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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의 3대 대전 중 하나, 비수대전(淝水大戰) - 完
게시물ID : history_13156짧은주소 복사하기
작성자 : Belisarius
추천 : 30
조회수 : 2304회
댓글수 : 2개
등록시간 : 2013/12/23 04:48:47
앞의 내용은 1부 참고 : http://www.todayhumor.co.kr/board/view.php?table=history&no=13142&s_no=13142&page=1
 
 
 
 
서(朱序)로부터 첩보를 귀띔받은 사석(謝石)과 사현(謝玄)은 즉각 낙간(洛間)의 전진(前秦)군을 공격할 것을 명했다.
 
 
낙간(洛間)의 전진(前秦)군이 그 선봉대라는 것도 알았거니와, 낙간(洛間)만 무너진다면 협석(硤石)에 고립되어 있는 호빈의 병력과도 합류할 수 있었을 터였다.
 
 
이 막중한 임무를 맡은 장수는 동진(東晉)의 맹장으로 불리우던 유뢰지(劉牢之)라는 장수로, 그가 이끄는 병력도 북부군(北部軍)이라 불리우는 정예병들로 구성된 동진(東晉) 최고의 정예부대였다. 이번 공격에 전쟁의 사활이 걸려있는만큼 총사령관 사석(謝石)도 최상의 패를 꺼낸 것이다.
 
 
기습은 밤에 이루어졌다. 몰래 비수(淝水)를 건너 낙간(洛間)으로 잠입해가는데에 성공한 유뢰지(劉牢之)는 바로 전진(前秦)군의 진영을 들이쳤고 야밤의 기습이었던지라 거의 무방비 상태였던 전진(前秦)군의 진영은 순식간에 뚫리고 만다.
 
낙간(洛間)을 수비하던 전진(前秦)의 장수, 양성(梁成)은 잠결에 일어나 허둥대다가 날아든 유뢰지(劉牢之)의 칼에 목숨을 잃었고 우두머리를 잃고 우왕좌왕 하는 전진(前秦)군도 대패하여 달아나 동진(東晉)군은 대승을 거둔다.
 
 
11월, 사현(謝玄)이 광릉상(廣陵相) 유뢰지(劉牢之)를 보내니, 정예병 5천여명을 거느리고 곧장 나아가 낙간(洛間)으로 진격해 진병(秦兵)들을 대파하였다. 양성(梁成)과 왕영(王詠)을 참살하고 군사를 나누어 뱃나루를 차단하고 도망가는 진병(秦兵)들을 크게 물리쳤다. 진(秦 : 전진)의 보졸(步卒)과 기병이 붕괴되어 앞다투어 회수(淮水)로 도주하였다. 죽은 자가 1만 5천명이었으며, 양주자사(楊州刺史) 왕현(王顯)을 사로잡고 무기와 군량 등을 거두어들였다. - 자치통감
 
 
전진(前秦)의 병력은 기습해온 동진(東晉)의 병력에 비해 갑절 이상이었거니와, 더구나 강을 도하하는 적을 막는 쪽으로, 전략적 상으로도 상당히 유리한 위치에서 싸우는 입장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유뢰지(劉牢之)와 동진(東晉)의 정예부대, 북부군(北部軍)의 저돌적인 돌파력에 의해 붕괴되고 만 것이다. 
 
 
동진(東晉)군에게는 사기도 올려주고 분산되어 있던 병력도 다시 합류하게 되었으며 무엇보다 승승장구하던 전진(前秦)군의 선봉을 격파함으로서 주서(朱序)가 말한대로 그 기세를 꺾을 수 있었던 중요한 전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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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진(東晉)의 명장, 사현(謝玄).
 
재상 사안(謝安)의 조카이기도 하다. 비수대전 이후 구국의 영웅으로 추앙받으며 고위직을 역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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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진(東晉)의 반격로.
 
낙간(洛間)에서의 승리로 동진(東晉)군은 팔공산(八公山)까지 진격했다.
 
 
 
 
동진(東晉)의 선봉장, 사현(謝玄)은 그 기세를 몰아 팔공산(八公山)까지 진격하여 그 곳에 진영을 차리고 주둔했다. 곧이어 당도할 전진(前秦)의 본군을 맞이하기 위함이었다.
 
 
한편 낙간(洛間)의 병력이 무너졌다는 소식을 들은 전진(前秦)의 황제, 부견(苻堅)은 펄펄 뛰며 대노한다. 개전 초반부터 계속해서 수세로 몰려 거의 죽어가던 동진(東晉)군에게 제대로 어퍼컷을 얻어맞았으니 체감상 느껴지는 그 아픔도 배가 되었던 것이다.
 
 
화가 난 나머지 부견(苻堅)은 점거하고 있던 수양성(壽陽城)의 망루에 올라 팔공산에 진영을 내린 동진(東晉)군의 동태를 직접 살펴보고자 했다.
 
 
그러나 내심 기대했던 것과는 달리 부견의 눈에 들어온 광경은 마치 부견에게 보라는 듯이 엄중히 정돈된 진영과 빼곡히 둘러친 목책들, 그리고 우뚝 솟은 망루들이었다. 더구나 산 아래에 진영을 차렸기에 그 풀숲에 가려진 동진(東晉)군의 숫자도 가늠할 수 없었다. 마치 팔공산 일대가 동진(東晉)의 군사로 가득찬 것처럼 보였을 것이다. 
 
 
이를 본 부견은 탄식했다.
 
 
"이들 또한 강한 적인데, 어찌 약하다고 했는가!"
 
 
내심 위협을 느끼기 시작한 것이다.
 
 
 
 
이윽고 운명의 시간은 다가와, 전진(前秦)의 본군은 비수(淝水)에 도착했다. 다만 강을 건너지는 않았고 강편에 머무르며 도전해오는 동진(東晉)군을 맞으려 했다.
 
 
사현(謝玄)의 동진(東晉)군도 비수(淝水)로 접근해 진영을 내리니 양국의 병력은 비수(淝水)를 사이에 두고 대치하는 형국이 되었다. 이른바 회전(回戰)의 구도로 양측이 위치한 것이다.
 
 
이렇게 강을 사이에 두고 양측이 위치한 구도라면 먼저 공(攻)을 취하는 쪽은 강을 건너야 하는 리스크를 감당해야만 한다는 단점이 있는 반면에 방어하는 입장에서는 도하하느라 버벅대는 적군을 일격에 소탕할 수 있는 이로움이 있었다.
 
 
즉, 어느 쪽이든 먼저 공격하건 간에 본격적으로 전투를 벌이기 전부터 핸디캡 하나를 얹고 시작해야 했기에 양측은 쉽사리 선공을 취할 수 없었던 것이다.
 
 
 
여기서 사현(謝玄)은 부견(苻堅)에게 서신을 보냈다.
 
 
 
"그대의 군사들은 깊이 들어왔는데 강가 옆에 진을 치니, 이는 곧 지구전의 계책이고 속전속결의 뜻이 아니구려. 만약 그대가 진영을 옮겨 군사를 조금만 뒤로 물려준다면 우리의 병력이 그쪽으로 넘어갈 수 있을 것이오. 그때 승부를 결정하는 것이 어떻소?" - 자치통감
 
 
 
기록대로다. 이렇게 서로 선빵날리기를 주저하니 차라리 너희가 뒤로 빠져서 우리가 들어올 공간을 마련해주고 거기서 승부를 보자고 하는 것이다. 여기서 이런 의문을 품을 수 있다.
 
 
가뜩이나 병력에서 열세인 쪽에서 상대가 넘어오길 바라기도 모자랄 판에 왜 먼저 넘어가서 싸우자고 덤비는가?
 
 
어찌보면 주객이 전도된 꼴이었다. 공격해온 쪽은 지구전을 펼치려 하고 오히려 방어하는 측에서 속전속결로 끝내자고 덤비고 있으니 말이다.
 
제 아무리 낙간(洛間)에서 대승을 거두었다고 해도 백만에 가까운 전진(前秦)군에게 그 손실은 미약했다. 여전히 전진(前秦)군은 건재했으며 강을 건너서 그들과 전면전을 벌인다는 것은 자살행위나 다름없는 짓이었던 것이다. 사석(謝石)과 사현(謝玄)이 바보가 아닌 이상 그런 짓을 벌일 리 만무했다. 분명 어딘가 믿는 구석이 있었던 것이다.
 
 
 
사현(謝玄)의 서신을 받아본 부견(苻堅)은 응하기로 한다. 그러자 전진(前秦)의 장수들은 모두 하나같이 반대하며 분명 동진(東晉)에게 무슨 꿍꿍이가 있을 것이라고 주장하며 그런 부견을 말렸다. 저들 눈에도 뭔가 이상했던 것이다.
 
그러나 부견은 오히려 웃으며 말했다.
 
 
"군사를 이끌고 뒤로 물러나는 척하다가 저들이 강을 반쯤 건넜을 때 철기(鐵騎)로 들이닥쳐 쫓아가 모두 죽여 없앨 것이다. 그러면 승리하지 못할 것도 없지 않은가?"
 
 
부견도 통일전쟁을 치루며 전장에서 늙은 노련한 사람이었다. 동진(東晉)군의 속셈이 뭔지는 몰라도 되려 그것을 역이용하려 했던 것이다.
 
 
도하하는 때만큼 적의 공격에 노출되기 쉬운 때는 없다. 그리고 적이 도하하는 것을 뻔히 봐주고 있을 무지몽매한 군사가 어디 있단 말인가?
 
 
오히려 부견은 사현(謝玄)을 비웃었을 것이다. 적을 믿는 바보도 있구나 하면서. 내가 정말 그 어처구니 없는 요구를 들어줄 것이라 생각했냐면서.
 
 
 
부견의 응답에 동진(東晉)군은 비수(淝水)를 건너기 시작했고 전진(前秦)군은 요구대로 진영을 해체하고 뒤로 물리기 시작했다.
 
 
그러던 찰나에, 참으로 믿을 수 없는 일이 벌어진다.
 
 
"아군이 패했다! 진(秦)의 군사가 패했다!"
 
 
이와 같은 말을 외치고 다니며 최후방의 병력을 동요하게 만든 이는 앞서 동진(東晉)군에게 전진(前秦)군의 정보를 흘려준 주서(朱序)였다.
 
 
전진(前秦)의 장수가 이 무슨 짓인가 싶겠지만 애시당초 주서는 동진(東晉)의 신하가 된지 오래였다.
 
 
어찌된 일인가 하니, 전에 부견의 명령으로 항복을 권유하는 서신을 가지고 동진(東晉)군의 진영으로 찾아갔을 때부터 주서는 이미 동진(東晉)으로 귀순했었다. 첩보를 일러준 것도 그렇고 또 원래 출신이 동진(東晉)의 항장출신이었고 자기 스스로도 동진(東晉)의 신하라 여기고 있었다.
 
 
그랬기에 동진(東晉)의 진영에 항복을 권유하는 사자로 찾아갔을 때부터 사석(謝石), 사현(謝玄)과 함께 모의하여 이러한 일련의 계획들을 세웠던 것이다.
 
 
주서 자신이 후방에서 적을 교란할 것을 자청했고 사현도 이를 믿고 호응하기로 하여 혼란에 빠져 거짓 패전소식에 우왕좌왕하는 전진(前秦)군을 들이치기로 약속했던 것. 이것이 동진(東晉)군이 적은군세로도 과감하게 비수(淝水)를 건넌 이유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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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까지의 비수대전(淝水大戰) 전황도.
 
 
주서(朱序)의 작전은 주효해, 주서가 말을 타고 달리면서 외쳐댄 패전소식에 후방의 전진(前秦)군은 술렁이더니 곧 크게 동요하기 시작했다. 말의 진위여부를 가릴 것도 없이 그냥 두려움부터 앞섰던 것이다.
 
 
그 파급효과는 엄청나 메마른 들에 불이 번져나가듯 순식간에 전진(前秦)군 진용 전체로까지 퍼져나가 전진(前秦)군 전체가 공포에 질려 대혼란이 일기에 이른다. 동요한 나머지 대열은 이미 무너져 앞다투어 병사들은 죽을 둥 살 둥 도망가기에 바빴고 장수들은 이를 진압하고자 동서분주 바쁘게 돌아다니느라 정신없었다. 한마디로 개판이 된 것이다.
 
 
참으로 예상치 못한 어처구니 없는 전개에 부견(苻堅)도 적잖이 당황한다. 거짓퇴각하다가 진짜로 퇴각하게 생겼으니 말이다. 제장들을 다그쳐 병사들을 속히 제압하라 하는한편 자신도 직접 병사들을 진압하고자 이리저리 말을 달리고 다니던 차에,
 
 
 
바로 그때 뒤에서 강을 건너던 동진(東晉)군이 빠른속도로 몰아쳐오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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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요하여 도주하는 전진(前秦)군을 공격하는 동진(東晉)군.
 
 
 
 
전투라기보다는 차라리 학살에 가까운 일방적인 싸움이었다. 전진(前秦)군은 이미 전의를 상실한지 오래였기에 동진(東晉)군은 그런 전진(前秦)군을 죽이며 추격했다.
 
 
대혼란 속에 앞다투어 달아나는 전진(前秦)군은 그 바람에 넘어져 저들끼리 밟혀죽은 숫자만해도 부지기수라고 했다. 수십만 규모의 대군이 순식간에 무너지니 그럴만도 하다.
 
 
이 난전 중에 부견의 동생이자 전진(前秦)군의 총사령관, 부융(苻融)은 전사했고 심지어는 부견도 날아온 화살에 몇대 맞는 수모를 당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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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에 그려진 <사현파진백만대병도(謝玄破秦百萬大兵圖)> 병풍도.
 
그림의 제목 뜻은 '사현(謝玄)이 백만의 진병(秦兵)을 깨뜨리다' 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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왼쪽이 전진(前秦)군이고 오른쪽이 동진(東晉)군이다. 병사들과 장수들의 표정에서도 보이듯이 전진(前秦)군은 다들 겁에 질린 기색들이고 반면에 동진(東晉)군은 승세를 탄 의기양양한 표정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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팔공산의 동진(東晉)군 진영을 묘사한 부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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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잡한 난전을 묘사한 장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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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학 울음소리에도 동진(東晉)군이 추격해온 줄 알고 놀랐다는 전진(前秦)군에서 비롯된 고사성어인 '풍성학려(風聲鶴唳)' 를 나타낸 부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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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위에 붉은 곤룡포를 입고 말을 달려 도망가는 사람은 부견(苻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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으앙! 졌음ㅠㅠ
 
 
 
사현(謝玄)과 사염(謝炎), 환이(桓伊) 등이 군사를 인솔하여 강을 건너서 공격했다. 부융이 진지를 순행하면서 군사들을 통솔하고자 했으나, 진병(晉兵)들에게 패해 죽었다. 사현이 승리한 기세를 타고 추격하여 청강(靑岡)에 이르렀다. 진병(秦兵)들 가운데 서로 짓밟혀 죽은 자가 들판을 덮고 개울을 메웠다. 바람소리나 새 울음소리만 듣고도 모두 진병(晉兵)이 추격해온 것으로 여겨 밤낮을 쉬지 않고 풀숲을 헤치고 이슬을 맞으며 걸었으니, 굶주리고 얼어서 죽은 자가 열에 일곱 여덟이었다. - 자치통감
 
 
 
동진(東晉)군은 패주하는 전진(前秦)군을 30여리나 더 쫓아가고 나서야 추격을 그만두었다고 한다. 그리고 전진(前秦)군은 윗 기록대로 처참한 몰골로 도망갔고 돌아간 이는 얼마 되지 않았었다.
 
 
 
당장이라도 모든 것을 잿더미로 만들 기세로 남하해왔던 전진(前秦)의 97만 대군은 이 비수대전 한판 싸움으로 말그대로 '개박살' 이 나 쫓겨갔고 불과 8만의 병력으로 맞섰던 동진(東晉)은 대승을 거두게 된다.
 
 
 
사석(謝石)과 사현(謝玄)은 이 승전보를 바로 조정에 보고했고, 조정에서도 재상 사안(謝安)에게 파발마를 띄워 알렸다.
 
 
그때 사안(謝安)은 한가롭게 집에 찾아온 손님과 바둑을 두고 있었다고 한다. (동생이랑 아들, 조카는 전쟁에 내보내고 정작 자기는 바둑질?)
 
 
하지만 조정에서 보낸 서신을 받아본 사안(謝安)은 의외로 담담했다고. 이에 관련된 일화를 소개해보면..
 
 
손님이 묻는다.
 
 
"무슨 서신입니까?"
 
 
사안(謝安)이 대답했다.
 
 
"자식놈들이 적을 물리쳤다는군요."
 
 
별 특별한 소식도 아니라는 듯 응수하는 사안이었지만 바둑돌을 든 손이 심하게 떨리고 있었다.
 
 
"악수(惡手)를 두셨습니다 그려."
 
 
손님의 지적에 사안이 웃으며 말했다.
 
 
"이런 소식에 동요하다니, 이 늙은이도 주책입니다."
 
 
겉으로는 태연한 척 했지만 흥분한 나머지 신발굽이 부딪혀 부러진 줄도 몰랐던 사안이었다.
 
 
이후 손님이 돌아가자 사안은 그제서야 태도를 바꾸어 흔들리던 이가 빠질 정도로 기뻐 날뛰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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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에서 소개한 일화를 주제로 그린 <동산보첩도(東山報捷圖)>.
한가롭게 바둑을 두는 사안이 보인다.
 
 
 
 
 
앞서 1편의 서두에서도 밝힌 것처럼 세 대전(관도대전, 적벽대전) 모두 천하의 판도가 바뀌는 계기가 되었다고 했듯이 이 비수대전 역시 이후의 정세에 큰 영향을 끼쳤다.
 
 
전진(前秦)은 패전의 영향으로 큰 타격(무려 백만에 가까운 인구가 한순간에 증발했는데 어련했을까)을 입고 국력이 크게 약화되었음은 물론이고 그 바람에 얕보인 나머지 각지에서 반란이 일어 나라가 사분오열하는 결과를 초래해 후진(後秦), 서진(西秦), 후량(後凉), 서연(西燕) 등으로 찢어져 나가기에 이른다.
 
그리고 4C 말인 서기 394년에 이르러서는 멸망하니, 이로서 전진(前秦)에 의해 일시적으로나마 통일되었던 화북(華北)지방은 다시 분열되어 전란의 시기를 맞이하게 된다.
 
 
비수대전이 있고 난지 불과 10여년만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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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도출처 : 초코벌레의 서랍장 블로그
 
서기 395년의 판도.
 
사분오열되어 갈갈이 찢겨나가 그 자리에 여러 나라가 생겨났다.
 
 
 
 
한차례 대전으로 전세가 역전되어 정세의 변화까지 불러온 비수대전이기에 중국에서는 천하를 바꾼 전투라 하여 3대 대전으로 치부하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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