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희 하면 정승 정승 하면 황희 할만큼 황희는 조선초 재상계의 레전드인데 영의정 우의정 좌의정 그랜드 슬램을 달성한 양반임.
고려말에 음서로 관직에 등용되서 무려 14세 부터 관직 생활을 시작해서 태정태세 4임금을 모시고 87세에 벼슬에서 완전히 물러나기까지 사실상 평생을 국가에 헌신하였음.
흔히 황희 하면 야사 때문에 "그래 네말도 맞구나" 하면서 허허 웃는 이미지가 있지만 실제로는 강직한 보수주의자에 가까운 스타일로 조선을 통틀어 양대 천재 임금에 꼽히는 세종이 지나치게 혁신적인 스타일로 국정을 운영 하려 하면 옆에서 브레이크를 걸어주는 역할을 많이 했음.
오랜 관직생활과 6조 판서직을 모두 거친 전문성을 기반으로 세종시절의 기라성 같은 인재의 한가운데서 무게를 잡아주고 당대의 키보드 워리어들 사이에서 정책 토론이 과열되는 것을 막아주는데 큰 역할을 했을 것이라 함.
세종실록을 보면 황희가 있을때는 딱히 황희가 빛나 보이지 않지만 황희가 한번씩 (은퇴하고 싶다는데 안시켜줘서 삐치거나 할때) 업무를 놓을때 보면 국정 토론이 잘난 인물들이 다 한마디씩 하느라 난장판이 되는게 눈에 띈다고 함.
황희 정승의 외모에 대해서는 당대의 표현에 따르면 "하얀 수염을 휘날리는 노신선" 정도로 수렴하는데 막상 당시에 그려진 초상화는 눈빛이 날카로움.
야사에 따르면 눈빛이 장난이 아니라서 저 눈으로 노려보면 사람이고 동물이고 가리지 않고 쫄아서 죽어버렸다는 내용도 있으니깐 당시 사람들도 눈매가 무섭다고 생각했나 봄.
북방의 대호라고 불렸던 김종서가 황희 정승 앞에서 삐뚜름 하게 앉아 있다가 "저놈 의자 다리가 고장난거 같으니 고쳐줘라." 한마디에 정좌했다는 기록도 있으니 마냥 허허 웃는 정승은 아니었고 카리스마도 있었던듯.
다만 김종서에 대해서는 황희가 자기 후계자 쯤으로 생각하고 관직 초기 부터 일부러 많이 갈궈 가면서 가르쳤다는 내용도 있는걸 감안하면 투스타 달고 북방에서 사단장 하던 김종서가 나도 이제 사단장인데 하면서 약간 느슨한 자세로 있다가 옛날 선임이 한마디 갈구니깐 쫄아서 각잡은것에 가까울...수도?
황희와 세종과 성훌 이야기.
황희와 세종은 떼려야 떼놓을 수 없는 관계인데 황희가 우리가 흔히 알던 허허 영감만은 아니었던 것 처럼 세종도 마냥 자애로운 성군 + 인간을 벗어난 초인 인것 만은 아니었음.
특히나 말년에 세종은 은근히 고집불통의 모습도 많이 보여 줬는데 특히 일하기 싫다고 징징거리는 모습을 많이 보여줌. 근데 왕위 물려 주고 은퇴 하고 싶다고 할때 마다 세종때문에 은퇴도 못하고 죽을때까지 일하던 당대 신하들이 목숨걸고 막아서 세종도 은퇴 못하고 일에 치여 고통받음.
여하간 그러한 세종이 말년에 소현왕후도 죽고 아들둘 앞서 보내고 눈병에 당뇨에 몸도 아프고 망할놈의 신하들은 은퇴도 안시켜 주고 해서 맘에 괴로웠는지 불교에 많이 의지 하는 모습을 보여 줬었음.
지금이야 그게 무슨 문제? 하겠지만 당시 숭유억불 정책이 국가의 기본이었는데 왕이 불교에 관심을 쏟는다는건 중요한 정치적 스캔들에 해당했음. 뭐 그래도 워낙 세종이 성군이고 신하들이 세종을 존경하는 마음이 큰지라 왕궁에서 불교 행사 열고 하는건 뭐 그러려니 조용조용 넘어갔는데
세종이 결국 왕궁안에 불당을 짓겠다고 나섬. 결국 신하들이 이것만은 안된다고 벌떼 같이 들고 일어나서 말림. 근데 세종도 이건 양보하고 싶지 않은지 엄청 징징거림
뭐 그래 나 나쁜왕이다 어쩔래? 이거 좀 하자는데 그게 그렇게 맘에 안들어?
헐 님같은 성군한테 이런 소리 들을줄 몰랐어요. 님 30년동안 근속근무 훌륭하게 해놓고 이제 와서 왜 이러세요?
대충 이런류의 대화가 오가던 중에 신하들이 이것만은 안된다고 사표 제출하고 성균관 학생들이 파업을 선언 하고 등교를 하지 않는등 난리가 났음. 당시 성균관 학생들은 요즘의 데모랑 비슷하게 단체 휴학을 하는 경우가 종종 있었는데 주로 정부의 통치가 잘못되었다고 생각할때 (주로 유교적 관점에서) 반항의 의미로 행해졌음.
그러자 세종이 또 징징거리면서 "신하들이 날 버렸어... 내 말도 안듣고.. 난 이제 외로운 늙은이가 되었네?" 하면서 궁상을 떨고 결국 보다 못한 황희가 "어휴 제가 해결할게요." 하고 나서서 학생들을 설득해서 돌려 보냈다는 훈훈한.. 결말이 나지만
사실 신하들이 사표 낸것에 대해서 세종이 슬퍼한건 맞는데 성균관 학생들이 파업을 선언한데에 대해서는 세종이 엄청 빡쳤다고 실록에 기록되어 잇음.
대충 "이 개놈의 쉐키들 먹여주고 입혀주고 공부 가르쳐 줬더니 파업을 해? 나쁜놈의 쉐키들 다 잡아 가두고 주모자가 누군지 족쳐!!" 같은 느낌이었음.
그러자 또 신하들이 울고 불고 바짓가랭이 잡고 매달리면서 아휴 님 또 왜그래요? 평소에 안이랬잖아요. 애들인데 그러면 어떡해요. 님 그러면 안돼요. 하면서 말리고 세종은 그래 나 나쁜 왕이다. 어쩔래? 이는 동안
의금부는 왕명이 지엄하니 받들긴 받들었는데 그렇다고 이거 전땅크도 아니고 학생들 파업했다고 정말 잡아 가두고 고문할 수는 없는 노릇이니 최대한 천천히 시간 끌면서
아.. 저 그게 잡아 가둘려면 일단 절차가 .. 보자 오늘은 서류가 다 떨어졌네.
이러면서 버텨서 겨우 겨우 설득해서 성균관 학생들 다 잡아 죽이는건 막았다고 함.
여기 까지가 실록 이야기고
조선 중기 쯤 가면 이런 야사가 사실 처럼 퍼지는데 당시에 성균관 유생들은 워낙 유교적 원리 원칙을 중시 했기 때문에 죽더라도 파업을 철회할 맘은 없어서 문제 해결이 안되고 있었다고 함.
그래서 이 사태를 해결하기 위해 어쩔수 없이 신하들이 황희한테 SOS를 치니깐 황희가 놀랍게도 여든이 다 된 노구에 비틀비틀 거리며 학생 들의 집을 찾아가 문두드리고는 자네 다시 학교 나오면 안되나? 하고 묻고 다니니깐
학생들 입장에선 기저귀 차고 다닐때 이미 유배까지 갔다온 정치계의 레전드가 찾아와서 그렇게 까지 얘기 하니깐 파업이고 뭐고 몸둘바를 몰라서 결국 휴학이 유야 무야 되었다고 함.
조선조 임금들의 자식사랑.
1.
흔히 권력자 하면 비정한 이미지가 강하기 마련
조선도 예외는 아니라서 삼촌이 조카를 몰아내고 왕위를 차지 하는가 하면 왕위를 물려 받기 위해 형제들을 다 죽이고 아버지와 원수를 지는 일도 있었음.
대표적인 비정한 왕 태종도 자식 사랑은 남일이 아니라서 아직 왕자의 난이 있기 전 정안군이던 시절
입지는 불안하고 언제 숙청 당할지 몰라 조마조마 하니깐 첫째 아들은 외가에 맡기고 둘째 아들도 남한테 맡기고 젖먹이 셋째 아들만 눈치 봐가면서 집에서 키우고 있었는데 당시에 불안한 정안군의 마음을 씻어 준게 바로 그 셋째 아들 이었다고 함.
눈으로 보진 못했지만 밖에 나가서 정도전한테 괄시 받아 가면서 축쳐져서 혹은 마음 속으로 분노를 삭히며 집으로 들어와서는
아빠 왔다 하면 젖먹이가 엉금 엉금 기어서 아빠 찾아 품으로 들어오고 옆에서 엄마는 그 모습을 훈훈하게 바라보는.. 뭐 그런 어느 집에나 있는 모습이 그집에서도 연출 되지 않았을까?
그리고 훗날 정안군은 태종이 되고 셋째 젖먹이는 세종이 됨. 세종에게 자리를 넘겨 주던날 태종이 말하길
"얘 이리 와서 옥새 받아가렴."
캬.. 그 옥새가 뭔지 옥새를 차지 하기 위해 아버지랑 원수가 되고 형제들 다 죽이고 수도 없이 손에 피를 묻혔지만 아들에겐 선뜻 내어 주는것. 그게 아버지 마음이었을까?
뭐 그러고 나서 아들 처가는 또 싸그리 죽이긴 했지만... any way
2. 중종도 자식 사랑 하면 빠지지 않는 임금이라 당시 자식들이 결혼하면 왕궁에서 분가해서 집을 지어 줬는데 중종은 유독 지나치게 화려한 집을 지어 줘서 신하들한테 국고 낭비니 뭐니 안좋은 소리를 들었지만 굴하지 않았음.
야사에 따르면 세자궁에 불이 났는데 세자가 아직 못나왔다는 소리를 듣자 임금 체면이고 뭐고 맨발로 뛰어가서 "백돌아. 백돌아." 하고 애타게 불렀다는 일화도 있음.
그런 중종 딸사랑도 유별나서 효정옹주를 품에 싸고 돌았는데 나중에 효정옹주가 시집을 가게 되었음. 그런데 그 남편 놈이 사실 좀 나쁜 새끼라 효정옹주를 권력을 잡기 위한 일환으로만 생각하고 결혼하고 나서는 몸종 풍가이를 총애하고 효정옹주는 뒷전이었으니
중종이 그 꼴을 못봐서 사위 불러서 갈구고 풍가이는 귀양도 보내고 이랬는데 효정옹주가 얼마나 착한 사람이었는지 그러지 말고 풍가이 도로 데려오세요... 해서 남편이랑 풍가이가 바람 피는걸 보고도 못본척 해주었다지.
그래도 이 남편놈이 정신 못차리고 나중에 효정옹주가 아이를 낳다가 위급한 상황에 빠지자.. 일부러 의원을 안부르고 시간을 끌어서 효정옹주가 죽게 만듬. 죽고 나면 풍가이랑 오순도순 살수 있을거라 생각했을까..
어쨌든 그 소리를 들은 중종은 울고 불고 길길이 날뛰며 저새끼를 잡아 죽여야 한다며 화를 내었음. 실록에 따르면 그걸 말리러온 신하들을 붙잡고 하소연을 늘어 놓는데 대충
아이고 내딸이 어떤 딸인데. 그렇게 이쁘고 착한 내 딸을 저놈이 구박을 하고 ㅠㅠ 내가 그렇게 당하고만 살지 말고 화도 내고 혼도 내라고 했는데 우리 애가 너무 착해서 그것도 못하고.. 사위 저놈이 내 딸죽이고 풍가이년인지 뭔지 끼고 살려고 일부러 죽인거다.
뭐 이런식이었음. 어휴.. 그래도 당시 법이 있으니 법대로 처리해야지 왕명으로 함부로 할 수는 없는지라 곤장떄리고 귀양보내는 선에서 마무리 지어야 했으나 그 아버지 맘이 어땠을지는 참...
3. 수백년뒤 마흔 여덟의 영조는 학부형이 됨. 세자가 드디어 8살이 되어 성균관에 입학하게 된거임. 그러자 첫 학부형이된 영조는 너무 기쁜 나머지 팔불출이 다돼서 이번 입학식이 역대 최고의 입학식이 되야 한다는둥 당장 당대 최고의 학자를 모셔서 성균관에 넣어야 한다는둥 내가 촌지 계의 레전설을 쓰겠다며 전국을 다 뒤져서 예물을 준비해오고 학자들을 들볶고 신하들을 들볶고
성균관 학생들도 후줄근 하게 있지말고 내가 쌈박하게 제복하나 만들어서 돌릴테니깐 제복 디자인부터 생각해 보라는둥
요즘 초보 학부형들이 첫자식 초등학교 보낼때 옷사주고 가방사주고 신이나서 학용품 고르는 거랑 다른바 없는 모습이었음.
다만 그 아이가 훗날 사도세자가 되지만...
정조임금과 술.
조선시대에는 야간통행금지법이 있었는데 1. 해지고 나면 사대문을 딱 닫아 걸고 쥐도 새도 못움직이게 했었는데 어느날 밤 훈련도감의 순라꾼이 야간 순찰을 도는데 궁궐 담벼락 밑에 왠 허연것이 척하고 붙어 있었음.
그래서 순라꾼이 놀란 가슴 달래며 조심조심 다가가서 슬쩍 건드려 보니 술에 쩔어서 노상 취침을 하고 계신 성균관 유생이었음.
썰인 즉슨 이 유생은 술을 너무너무 좋아하는데 성균관 기숙사에서 살고 있었음. 기숙사도 통금이 있다 보니 술을 마실꺼면 빨리 마시고 기숙사 문닫히기 전에 들어가야 했는데 그날 급한 마음에 너무 빨리 달리다 보니 필름도 끊기고 인사불성이 되서 하필 궁궐 담벼락에 붙어서 잠이들고 만거임.
한날 영조가 신하들 데리고 종묘로 인사드리러 가려던날 야 날씨도 좋고 신하들도 뒷 따르고 기분좋게 출발하려던 찰나 한 신하가 그 종묘보다 숙빈 최씨(영조 엄마) 묘부터 찾아가야 하지 않나요? 라고 질문을 함. 뭐 원래 조선시대때는 신하들이 이리저리 태클걸기 마련이라 그냥 평범한 태클이었는데 갑자기 영조가 급 슬퍼하면서 아오 나같은건 연못에 빠져 죽어야해 ㅠㅠㅠㅠㅠㅠ 라면서 울고 불고 연못으로 뛰어가는걸 신하들이 붙잡아서 겨우 겨우 말렸다고 함.
두번째는 영조는 평생을 꾸준히 후궁을 뽑았는데 영조가 워낙 오래 살다 보니 말년에는 나이 차이가 50살이나 되는 후궁을 들였다고 함. 캬... 그래서 그게 선비들 사이에서 은근 화제 거리가 되엇는데
이현필이라는 어떤 선비가 그걸 과거 시험 답안지에서 아 요새 전하 체통머리 없이 궁녀 너무 많이 뽑지 않음? 체통좀 지키시지 하고 깠음.
조선시대에는 과거 답안지를 왕이 직접 읽어 봤는데 이걸 읽던 영조가 아오 시발 내가 왕인데 ㅠㅠㅠ 시발 궁녀 뽑는걸로도 지랄을 하네 ㅠㅠㅠ 내가 나가 뒤지든지 해야지 하고 또 눈물을 흘림.
이렇게 두번 울었음. 참고로 이현필은 과거 붙고 바로 좌천 돼서 얼마 후에 짤림 ㅇㅇ
영조는 갑술년 갑술일 갑술시에 태어 났음. 그러니깐 11년 11월 11일 11시 에 태어난 사갑술생. 요새로 치면 주민번호 가 111111 - 1xxxxxx 인셈. 영조도 이게 신기했던지 자기랑 같은 사갑술생들은 뭣들 하고 사나 궁금해했다고 함. 그래서 어느날 수소문 해 보니 강원도에서 양봉하던 어떤 노인이 불려옴.
근데 불러 놓고 보니 뭐 풍채도 초라하고 별볼일 없던지라 영조가 좀 실망해서 "야 난 왕하는데 넌 왜 그러고 사냐..?" 라고 심드렁하게 묻자
그 노인이 "즈언하. 제 자식이 여덟인데 이것은 전하의 조선 팔도와 같고, 벌통은 전하의 고을 수와 같으며 키우는 벌이 천만인데 이는 전하의 백성 수와 같습니다."
하고 Po우문현답wer을 시전!
영조가 그제서야 캬아 그래야 내 동기 답지 하며 상을 내렸다는 훈훈한 이야기가....
이런 영조는 나이를 먹으면 먹을수록 꽁생원 처럼 변해 가는데 신하랑 추운 겨울날에 국정 가지고 실랑이 하다가 신하들이 말을 안들으니깐 갑자기 빈정이 확 상해서
야 이 ㅅㅂ 내가 왕인데 어? 니네가 어? 나를 어? 무시를 하고 내가 이대론 살수가 없다. 내 차라리 죽고 말겠다.
이러면서 궁궐내 호수의 얼음을 깨고 입수를 시전함. 당연히 신하들이 기겁해서 영조를 끌어 내려 했지만 도무지 들어 먹질 않음.
삼정승까지 바짓가랑이 걷어 붙이고 달려들자 오히려
"나 죽으려는데 말리는 놈은 대역죄인이다."
이러면서 말도 안되는 고집을 부림. 신하들은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발만 동동구르고 있다가 한참을 몸을 담그고 있던 영조가 갑자기 또 삐지더니
"야!! 니들은 왕이 죽겠다는데 말리는 놈이 하나도 없냐? 응? 다 귀양 머겅 두번 머겅!!"
그러고 그냥 제발로 걸어서 나옴. 아마도 한겨울이었으니 자기도 추웠겠지.
어쨌거나 저쩄거나 왕이 까라면 까야 되는 법이고 억울하거나 말거나 한숨쉬면서 신하는 귀양을 감. 근데 귀양지에 도착해보니 선전관이 먼저 와서 대기 타고 있다가
어명이오. 대감 복권 되었으니 다시 입궐 하시랍니다.
그래서 귀양지 찍고 턴해서 다시 한양으로 돌아옴.
숙종 성깔 이야기.
숙종 임금 하면 조선의 19대 임금 이자 장희빈 남편 걔.
장희빈이 워낙 사극에 최적화된 이야기라 사극에 여러번 출연 하셨지만 장희빈이 주연이고 숙종께선 주조연 급이라 그냥 우유부단하고 뭐 그런 이미지로 많이 나왔는데
실제로는 치마폭에 둘러싸인 유약한 왕이라기 보다 조선이씨가문의 역대급 성깔남이자 환국을 유도해서 왕권 강화를 시도한 정치 고단수에 가까웠음.
숙종의 성깔에 대해 얘기 하자면 어릴때 부터 성깔 드런걸론 유명해서 궁녀들이 옷입혀주고 머리빗겨 주고 하면 어찌나 썡난리를 치는지 결국 궁녀론 카바가 안돼서 대비마마가 직접 불러다 앉혀 놓고 옷입혀 주고 머리 빗겨 주고 했다고 함.
근데 이게 당연히 돈도 많이 들고 성리학하는 신하들 눈에는 좋게 안보이는 지라 신하들이 불꽃 놀이좀 그만하라고 난리를 치니깐 고민하던 성종의 신의 한수를 내림.
불꽃놀이 전담 부서를 호조(지금의 국방부)로 옮겨 버림 그러고 씬나게 불꽃놀이를 즐기다가
누가 님 불꽃놀이 이거 놀려고 하는거 아님? 이러면
아니거든요? 아니거든요? 이거 군사 훈련 하는거거든요? 완전 나라에 도움 되는거거든요?
하고 계속 즐겼다고 함.
성종 하면 또 유명한 표현이 낮에는 요순, 밤에는 걸주. 라고 하는데 이것도 다 그당시의 성리학의 교조주의 탓이라 할 수 있음. 어느 정도였냐면
매사냥도 못하게 해 불꽃 놀이도 못하게 해 그나마 서예는 유교에서도 권장하는거니깐 하고 어느날 현판 하나를 친히 멋드러 지게 써서 내려준적이 있는데
이 신하놈들이 그거 가지고도
아니 전하! 지금 때가 어느땐데! 그거 쓸시간에 국정을 돌보고! 유학공부를 더했으면 지금쯤 태평성대가 오고... 어쩌구 저쩌구
듣다 듣다 빡친 성종이 하.. ㅅㅂ.. 그래 때려치자 ㅋㅋㅋ 와나 이새끼들! 하면서 자기 손으로 현판을 때려 부수기 까지 함.
근데 그런 성종에게 남은 유일한 오락거리가 있었으니...
조선에선 왕이 뭐만 하면 못하게 하고 반대하고 못살게 굴었는데 딱 한가지 여색을 탐하는 것 만은 ㅇㅇ 자손 많이 남기고 좋지 뭐. 이런 반응이었음.
그래서 성종은 스트레스는 쌓이는데 풀길은 없고 이건 말리는 사람도 없고 오히려 권장해주기도 하니깐
나는야 낮에는 조선의 임금 그러나 밤에는 밤의 황제 모드로 돌입.
25년동안 무려 세명의 왕후와 아홉명의 후궁을 맞아 12남 16녀를 낳았음. 캬.. 우리 성종느님 복분자 좀 자신듯.
자식들이 얼마나 많았는지 그 넓은 궁궐에 방이 모자라서 나중에는 궁밖에 전셋집을 빌려서 거기서 살게 했다니 말다했음.
아 후추 얘기 안했네.
왕 이름에 붙는 '성종' 이란 시호는 어마어마하게 좋은 시호인데 그 통치잘하기로 소문난 세종도 죽고 나서 성종으로 할까 세종으로 할까 신하들이 다투다가 아 성종은 너무 오바라니깐요. 해서 세종으로 결정되었을 정도.
근데 성종한테는 만장일치로 성종 줍시다. 해서 성종됨.
하여튼 이렇게 나라를 잘 다스렸고 이것저것 많이 한만큼 언제나 재정이 부족했는데 국고를 채우기 위한 신의 한수가 후추였음.
후추 하면 왠지 대항해시대 떠오르고 막 유럽에서 인도 갈거 같고 하지만 동아시아 일대에서도 후추를 매개로한 무역이 꽤 돈이 되었나봄.
국고 모자람 -> 후추 돈됨 -> 야 그래 후추를 키워서 팔자.
이렇게 해서 성종이 후추씨를 구할려고 백방으로 노력을함. 성종실록에 보면
일본에서 님들 대장경 좋은거 많던데 저희 한개만 주시면 안되요? 하니깐 성종이 야 그거 달라는 대로 줄테니 후추씨좀 구해주라.
이런 기사도 있음.
그러나 그런 노력에도 불구하고 정작 구해달라는 후추씨는 못구하고 주변국가에
야 조선 국왕이 그렇게 후추 덕후 라며? 후추 주면 졸라 좋아한대.
하는 이상한 소문만 퍼져서 이놈의 사신들은 올때 마다 후추를 가져와서
헤헤.. 님 이거 좋아하신다던데..
쓸데 없이 창고에 후추만 쌓여갔다고 함.
결국 궁궐내가 후추냄새로 진동을해 머리가 아플지경이 되자 성종은 후추를 예쁜 비단 주머니에 담아서 조정 대신들 전원에게 하사해서 창고를 비우고 후추 장사는 접었다고 함.
세줄요약. 성종 스트레스 받음 야 조선시대의 다산왕이 나다! 후추장사좀 해보려고 했는데 루머만 생기고 실패. ㅠㅠ
정약용과 정조.
정조 임금과 정약용 하면 소울메이트나 다름 없는데
아까 글 쓴것 처럼 정조 임금은 술만 마셨다 하면 끝장을 보는 스타일인데 반해 정약용은 술을 엄청 못마셨다고 함.
근데 정조는 맨날 정약용 불러다 앉혀 놓고 술퍼 먹이면서 즐겼다고 함.
어쭈 야 너 지금 왕이 한잔 마시는데 넌 안마시냐? 바닥에 깔지 마라 내가 다 검사 한다.
뭐 이런느낌?
당연히 술 못마시는 정약용 한테는 이게 엄청 수뜨레쓰 였음 지금으로 치자면
지식인 님들 자꾸 상사가 회식자리에서 술 억지로 마시게 하고 못마신다고 하면 갈구고 필통에 술받아 마시라고 하고 이러는데 어떻게 해야 하죠? 노동청에 신고해도 상사가 되게 높은 사람이라 안받아 줄거 같은데 ㅠㅠ
이런 느낌이었을까?
하여튼 그렇게 스트레스 받다가 정약용이 어느날 그날도 정조의 갈굼에 취하도록 술을 마시고 술김에 정조한테 따지고 듬.
제에발 그만들좀 하세요! ㅠㅠ 저 진짜 술 못먹겠어요. 맨날 꽐라되고 왜 이렇게 먹여요. 저는 전하의 뭐죠? 전 그저 전하의 장난감인가요?
그러자 정조가 그말을 곰곰히 듣더니
그래? 야 미안하다야. 그럼 우리 술게임 해서 지는 사람만 마시기로 하자. 언문으로 시짓기 어때? 콜??
하지만 정조는 조선 이씨 가문 양대 천재중의 하나로 조선 왕들은 경연이라고 해서 관리이자 유학자였던 신하들에게 매일 아침마다 수업을 듣는게 일과에 있었는데 조선 역사상 전국 팔도에서 가려 뽑은 유학자들을 상대로 경연에서 수업을 받는게 아니라 수업을 할만큼 뛰어난건 세종과 정조 밖에 없었음.
그런 당대 최고 지식인 정조를 상대로 정약용은 술게임에서 연전연패를 할 수 밖에 없었고 원래는 같이 꽐라가 되는 사이였다면 그날은 정약용 혼자 꽐라가 되고 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