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토요일이었던가요, WBC 2017 쿠바와의 평가전 1차전을 시청하고 있었습니다.
투머치토커의 시구를 신호삼아 경기는 시작되었고,
쿠바 선수들이 긴 여행으로 피곤했는지
별 힘을 써보지도 못하더군요.
그에 비해서, 한국팀은 1회부터 아주 펄펄 날았습니다.
저는 야구경기를 시청하는 걸 평소 즐기는 편이 아닙니다.
다만, 캐스터와 해설이 수다떠는 걸 듣는 맛으로 야구를 시청하거든요.
임경진 아나운서와 대니얼 김이라는 해설, 그리고 투머치토커...
별 기대감도 없는 구성으로 보였습니다.
재미난 경기분석 따위는 아예 기대하지도 않았던 겁니다.
투머치토커의 뜬금포 인맥자랑과 대니얼 김의 자연건강식 같은 해설이 흐르고
간간이 임경진 아나운서의 국어책 진도나가기 같은 진행이 계속되었죠.
이러려고 내가 평가전을 봤나 싶은 자괴감이 엄습할 무렵,
자기들도 방송이 이대로 가면 안되겠다 싶었는지 경기 외적인 이야기를 들썩였습니다.
대니얼 김 해설이 투머치토커의 열렬한 팬이었다고
난데없는 고해성사를 시작하더군요.
(또 팬이네 뭐네 하면서 친분질이나 하겠군, 그래.)
내 머리속에서는 그 이후 이어질만한 대화내용이 돌아가기 시작했습니다.
'아, 그러셨어요? 감사합니다. 앞으로도 잘 부탁드립니다. 어쩌구저쩌구.'
그런데 분위기가 어째 심상치 않았습니다.
투머치토커가 자신에 대한 호의표시에 별 대꾸를 하지 않는 겁니다.
아무리 자신이 싫어하는 사람이라 해도
팬이라고 자처하면
그것도 공개적으로 방송 중에 그런 발언을 하면
마지 못해서라도 감사하다는 표시를 해주어야 하는데,
투머치토커의 아메리칸 마인드는 역시 다른 것인가 하는 의문이 들더군요.
대니얼 김 해설이 투머치토커 데뷔 첫 승 경기에 대해서도
세부적으로 언급했는데도 역시 투머치토커는 입을 굳게 다물었습니다.
희한한 일이 아닐 수 없었습니다.
투머치토커, 그에게도...
극성 팬에 대한 무슨 안 좋은 기억이라도 있는 것일까?
어느덧, 저의 상상은 고척돔구장 주변을 날아다니고 있었죠.
중간에 낀 임경진 아나운서도 민망했던지
대니얼 김 해설의 팬부심에 일조를 하기 시작했습니다.
같은 한국인으로서 가슴 뿌듯했다는 식의 어설픈 동조였더랬죠.
그래도 우리의 투머치토커는 묵묵부답이었습니다.
경기 내내 시구를 위해 입은 유니폼에 대한 감상을 잔뜩 늘어놓던
투머치토커였는데,
너무 이상하더라고요.
이대로는 방송까지 망치겠다 싶어서였는지
다급한 마음에 대니얼 김 해설이 필살기 하나를 시전했습니다.
"박찬호 해설께서는 현역일 때와 변한 게 하나도 없으세요."
아마, 그 나름대로는 무슨 반응이라도 이끌어내고 싶었던
몸부림의 결과물이었겠죠.
그런데, 제가 보기에도 안쓰러울 정도로 어설픈 칭찬이었습니다.
이제 고척돔에는 때아닌 한파가 몰아닥치겠구나 하는 생각이 드는 바로 그 순간!
"안 변하기는 뭐가 안 변했습니까!"
투머치토커의 신경질적인 항의가 튀어나왔습니다.
오호라, 이건 전혀 예상치 못한 그림인데?
침묵이 겨우 몇 초간 흘렀지만,
제겐 한 1분으로 체감되었습니다.
임경진 아나운서가 이러다 큰 일 나겠다 싶어 황급히 진화에 나섰습니다.
목소리가 무척 조심스러워지고 작아졌습니다.
"박찬호 해설께서는 본인의 어떤 점이 변했다고 생각하시는지... 말씀해주실 수 있겠습니까."
그리고 이어지는 투머치토커의 승부구
"엄, 일단, 말이 많아졌구요."
저는 그 이후 경기를 제대로 보지 못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