다.
출발시간이 다가왔네요. 탑승구역으로 가는 길인데 어째 비행기 타러가는 기분도 쪼금 들더군요.
창문 밖으로 KTX가 보입니다. 두근두근 거리기 시작합니다.
태양도 눈부시게 비춰주는군요, 제 미래도 이렇게 찬란하면 좋겠습니다.
아님 말구여...
자리에 앉았습니다. 네명이 마주보며 앉는 자리인데 제 자리는 역방향에 복도쪽이네요. 쳇!!
제가 잴 먼저 자리에 앉았는데 곧 다른자리의 승객분들이 차례차례 와서 앉기 시작했습니다.
어? 세분 다 젊은 여자사람입니다... 흐어... 오대수가 엘리베이터에서 이런 기분이었구나...
덕분에 대전까지 가는내내 숨도 한번 편히 못쉬어보고 시선은 천장의 디스플레이에만 고정한 채로 갔습니다.
호흡곤란의 한시간을 이겨내고 드뎌 대전역에 도착했습니다!!!
바이크와 자전거로는 와 봤지만 기차로는 처음이네요.
지하철을 탈까하다가... 하늘이 안보이는 지하철 보다는 웬지 버스가 나을듯해서 버스를 타기로 결정했습니다.
대전역근처의 시장통은 목발짚은 절름발이에게는 좀 힘들었습니다.
그래도 무사히 건너편의 버스정류장에 도착!!!
현충원역 정류장에 도착해서 버스에서 내렸습니다.
아마 대전 사시는 분들은 아시겠지만... 현충원역과 현충원 사이의 거리가 서울대와 서울대역의 그것과 비슷합니다...ㅠㅠ
그걸 모르고 버스에서 내려 룰루랄라 걷기시작한 저는 약 30분을 걸어가도 보이지않는 현충원에 절망했습니다.
가벼운 마음으로 스니커를 신고온게 뼈저리게 후회스럽습니다.
실제 왼쪽 발목뼈가 저리더군요.
간신히 간신히 현충원에 도착한 뒤 매점에서 국화꽃 여섯송이를 샀습니다.
제가 돈주고 꽃을 사본건 아마도 처음이지않나 싶네요.
입구를 지나 좌측으로가면 순직소방관묘역이 나옵니다만...
팅팅 부어버린 왼발로 걸어가기에는 만만치않은 거리입니다.
오, 웬일로 사진이 똑바로 등록되었습니다...ㅠㅠ
순직소방관묘역 가는길에 찍어본 전사자묘역입니다.
전사자 묘역을 지키고있는 센티넬입니다.
해괴하게 생긴 뚱땡이가 절뚝거리며 걸어가자 몹시 경계를 하고있습니다.
나무뒤로 숨어 경계를 계속하지만 엉덩이가 보입니다 센티넬씨!!!
헉헉헉... 거희 다 와 갑니다.
예전의 기억(10년도 전)이 맞다면 순직철도공무원을 기념하는 열차가 전시된 곳 바로 옆이 여섯분이 쉬고계신 곳입니다.
그런데 저 철도는... 철도공무원이 아니라 롤러코스터 운전수의 기념물인가 싶네요...ㅎㅎ
무사히 도착해 꽃 한송이씩을 바치고 목례로 인사를 드렸습니다.
목례로 마친건 그 이상의 거동은 좀 힘이들어서입니다...ㅠㅠ
마침 같은날 참배를 와 계셨던 김철홍 소방관님의 가족분들과 마주쳤습니다.
어떻게 오셨냐고 물어보시길래 제 신분과 사연을 말씀드렸더니 와줘서 고맙다시면서 같이 제삿밥 한술 뜨기를 권하시네요.
몇번 거절을 하다 끝끝내 이겨내지못하고 합석을 하게되었는데 사실 돗자리 위에서 앉아 밥을먹는게 무척 힘들었습니다ㅎㅎ
음식이 맛있어서 미련이 남았지만 최대한 조금, 빨리 먹고나서 다시 일어섰습니다.
다리가 불편하다보니 제한되는 자세가 많은게 참 슬픕니다.
인사를 마치고 입구쪽으로 가다보니 웬 버스가 서 있었습니다.
현충원역까지 운행하는 무료 셔틀버스입니다...
역시 머리가 적당히 멍청해야 몸이 열일합니다ㅋㅋㅋ
편하게 지하철역에 도착해서는 지하철표를 구입했습니다, 그런데 지하철표가 플라스틱으로 된 토큰이네요...
꼭 카지노라도 간 기분입니다.
돌아가는 곳은 서울역입니다. 위시리스트에 있는 "친구들을 불러 술 한잔하기"를 위해섭니다.
사진뒤로 빵이 보이는데 KTX를 타기위해 플랫폼으로 가는길에 대전명물 튀김소보로라는게 있길래 줄서서 한세트 샀습니다.
귀로는 늘 쓸쓸한 기분이 듭니다. 이유는 없습니다.ㅋ
서울역에 도착했습니다. 정문앞을 나왔더니 바깥이 시끌시끌하더군요.
꼬부랑 어르신들이 잔뜩 모여서 박근혜대통령은 아무 잘못이없다, 청렴하다, 누명이다를 외치면서 지나가는 사람들에게
서명을 받거나 후원금을 요구하고 있었습니다.
승질머리대로 글을 쓰면 좀 많이 나갈까봐 여기서 그만둡니다ㅋ
서울역앞에서 버스를 타고 제가 자랐던 고향인 은평구 구산동으로 갔습니다.
전에는 친구들이 많이 살았었는데 이젠 다 고향을 떠나 지방으로 뿔뿔이 흩어지고 딱 한녀석만 남아있죠
바로 그녀석의 가게엘 찾아가보려합니다.
경찰이 옥상에서 스쿨버스를 집어던져 버리려고 하는건가요?
왕년에 오락실에서 건블레이드NY라는 게임속 보스가 저거랑 비슷했던거 같은데... 기억이 가물가물 거립니다.
제 고향 구산동의 친구네 가게에 도착했습니다.
언제봐도 괴랄한 네이밍센스의 세탁소입니다...
친구가 매일 조공을 올린다는 야생호랑이입니다.
얼마전 어미잃은 네마리를 거둬 집에서 키우고있고 또 가게앞에서 이렇게 조공도 올리는걸보니 동네 호랑이들은 죄 다 케어할 속셈인가봅니다.
친구의 364일 된 딸입니다. 바로 내일 (3월 5일)이 돌잔치거든요ㅎㅎ
이것때문에 겸사겸사 들린겁니다.
오늘은 일단 대전에서 사 온 튀김소보로를 바친 뒤 내일 돌잔치에서 다시 보기로 했습니다.
돌잔치 준비로 바쁜 친구를 남겨두고 다른녀석들을 불러내 연신내에서 한잔 했습니다.
하나비라는 일본식 술집에서 먹은 무슨 닭요리인데 무지하게 맛났습니다.
하기사 6년만에 먹어보는 사제음식인데 뭔들 맛이 없을까 싶지만요ㅎㅎ
오뎅탕도 맛났습니다.
처음엔 술에 취하면 곤란할테니 소주를 조금씩 꺾어 마셨는데 어째 마셔도 마셔도 멀쩡하네요...
왕년에 하루 소주 아홉병씩 마셔대던 몸은 아직 그대로인가봅니다.
그 뒤로 조금 템포를 올려 마셔봤는데도 취하지는 않았습니다.
위시 리스트에는 깜빡 적지 않았지만 노래방에 가보기도 제 소원중 하나였습니다.
다 늙은 친구들을 이끌고 아주 건전한(ㅎ) 노래방으로 가서 씐나게 노랠 불러봤습니다.
노래방으로 마무리한 뒤 친구네집에서 하룻밤 신세를 졌습니다.
가는김에 평소 좋아하던 기네스맥주를 사들고가 마무리 입가심도했구요.
아침엔 이렇게 밥도 얻어먹었습니다.
오늘은 친구네 딸의 돌잔치가 있는날인데 중간에 시간이 빕니다.
바로 이 짬에 꼭 가볼데가 있습니다.
지하철역에 들어가기전 교통카드를 만들었습니다.
삐삑~ 개찰구 소리가 경쾌하군요ㅋ
구산역에서 6호선을 타고 몇정거장을 지나 목적지에 도착했습니다.
네... 바로 6년만에 와보는 홈 스윗 홈 서울월드컵 경기장입니다.
오늘은 바로 K리그 클래식 개막일이자 첫경기로 수원을 상대하는 슈퍼매치가 열리는 날입니다.
개막전에 슈퍼매치라니... 요새 축협이 열일한다더니 맞나봅니다ㅋㅋ
4열 에스컬레이터가 웬지 장엄해 보입니다.
사실 다치기 전에는 바이크로 오던가 아님 홍제천을 따라 걸어갔기에 처음 이용해보는겁니다.
FC서울의 매가스토어입니다. 다치기 전에는 이런거 없었는데 세월이 아득하게 느껴지네요ㅎㅎㅎ
당연히 새로 출시된 17년형 신형저지를 한벌 지르러 들어가줍니다 고고고.
K리그용 홈 유니폼을 사고싶었는데 그동안 비대해진 몸에 맞는 사이즈가 없어서 아쉽지만 AFC챔피언스리그 전용저지를 샀습니다.
120 사이즈가 있더라구요... 마킹은 K리그용 마킹으로 붙여버리는 꼼수를...ㅎㅎㅎ
그러고보니 수많은 계단을 어찌 오를까 걱정이되네요...
이번엔 머리를 좀 써서 혹시 장애인용 엘리베이터가 있는지 찾아봤는데 CGV 입구쪽에 엘리베이터가 있더군요.
덕분에 편하게 올라갔습니다.
두근두근... 드디어 6년만에 집에 돌아가는 순간입니다.
사진엔 없지만 또다른 친구를 불러내서 갔기에 티켓이 두장입니다.
이제는 서포터석과 일반석의 구분이 없어졌더군요.
원래 골대 뒤 서포터석은 경기관람을 포기하고 섭팅만 죽어라고하는 자리이기에 가격이 잴 쌌었는데 매리트가 조금 희석되었습니다.
IN DEJAN, WE TRUST, 믿씁니다!!!!!
아아아아 6년만에 맡아보는 상암의 잔디냄새가 절 아찔하게 만듭니다 엉엉엉...ㅠㅠ
6년 전 까지는 늘 골대뒤 맨앞자리에서 사자후를 외쳤었지만 이젠 난간없는 계단때문에 아래로 내려가는건 힘들것 같습니다.
위치도, 높이도 어정쩡한 자리에 앉아서 수호신분들이 열썹하시는 모습을 흐믓하게 구경합니다.
친구가 치킨을 준비하는 센스를 발휘해 줬습니다ㅎㅎㅎ
냠냠냠.
서울의 살아있는 레전드 아디코치님이 보입니다.
요새 서울 수비진이 정줄을 놨는데 맴매 좀 해 주세요...ㅠㅠ
결국 이날 경기에서도 서울의 수비진은 수원에게 좌우를 탈탈 털리면서 불안한 경기력을 보였습니다.
윤일록이 네녀석이 어리바리하니까 다 늙은 김치우가 말년에 죽어라고 뛰어다녀야 하잖아, 정신 좀 차려!!! ㅠㅠ
경기가 끝나고 서둘러 돌잔치가 열리는 연신내역으로 되돌아갑니다.
역에서 스크린도어에 비추는 제 모습을 찍어봤는데 사람의 몰골이 아니네요ㅋㅋ
돌잔치에 도착했습니다. 금반지는 무리였고 신사임당 한분 보내드리고 뷔페음식을 흡입했습니다. 우어어어~!!!!
돌잔치 스테이지, 아직 시작하기 조금 전이라 사람이 없네요.
드뎌 돌잔치가 시작되고 오늘의 주인공이 입장합니다.
무려 아우디 컨버터블을 몰고 등장했는데 딱봐도 무면허지만... 알고보니 뒤에서 직원이 리모콘으로 조종하고 있었습니다 (비선실세인 모양입니다)
돌잔치는 먹느라, 그경하고 웃고 떠드느라 더이상 사진이 없습니다.
바쁘게 돌아갔던 이틀간의 여정이 이제 모두 끝났네요. 이제 저는 연신내에서 집까지 버스를 이용해 귀가할 예정입니다.
돌아가는 길에는 어둠과 함께 이슬비가 흩내리고있습니다. 그래, 자고로 귀로(歸路)는 이래야 제맛....
여기까지가 6년만의 여정이었습니다.
긴 글 읽어주셔서 감사드리구요 왼쪽으로 뒤집혀진 사진 보시느라 왼쪽으로 껶인 목뼈에게도 감사인사 드립니다.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