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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산 허균> 용이 되지 못한 이무기 !
게시물ID : history_27625짧은주소 복사하기
작성자 : 드림해적선장
추천 : 10
조회수 : 1098회
댓글수 : 3개
등록시간 : 2017/03/02 20:27: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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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창작글
1618년 광해군 일기에 오늘의 주인공에 대한 글이 아래와 같이 있어.
<그는 천지간의 괴물이다. 그 몸뚱이를 찢어 죽여도 시원치 않고 그 고기를 씹어 먹어도 분이 풀리지 않을 것이다. 그의 일생을 보면 악이란 악은 모두 갖추어져 있다.>
 
이 무슨 연쇄살인범에 대한 묘사도 아니고, 홍길동의 저자 허균이 무슨 큰 잘못을 했길래 이런 식의 평가를 내린 걸까?
50살에 저잣거리에서 시신의 처리가 불가능 할 정도로 능지처참을 당한 사연은 멀까?
혹시 홍길동전이 불온서적으로 지정되어 정부에 미운 털이 단단히 박힌 걸까? 아무리 그래도 단지 책 하나로 이 정도의 혹평까지는 듣기는 어려운데 말이야.
차근차근 그의 인생 행적을 되짚어 보며 정말 희대의 괴물인지 억울한 측면은 없었는지 각자 나름의 판단을 해 보자고..
 
허균이 12살이 되던 해인 1580년 그의 아버지 허엽의 부고 기사 일부를 먼저 살펴보자고.
출처는 선조수정실록이야.
<세 아들과 사위는 모두 문사로 조정에 올라 논의하여 서로의 수준을 높였기 때문에 세상에서 일컫기를 허씨가 당파의 가문 중에 가장 치성하였다.>
집안이 보통 집안이 아님을 쉽게 유추 해 볼 수 있어.
여기서 음식이야기를 살짝 곁들이면 강원도 초당두부의 초당이 허엽의 호에서 비롯되었다고 해. 초당 허협은 동인의 최고 영수였는데 현재로 치면 거대 정당의 당 대표격이야. 한 마디로 허균은 엄청난 아버지의 후광을 안고 태어났고, 금 수저로 쌀밥을 배불리 먹는 어린 시절을 보냈어.
형인 허성은 훗날 남인을 대표하는 인물이 되고 누이는 그 유명한 허난설헌이야.
 
이런 허균이 서자를 주인공으로 한 홍길동전을 쓰고 장성하여서도 서자출신이나 사회의 소외계층과 거리낌없이 친밀한 관계를 유지 한 것은 그의 스승의 영향이 컸다고 볼 수 있어. 허균과 허난설헌의 스승은 바로 조선의 이태백이라 불리던 손곡 이달인데 이 분이 바로 서자 출신이었어. 서자출신이라 흔히 말하는 출세의 길을 못 걸었지만 제자가 허균과 허난설헌이라니. 저승에서는 대 스승으로 모두의 존경을 받지 않았을까? 그 한을 조금은 푸시길……
 
허균은 12살에 아버지가 돌아가셨지만 26세에 과거에 급제를 하게 됐어. 일반적인 가정이었다면 가장을 잃고 공부를 이어나가기 쉽지 않았겠지만, 아버지가 당 대표 출신이니 공부를 하는데 -다른 흙 수저들 보다는- 어려움이 덜 했을 거야.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허균은 관직에 진출 하면서 언론과 집권층의 집중포화를 맞게 되는데……
 
우선 허균이 세상을 바라보는 시선과 백성에 대한 생각 자체가 당시 지배층에서는 도저히 이해도 안되고 용납도 할 수 없는 것이었어.
그의 저서 <성소부부고>호민론을 보면 당시 기준- 얼마나 위험한 발언을 하고 있는지 알 수가 있어. 그는 백성을 3가지 부류로 나누었는데 간략하게 요약하면 다음과 같아.
 
-항민 : 항상 눈앞의 일들에 얽매이고, 그냥 따라서 법이나 지키면서 윗사람에게 부림을 당하는 사람들
 
- 원민 : 살이 벗겨지고, 뼈 골이 부서지며, 집안의 수입과 땅의 소출을 다 바쳐서, 한없는 요구에 제공하느라 시름하고 탄식하면서 윗사람을 탓하는 사람들
 
- 호민 : 자취를 푸줏간 속에 숨기고 몰래 딴 마음을 품고서, 천지간을 흘겨보다가 혹시 시대적인 변고라도 있다면 자기의 소원을 실현하고 싶어하는 사람들.
 
이렇게 백성을 세 분류로 나누고 항민과 원민은 두려워할 필요가 없고, 나라는 호민을 두려워해야 한다는 사상을 가지고 있었어. 역시 개도 짖어야 주인이 한 번 더 돌아보듯이 백성들도 가라앉는 배에서 가만히 있을 것이 아니라 살려달라고 소리쳐야 나라에서 돌아보고 두려워한 다는 것이 허균의 지론이었어.
 
우리 역사상 가장 매력적인 캐릭터 중에 하나인 홍길동이 호민의 적자라는 것은 삼척동자도 알 일이야. 자기가 꿈꾸던 세상을 글로써 펼쳐냈던 게지. 홍길동이 조직한 활빈당의 주요무대가 문경세제 근처라는 걸 짚고 넘어 가자고. 뒤에 나올 이야기에 복선이 되니까.
 
허균은 불교에 빠져 들어서 성리학 기반의 조선 주류사회에서 이단아 취급을 받았어.
선조실록에 이런 기록이 있어.
<허균은 밥을 먹을 때도 식경을 외고 항상 작은 부처를 모시니 승려고 아니고 무엇인가?>
결국 불교 숭배로 파직까지 당하지만 허균은 소신을 굽히지 않고 명나라에 갔을 때는 천주교에 까지 심취하게 돼. 그는 종교를 하나의 학문으로 대 한 것이 아닐까? 사실 인간이 악용하지만 않는 다면 주요 종교의 가르침은 우리 삶에 큰 보탬이 되는 것이 사실이자나.
허균의 지적 호기심은 명나라 사신으로 가서 폭발을 하게 되는데, 대부분의 사신들이 명나라에서 비단과 골동품 쇼핑에 빠져 있을 때, 그는 무려 4천 권의 책을 바리바리 싸 들고 귀국길에 올랐다고 해. 특히 그가 명나라의 인사동 같은 곳을 뒤져 어렵게 The 책을 구하고서는 어린아이처럼 좋아했다고 하니, 앎에 대한 그의 열정은 존경 받아 마땅하지 않을까?
 
허균이 그토록 찾아 헤매던 The 책이라 함은 바로 이탁오의 책인데 명나라에서는 그의 모든 책을 최악의 금서로 지정했다고 해. 잠시 옆길로 새서 이 분의 이야기를 하고 가야겠어.
이탁오는 인생의 가장 큰 즐거움이 독서라고 했고, 문을 잠그고 책을 볼 때가 가장 행복했다고 해. 다독을 통하여 깨달은 자신의 생각을 책에다 펼쳤는데, 지금으로부터 무려 400여 년 전 명나라에서 남녀평등을 주장하고 고리타분한 유교사상에서 벗어나야 한다고 주장을 한 책들을 출판한 분이야. 이러니 명나라 정부 당국에서 그를 가만 뒀겠어?
이지 이탁오를 혹세무민의 죄목으로 징역 3년에 처 한 다해. 항소심은 없다 해, 꽝꽝꽝
감옥에 갇힌 그는 악법도 법이다라는 말을 남기지 않고 76세의 나이에 깨끗하게 자결을 해 버려. 시대를 앞선 지식인들은 사회로부터는 인정을 받지만 지배층에 의해 운명을 달리하는 것은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마찬가지 인 것 같아.
 
허균이 이런 불온서적(?)들을 다량으로 들여 오니 조선정부에서는 매의 눈으로 허균을 주시하고 있었어. 하지만 그의 재주 때문에 울며 겨자 먹기로 허균을 중용 할 수 밖에 없었는데. 어떤 사연인고 하니.
 
허균 하면 홍길동전을 주로 떠올리지만 그는 단순한 베스트셀러 작가가 아니야. 뒤에 이야기 하겠지만 조선사회와 절대 절충 할 수 없는 사생활 문제 속에서도 허균이 살아 남을 수 있었던 것은 바로 붓 만 들면 끝내주는 글 들이 쏟아져 나왔기 때문이야.
 
광해군 일기에 다음과 같은 기록이 있어.
<글 쓰는 재주가 매우 뛰어나 수천 마디의 말을 붓만 들면 써 내려 갔다. 그러나 허위적인 책을 만들기 좋아하여 산수나 도참설과 도교나 불교의 신기한 행적으로부터 모든 것을 거짓으로 지어냈다.>
저 당시에는 사기꾼 소리도 들을 수 있지만 지금의 시각으로 보면 다방면에 걸친 풍부한 지식으로 다양하고 신선한 소재의 글을 자유자재로 쓸 수 있다라는 논평으로 바뀌지 않았을까? 막 붓 만 들면 해리포터나 왕좌의 게임 같은 글 들이 쏟아져 나온 거지. 부럽도다!
 
자 이제 허균이 조정의 부름을 받아 실력발휘를 한 현장으로 가 보자고.
조선시대에 수창외교라는 것이 있었다고 해.
전하 이제 곧 명나라 사신이 당도 하옵니다. 모든 준비는 끝마쳤지만 이번에도 또……”
어허 이 나라에는 그렇게 인재가 없단 말이냐? 또 그 골치덩어리 허균을 불러 들여야 한 다는 말이냐?”
그 자의 사람됨은 차마 입에 담기도 민망하오나 그 시 짓는 실력만큼은 당대 최고를 넘어 명 나라 사신들도 껌뻑 죽으니 어쩔 도리가 없습니다.”
요즘으로 치면 명 나라 사신과 조선의 관리가 시를 주거니 받거니 하는 일종의 랩 배틀 형식이 수창외교라는 이름으로 불리었어.
명나라 사신과 프리스타일 시를 하며 그 들의 지적 허영심을 채워주며 접대를 하는 건데 허균이 자리에 나가면 명 나라 사신들이 립 서비스가 아닌 진심으로 이렇게 말했다고 해.
어찌 조선 같은 작은 나라에 이런 사람이 있을 수 있나 해? 대단하다 해!’
라고 부라보를 연발하니 조정에서는 매번 허균에게 아쉬운 소리를 할 수 밖에 없었어. 이런 탁월한 능력으로 허균은 정3품 동부승지 (현 청와대 수석 비서관)을 역임함은 물론이고 후에 법무장관에 해당하는 형조판서까지 지내게 되었어.
 
그런데 20여 년의 관직생활 동안 6번이나 파직을 당하게 되는데 종교 문제뿐만 아니라 사생활 문제도 있었어.
허균이 해운판관이라는 자리에 있을 때 6개월 동안에 있었던 자신의 사적인 일을 기록한 조관기행이라는 책이 있는데, 여기에 엄청난 숫자의 기생 이름이 등장해. 그가 6개월 동안 만나고 친하게 지내던 기생들과의 일지라고 할 수 있어. 이런 걸 쓰는 건 자유지만 보관을 좀 잘 했어야 하지 않았을까?^^:
나리. 저기 요즘 세간의 시선이 너무나 안 좋습니다. 기생들과의 교류는 공직에 계시는 동안 제발 좀 자제 하심이 어떠실런지요? 아니 그러서야 합니다.”
 
너는 하나만 알고 둘은 모르는 구나. 남녀간의 정욕은 하늘이 준 것이고 인륜과 기강을 지키는 것은 성인의 가르침이다. 나는 성인을 따르기 위해서 하늘의 뜻을 어길 생각이 전혀 없다. 그리고 내가 항상 말하지 않았느냐! 불여세합! 나는 세상과 화합하지 못한다. 그 또한 하늘의 뜻이다.”
왠지 임진왜란 때 부인을 잃어서 허전한 마음을 달래기 만은 아닐 거 같아. 하지만 그가 육체적 쾌락에만 빠졌다고 보면 곤란해. 당시 기생들 중에는 뛰어난 시인과 음악과 들이 많았어. 허균은 천대받던 예술인들과 정신적인 교류를 하며 예술적 영감을 나누었던 거지.
 
이 당시 송도의 황진이와 쌍벽을 이루던 부안의 매창이란 기생이 있었어. 매창은 허균뿐만 아니라 당대의 문인들과 견주어도 뒤지지 않는 시 실력을 갖고 있었어. 그녀의 사망소식을 듣고 허균은 진심으로 슬퍼하며 그녀의 죽음을 애도하는 헌시를 지었다고 해.
 
그러던 1613년 허균의 인생을 송두리째 바꿔놓는 사건이 발생하는데 일명 강변칠우사건이 발생 하게 돼.
이어지는 이야기는 아래의 링크로
http://blog.naver.com/jy3180/22094823256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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