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기 있다. 여기가 우리의 고향이다. 이곳이 우리다. 우리가 사랑하는 모든 이들, 우리가 알고 있는 모든 사람들, 당신이 들어 봤을 모든 사람들, 예전에 있었던 모든 사람들이 이곳에서 삶을 누렸다. 우리의 모든 즐거움과 고통들, 확신에 찬 수많은 종교, 이데올로기들, 경제 독트린들, 모든 사냥꾼과 약탈자, 모든 영웅과 비겁자, 문명의 창조자와 파괴자, 왕과 농부, 사랑에 빠진 젊은 연인들, 모든 아버지와 어머니들, 희망에 찬 아이들, 발명가와 탐험가, 모든 도덕 교사들, 모든 타락한 정치인들, 모든 슈퍼스타, 모든 최고 지도자들, 인간역사 속의 모든 성인과 죄인들이 여기 태양 빛 속에 부유하는 먼지의 티끌 위에서 살았던 것이다. - 칼 세이건
우주를 보고 있으면 묘한 기분에 빠집니다. 외계인이 존재하는가 부터 시작해서 종국엔 중학교 2학년으로 돌아가죠.
그런데 목아프게 우주를 보지 않더라도 비슷한 기분을 느낄 수 있습니다. 책이나 영화를 보고 느끼는 후유증이 바로 그 답입니다.
그리고 책이나 영화보다 더 값싸고 쉬운 방법은 애니나 라노벨같은 서브컬쳐 작품입니다. 이런 작품은 등장인물을 가까이서 보여주며 일상생활의 사소한 소재까지 사용하는 경우가 많죠. 그래서 주인공이 나인듯 내가 아닌듯 묘한 기분에 빠지며 완결났을 때 후유증이 더욱 커집니다.
제가 소개할 작품은 이런 서브컬쳐 작품의 특징을 극대화한 흉악한 라이트노벨입니다.
강력한 후유증. 손발이 먹먹하고 가슴을 망치로 맞은 것 같으며 물에 잠긴듯 붕 뜬 느낌을 들게하는 후유증. 아 정말이지 먼 우주에 내팽겨져 지구를 바라보는듯한 공허한 후유증이 이 작품의 가장 큰 특징입니다.
문의 바깥은 도바시 신지로가 쓴 3권짜리 라이트노벨입니다. 상당히 짧음에도 군더더기 없는 설정으로 깔끔하게 끝을 맺습니다. 완벽한 내용분배 덕분에 각 권의 완성도가 극에 다른 작품이기도 합니다. 전체 3권 중 1권의 임팩트가 가장 큰데 1권만 읽어도 된다는 사람도 있는 지경이죠. 여기에 문체마저 좋으니 약간 손보면 일반 소설책으로 내도 괜찮을 수준입니다.
이제 재미만 더해지면 문체, 완성도, 재미의 삼위일체가 이뤄지죠. 하지만 안타깝게도 재미의 기준은 사람마다 다른지라 단언할 수는 없겠군요. 대신 여러분께 내용을 조금 맛보게 해드리겠습니다.
우선 이 라이트노벨의 스토리를 한단어로 요약하면 밀실게임입니다. 다만 밀실하면 으례 나오는 흑막이나 반전은 나타나지 않습니다. 숨막히는 탈출도 없으며 추리물도 아닙니다. 그저 밀실에 갇힌 등장인물의 모습을 보여줄 뿐입니다. 그럼 밀실에서 아무것도 안하고 재미없지 않냐고요? 걱정 마시죠. 이 작가는 게임물의 귀재랍니다. 작가는 작품에 여러 장치를 마련해 끊임없이 분위기를 환기시킵니다.
작가가 이렇게 공들여서 나타내고자 하는 바는 그리 흔치 않은 주제입니다. 선한 행위임이 분명한 기부에서 드러나는 추악한 인간의 본성. 집단의 결속이라는 옳은 일을 위한 따돌림. 분쟁의 시작 등 개똥철학 냄새가 물씬 나는 내용이죠. 이런 내용은 부정적이며 염세적인 주인공과 시너지 효과를 냅니다. 그래서 작가는 내용이 너무 어두워 지는걸 막으려 다양한 인간상을 등장인물로 드러냅니다. 덕분에 배경이 밀실임에도 작품이 아주 동적이죠.
" 여기는 우주선 안입니다. 당신들은 우주공간에 있습니다.
지구에선 핵전쟁이 시작됐습니다. 하지만 걱정할 필요는 없습니다.
이 세계 역시 모두에게 평등합니다. "
이야기의 주인공은 한 고등학교의 2학년 학생입니다. 수학여행을 가던 중 정신을 잃고 이상한 방에서 깨어나는 주인공과 같은 반 친구들. 그 방에는 의자나 화장실, 샤워실, 식품자판기 등 사는데 필요한 것이 갖춰져있으나 나가는 문만은 굳게 잠겨있습니다. 벽에 달린 화면에서 나오는 설명은 허무맹랑. 아이들은 상황을 이해하려 의견을 내 보지만 뾰족한 답을 찾지 못합니다.
" 12시간마다 팔찌를 착용한 사람 만큼 다이아몬드가 지급됩니다. 돈이라고 생각하십시오
그 다이아몬드로 클로버와 스페이드를 구입할 수 있습니다. 클로버는 식료품이나 오락 등에 사용할 수 있습니다.
당신들이 쾌적하게 지내기 위한 아이템 같은 것입니다. 스페이드는 커뮤니케이션에 사용하는 카드입니다. "
그러거나 말거나 화면에서는 자신을 소피아라 부르는 인공지능이 설명을 계속합니다. 이후 이야기는 물 흐르듯 진행됩니다. 타개책이 없어 소피아의 말을 따르는 아이들. 생존에 필요한 것이 갖춰졌고 오락거리도 있기에 현실에 안주하기 시작합니다.
" 여러분의 왼팔을 봐 주십시오. 팔찌가 채워져 있죠? 그것은 당신들의 생명을 유지시키기 위한 장치입니다.
심장 박동이나 체온을 측정해 몸에 이상이 없는지 확인하기 위한 도구입니다. "
소피아의 눈이 반짝 빛났다.
" 제 말을 따르고자 하는 분은 팔찌를 차고 계십시오. 강제는 아닙니다. 팔찌를 풀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일단 풀면 다시 차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
그러나 아이들의 머릿속을 떠나지 않는 것이 있습니다. 바로 깨어날 때 부터 채워져있는 팔찌입니다.
반의 수입과 직결되는 팔찌는 또한 이 시설을 이용하는데 필수 조건입니다. 팔찌가 풀리면 물과 칼로리젤리만 먹어야 하죠.
아무리봐도 팔찌를 하는것이 좋으나 소피아의 설명에 찝찝함은 가시지 않습니다.
" 이 방에서 밖으로 나가기 위한 조건이 있습니다. 그것은 팔찌를 푸는 것입니다.
다만 밖에는 아무것도 없습니다. 우주선의 로비가 있을 뿐입니다. 거기에는 생활할 수 있는 공간이 존재하지 않습니다.
또 한 가지 주의할 점이 있습니다. 밖 에서는 문이 열리지 않습니다. "
제 줄거리 소개는 여기서 끝입니다. 과연 누가 팔찌를 풀게 될까요? 굳이 팔찌를 풀고 문의 바깥으로 가야할 이유가 있을까요? 문의 바깥에는 정말로 아무것도 없는 우주공간일까요?
그 대답은 나중에 읽을 분들의 재미를 위해 남겨두겠습니다.
등장인물이 된 것 처럼 문장 하나 하나 천천히 읽어나가보세요. 어차피 3권에 불과한 라이트노벨이라 금방입니다.
그리고 결말에 다다랐을 때, 여러분을 저 먼 우주로 던져버릴 환상적이고 감각적인 경험을 해보세요.
이 글은 애니메이션 게시판 콘테스트 <이 작품을 소개합니다>의 참가작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