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마미야 (Omayyad or Umayyad)왕조
1. 무아위야 1세
본명은 무아위야 이븐 아비 수피아로, 아이러니 하지만 그는 최후의 한사람까지 선지자 무함마드가 이끄는 이슬람 세력에 대항하여 결사 투쟁을 벌이던 쿠라이시 부족의 우마미야 가문 출신입니다, 쉽게 말하자면 이슬람의 최대의 적이었는데 메카 점령 이후 메카의 거의 모든 기능을 장악하고 그 자체를 지탱하고 있던 귀족과 적대적 세력을 일소할수 없었던 선지자 무함마드는 그 들을 회유하는 방도외에는 다른 방법이 없었기에 그는 무슬림이 된 이후에도 요직을 차지할수 있었던 것 같습니다,
더 아이러니 한 사실이 무엇인가 보자면 선지자 무함마드와 무아위야 1세는 아부 무나프Ab munaf라는 같은 조상을 가지고 있습니다, 선지자 무함마드는 압두 무나프의 아들 하심Hashim의 혈통을 이었고 무아위야 1세의 가문 우마미야는 압두 샨스 Abd Shans의 혈통을 이었는데, 두 가문은 정치적 경제적인 라이벌과 같은 관계였습니다, 물론 가문이 잘산다고 구성원이 잘사는 건 아니며, 더욱이 이슬람 포교에 가장 큰 걸림돌이 선지자 무함마드 자신의 혈족이었던 것을 생각하면 별 의미가 없겠지만 혈통을 중시하는 이슬람 사회를 볼때 재미난 부분이 아닐수가 없습니다.
물론 이러한 관계도 그러하지만 하층민과 여타의 계층을 끌어 안은 탓에 정치적 외교적 능력을 가지고 있는 있는 인재의 두께가 비교적 얇았던 이슬람 세력과 다르게 풍부하게 보유하여 제공받을수 있는 관계라는 사실과 전후 이슬람 제국의 재건과 발전에 있어 그 들의 재력을 무시할수는 없었기에 필연적으로 끌어 안아야 했지요.
이슬람 제국은 세속화라는 목에 박힌 가시와도 같았지만 그 들을 버릴수는 없었습니다, 물론 이슬람 제국이 자리를 잡고 난 이후에도 이 들은 이미 이슬람 제국 사회 깊숙하게 뿌리를 내리고 있었기에 버릴수도 없었고 말입니다.
아무튼 무아위야가 처음 역사에 모습을 보인 것은 비잔틴 제국의 진격을 막기 위해 시리아에 파병된 이후입니다, 그의 형 야지드와 함께 부족민들을 이끌고 복무하다 형이 죽은뒤 그는 칼리프 우마르의 통치 정책에 따라 편성된 총독의 자리에 오르는데 이후 칼리프 우스만의 친족 우대 정책 + 경제 부양 정책에 따라 막대한 부를 끌어모으며 휘하의 군대를 사병화할수 있었고 칼리프와 대등한 힘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더욱이 이슬람과 기독교의 최 전선이라 할수 있는 시리아에서 비잔틴 제국과 벌인 숱한 성전은 그와 그의 군대를 숙련되고 강력하게 만들었으며 그의 명성을 높이는데 더 할나위 없는 버팀목이 되었습니다, 그는 로도스와 키프로스를 점령했고, 리키아에서 비잔틴의 해군을 무너뜨렸으며, 쉴세 없이 아나톨리아에 원정군을 보내 비잔틴 제국을 괴롭혔습니다.
이러한 어쩌면 일상적인 나날이 중단되는 계기가 찾아왔으니 그 것은 우스만의 암살입니다, 그는 칼리프 우스만의 혈족으로서 이슬람의 율법상 그는 혈족의 살해범에 대한 보복을 요구하고 또 실행할수 있는 권리이자 의무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새로운 칼리프 알리가 칼리프 우스만의 중재 요청을 거절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으며 그러한 폭도들에 동조하는 이 들이 다수가 남아있다는 사실역시 잘 알고 있었기에 처벌을 주저할수 밖에 없었던 알리를 몰아붙이고 뒤 흔들었습니다,
비단 이것은 친족의 살해만을 기저로 한 이야기는 물론 아닙니다, 알리는 이슬람의 순수성과 개혁을 주창하는 인물입니다, 당연히 그와 그의 가문, 부족이 추구하는 세속적인 이슬람의 길과는 상충될수 밖에 없습니다, 둘 중 하나의 뜻이 꺽이지 않는 이상 분열은 피할수가 없는 일이었고 우스만의 살해와 그에 연루된 알리는 쿠라이시 부족이 잡을수 있는 절호의 기회였습니다.
무아위야는 독단적으로 휘하의 군대를 유프라테스 유역을 진격 시켰고 알리의 이슬람 제국군과 격돌하였는데 이 것이 그 유명한 시핀 전투입니다, 간략한 글이니 결론만 말해보자면 알리가 가진 최대의 강점이자 약점인 종교적인 측면을 자극하여 그의 세력을 분열시키는데 성공하였고 이로 인하여 통제력이 약해진 틈을 타 사실상 이슬람 제국을 장악하는데 성공해 칼리프의 자리에 오릅니다, 그리고 알리가 암살당하고 그의 둘째 아들 하산이 뒤를 이을 조짐을 보이자 돈으로 매수하여 모든 공적인 자리에서 물러나게끔 하여 마침내 자신을 필두로한 새로운 왕조의 탄생을 이뤄냅니다.
약 20여년간의 시리아 총독의 경력상 그의 지지 세력의 중심지는 단연코 시리아입니다, 그러니 수도를 다마스쿠스로 옮긴것은 당연한 일이나 문제는 그 들외의 다른 아랍 부족들입니다, 짐마 그러니까 인두세를 내고 신앙의 자유를 얻은 비 무슬림들은 뭐 큰 문제는 아닙니다, 여태까지 그래왔던 것 처럼 적절한 세금을 유지하기만 하면 되니까 말이지요, 하지만 그 외의 아랍 부족은 다릅니다, 자신이 그러했듯 언제 등을 돌리고 칼을 뽑아 들지 알수가 없었지요.
그랬기에 그는 통치 체제를 정비함에 있어 선지자 무함마드 이래 정통 칼리프들이 해왔던 방식에서 과감히 탈피합니다, 첫째로 슈라의 정비입니다, 칼리프 우마르가 칼리프 선출기구로서 조직한 일종의 부족회의 였던 비상설 기구를 국가 자문 기관으로 바꾸어 버렸습니다, 기존처럼 제국을 나누어 총독을 배비하되 손을 놓아버리는 다시 말해 이른바 방임 주의로 전락할수 있는 상황을 사전에 막고자 하는 그러한 귀족들의 협의체라고 볼수 있겠습니다. 두번째로 우스만이 범했던 실수인 자신들의 친족과 측근들만 우대하는 정책에서 벗어나 우푸드라 하여 아랍의 각 부족들이 보내는 대표자들을 통해 아랍 부족들과의 의사 소통을 쉬이 여기지 않았습니다.
또한 광대해진 제국의 통치를 효율적으로 이루어내기 위해 비잔틴 제국의 제도를 모방하여 디완이라는 행정부서를 두었는데, 이 디완은 행정 사무국인 디완 알 하탐과 체신국 그러니까 제국 내 통신을 전담하는 바라드로 나누어집니다, 이 디완은 종교적 관용 정책에 따른 것으로 보이는 정책의 일환으로당시 시리아 지역에 많이 거주하고 있던 기독교 인들을 대거 기용하였지요.
업적은 이러한 내정에만 그치는게 아닙니다, 그는 알리와의 내전에 앞서 공물 상납을 조건으로 비잔틴 제국과 휴전을 맺었는데, 칼리프에 오르자 마자 성전을 선포하며 비잔틴 제국과의 전쟁에 돌입합니다, 이 성전을 통해 2차례나 비잔티움 즉 비잔틴 제국의 수도를 공격하는 위업을 달성했는데, 타우르스 산맥 너머 소아시아는 숱한 노력에도 불구하고 얻지 못했습니다, 다만 다른 방향으로의 원정은 이와 다르게 성공적이라 북아프리카의 지금의 알제리 지역을 점령하였으며 트리폴리타니아 그러니까 지금의 리비아 지역의 트리폴리 가 있는 주와 이프리카야 즉 북서 아프리카를 평정하였고, 지금의 투르크메니스탄과 우즈베키스탄, 아프가니스탄의 국경을 이루는 아무다리야 강이라고 이름이 바뀐 당시의 옥수스강 까지 영토를 확장하여 호라산 지역을 완벽하게 병합하였습니다.
하지만 업적을 꼽자면 이러한 내,외적인 업적 보다는 단연코 가장 대단한 것은 이것이 아닐까 싶은데, 그게 바로 세습제의 정착입니다.
본디 선출기구인 슈라의 동의가 전제되는 것이 칼리프의 자리이지만 그는 슈라의 구성원과 각 아랍 부족에 대하여 금전적, 군사적인 역량을 동원하여 때로는 매수하고 때로는 압박을 넘어선 물리적인 제제까지 피하지 않은결과 살아 생전에 이미 세습제를 결정지어놓았고, 이로 인하여 우마미야 가문이 칼리프 지위를 독점하게 만들어 후대의 역사가 이 시기를 우마미야 왕조라 부르게 만들었습니다.
그리고 이로 인하여 의도치 않은 결과이지만 본격적인 종파간 부족간의 분열과 대립을 표면화 시켰는데, 다음 글에서 2대 칼리프 야지드 1세를 다루며 언급해보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