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치(당나라 고종을 말함.)가 물었다.
"수나라 개황(수문제의 연호) 연간 시기에 생산한 양식은 얼마였는가?"
고이행이 답하였다.
"당시의 양식은 중국의 모든 인구가 50년은 충분히 먹을 정도였습니다."
이치가 깜짝 놀라며 말하기를
"당시에 생산력이 그렇게 높았단 말인가? 알겠다. 정관지치(당태종이 이끈 태평성대를 말함.)는
바로 10분의 1도 미치지 못하는 인구로 50년은 충분히 먹고도 남을 양식을 미친듯이 먹어치운 것이었구나..."
-자치통감-
수문제 양견. 중국을 4번째로 통일한 황제이자 역사에 남을만한 먼치킨 군주. 그 유명한 개황의 치가 이때를 이야기하는 말이다.
전국에 굶어죽는 사람을 찾아보기 어려웠다는 시대. 그의 치세 약 20년동안 중국의 인구는 400만호에서 890만호로 늘었는데,
인구성장률이 평균 4퍼센트를 넘었다는 소리다. (참고로 서기 17세기까지 세계인구의 연평균증가율은 0.04~0.05%)
"예로부터 천하를 얻기가 수문제때와 같이 쉬웠던 일은 여지껏 없었다."
-조익, 청나라 시대의 역사가-
정관 11년, 감찰어사 마주가 당나라 태종 이세민에게 고하기를,
"서경의 창고(수문제때 지어놓은 창고)도 국가에서 쓰는데, 지금까지도 다 쓰지 못하고 있다."고 하였다.
-정관정요-
양견은 자신의 외손자였던 정제에게 협박을 적절하게 섞어서양위를 받아 황제가 되었다. 물론 반란에 직면했지만,
뛰어난 정치력으로 이를 모조리 무마시켰으며, 마침 남쪽의 진나라는 진숙보라는 희대의 막장군주였기에 손쉽게 천하통일을 이룩할수 있었다.
당시 수나라는 진숙보의 악행을 적은 수십만장의 삐라격서를 날리며 진나라로 진군하자 온 천하가 호응하여 손쉽게 통일이 이루어졌다고 한다.
문제는 사치를 엄격히 금하고 솔선수범하여 오직 반찬 하나로만 식사를 하고 낡은 옷을 입었다고 한다.
(여담이지만, 중화민국때 군벌들과 비적들이 그의 무덤을 도굴하려 그랬는데, 현지 주민들이 자기들이 미리 파봤는지 별거 없으니 그만두라고
말렸다고 한다. 진짜로 파봤는데 별거 없어서 그만뒀다고 한다..)
제도적으로는 개황률, 균전제, 직전법, 부병제를 정비하여 중국의 기틀을 다졌다. 과거제 역시 수문제가 도입한 것이었다.
문제는 부정부패를 끔찍히 싫어하여, 뇌물과 관련이 있는 관료를 모두 참했는데, 이것이 너무 잔혹하다며 신하들이 불평할 정도였다.
이러한 수문제의 통치가 20년동안 계속되자 수나라의 백성들의 삶은 매우 부유해졌다. 수문제가 강남을 정복한뒤,
세금을 크게 낮추었는데도 불구하고 국고가 넘쳐흘러 영을 내려 대대적으로 곡물창고를 지었다.
그러나 그마저 차버려 천하에 다시 영을 내려 세금을 걷지 않은 적도 여러번이었다. (고대판 카타르)
아무튼 하도 쌓아놓은 곡식과 재물이 많아 기록된 것처럼 후대의 왕조들도 제대로 쓰지 못한 것으로 보인다;;
당나라가 건국된후 20년이 넘은 뒤에도 수나라때 쌓아놓은 재물을 사용했다는 기록이 있으며, 결정적으로
1969년 낙양에서 수나라때의 양식 창고가 별견되었는데, 내부에 259개의 양교가 있었고
그중 하나의 양교에만 이미 탄화된 곡식 50만 근이 있었다고 한다.
이때 쌓아올린 수나라의 국력은 엄청나서 말도 안되는 짓을 많이 보여준다.
수문제의 뒤를 이은 수양제는, 이런 넘쳐흐르는 국력을 기반, 순수인력만으로 황하와 양자강을 잇는 대운하 공사에 성공한다...
무려 7세기에 있었던 일이다! 그리고 북위의 부견이 이끈 비수대전과 함께, 근대 이전에 유이하게 고구려 원정에서 말 그대로
100만대군을 동원하기도 했다. 물론 이 공사의 부담, 만리장성및 궁전공사, 고구려 원정 패배가 겹치면서
수나라는 각지의 반란에 직면하여 2대만에 망해버리지만,
이때 지어진 대운하로 남북간에 경제교류가 활발하게 이루어지게 된 중국은 상업이 번성하게 되었고,
남북화합이 이루어져 통일왕조가 지속적으로 유지되게 된다. 그 결과 중국은 산업혁명이 이루어지기 전까지
나머지 전세계의 GDP를 다 합쳐도 못따라오는, 말 그대로 희대의 먼치킨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