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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의 3대 대전 중 하나, 비수대전(淝水大戰) - 1
게시물ID : history_13142짧은주소 복사하기
작성자 : Belisarius
추천 : 29
조회수 : 7688회
댓글수 : 4개
등록시간 : 2013/12/22 04:20:54
 
 
중국 역사상 3대 대전(大戰)이라 불리우는 세가지 전투가 있다.
 
 
<삼국지연의>로도 널리 알려진 적벽대전(赤壁大戰).
역시 삼국시대를 배경으로, 조조(曹操)와 원소(袁紹)가 격돌한 관도대전(官渡之戰).
 
그리고 이번 글에서 다루어 보고자 하는 비수대전(淝水大戰), 이렇게 세가지다.
 
 
이 전투들의 공통점은 소수의 병력으로 대군을 격파했다는 점이다.
그리고 전투의 결과가 정세의 변화를 불러왔다는 면에서도 공통된다 하겠다.
 
 
삼국지연의나 영화같은 대중매체로도 유명한 적벽대전(赤壁大戰)에서는 당시 대륙통일을 목적으로 쳐들어왔던 조조(曹操)가 손권(孫權), 유비(劉備) 연합군에 패해 통일의 꿈을 접고 후퇴해야 했으며, 관도대전(官渡之戰)에서는 하북(河北)의 강자 원소(袁紹)를 꺾음으로서 조조(曹操)가 후한(後漢) 말 여러 군벌들 중 최강자로 군림하는 계기가 되었다.
 
 
비수대전(淝水大戰)에서도 마찬가지였다.
 
 
비수대전(淝水大戰)은 서기 383년, 전진(前秦)과 동진(東晉)이라는 두 국가 간에 비수(淝水)라는 강 일대에서 벌어진 전투로, 그 승패에 따라 중국의 통일이 이루어지느냐 마느냐의 운명이 걸린 싸움이었다.
 
 
 
 
먼저 당시 서기 4C 후반 무렵의 중국의 정세를 알아볼 필요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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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기 376년 무렵의 중국의 형국.
 
푸른색으로 표시된 영역의 국가가 전진(前秦), 노란색의 영역은 동진(東晉)이다.
 
 
 
우리에게 <삼국지>로도 유명한 삼국시대를 통일한 나라는 진(晉)이라는 나라였다. 그러나 서기 4C 초에 진(晉) 왕조는 얼마가지 못하고 내란과 이민족들의 침입으로 붕괴하고 중국의 북부지방, 즉 화북(華北)에서는 이른바 '5호 16국 시대' 라고 하는 시대가 도래하여, 여러 이민족들에 의한 나라가 우후죽순으로 생겨나고 또 지는 혼란한 시기가 시작된다.
 
한편 이미 붕괴했던 진(晉) 왕조는 중국의 남부, 다른 말로는 화남(華南)지방에서 다시 건국되니, 역사에서는 이를 동진(東晉)이라 부른다.
 
 
화북(華北)에서는 5호 16국 시대가, 화남(華南)에서는 동진(東晉)이 있는 형태로 서기 4C 중후반까지 계속된다.
 
 
그러던 중, 그 숱하게 생겨났던 나라들 가운데 혼란을 종결짓고 화북(華北)을 통일한 나라가 있었으니, 바로 전진(前秦)이라는 나라였다.
 
 
당시 전진(前秦)의 황제는 부견(苻堅)이라는 사람으로, 출신은 비록 이민족이었으나 정치감각만은 탁월해, 뛰어난 재능을 소유한 한족(漢族) 왕맹(王猛)을 재상으로 등용하여 여러제도의 개혁과 실시를 통해, 전진(前秦)을 부국강병하게 만들어 주변의 여러 나라들을 모두 병합함으로서 통일을 이루어낸 명군(名君)이었다.  
 
 
왕맹.jpg
 
왕맹(王猛)의 초상화.
 
한족(漢族)출신으로 이민족의 국가 전진(前秦)의 부름을 받아 재상으로서 훌륭한 내치를 펼쳐
부견(苻堅)을 도와 전진(前秦)을 화북의 강자로 발돋움하게 한 장본인.
 
 
 
군주 부견의 지도력과 재상 왕맹의 재능덕택에 통일을 이룩한 이후로도 나라는 더욱 융성했졌고 오랜 전란도 끊겨 민생도 안정되어 실로 전진(前秦)은 최고의 전성기를 맞고 있었던 것.
 
전진(前秦)이 화북의 지배자가 되었을 때는 서기 376년이다. 한편 화남에서는 동진(東晉)이 계속해서 존속해오고 있었다.
 
 
이제 중국대륙은 전진(前秦)과 동진(東晉)이 둘로 나누어 대립하는 형국이 된 것이다.
 
 
상대적으로 강자는 전진(前秦)이었으나, 재상 왕맹(王猛)은 일찍이 부견(苻堅)에게 절대 동진(東晉)을 공격하려 들지 말 것이며, 오히려 화친을 도모해야한다고 누누이 이르곤 했었다.  
 
 
그러나 왕맹(王猛)이 죽자 부견(苻堅)은 슬슬 다른 생각을 품기 시작한다.
 
 
앞서 말했듯 전진(前秦)의 국력은 동진(東晉)을 능가했으며 나라는 전성기를 맞아 번성하고 군사, 경제 등의 분야에서도 앞서는 터였다. 동진(東晉)만 멸한다면 전진(前秦)은 명실명백한 중국의 통일제국이 될 수있었다.
 
 
이러니 부견(苻堅)이 욕심을 안내고 배기겠는가. 모든 조건은 완벽했다. 자신의 대에 통일을 이룩했다라는 업적을 남기고 싶었던 부견은 점차 동진(東晉)을 침공할 계획을 세우기 시작한다.
 
 
평소 왕맹(王猛)을 제갈량(諸葛亮)에 비유하며 그토록 신임하고 존중하던 왕맹(王猛)의 말이라면 만사를 제쳐두고 귀담아 듣던 부견(苻堅)은 왕맹의 사후를 기점으로 생각을 바꾸어 공식적으로 동진(東晉)을 침공할 뜻을 밝힌다.
 
 
죽은 왕맹(王猛)의 뜻에 함께하던 조정대신들이 이를 반대했지만 통일이란 업적달성에 눈이 멀어버린 부견(苻堅)은 요지부동으로 출정준비에 박차를 가한다.
 
 
 
그리고 서기 383년, 8월. 전진(前秦)은 총 97만의 대군을 동원하여 수륙에 걸쳐 장장 동서로 약 1만여 리에 펼쳐진 진용으로 진군, 동진(東晉) 국경으로 일제히 침공해 들어간다.
 
 
갑자일(8일)에 장안(長安)을 출발, 보졸(步卒)은 60만, 기병은 27만명이었고 깃발들과 북소리가 서로 바라보이는 것이 앞뒤로 1천리에 달했다. 9월, 부견(苻堅)이 항성(項城)에 이르렀는데, 양주(凉州)의 군사가 함양(咸陽)에 도착했으며, 촉(蜀)의 병사가 장강(長江)을 따라 내려가고 유주(幽州)와 기주(冀州)의 병력이 팽성(彭城)에 이르러 동서로 1만여 리에 걸쳐 수륙으로 일제히 진군, 운반하는 배가 1만여 척이었다. 양평공(陽平公) 부융(苻融)의 군사 30만명이 영구(潁口)에 도착해 주둔했다. - 자치통감
 
 
e0042222_49e340406aaa9.jpg
 
지도 출처 : 야스페르츠님의 블로그
 
당시 전진(前秦)군의 진군도.
 
지도에서 보이듯 전진(前秦)군은 동진(東晉)의 국경 전역에 걸쳐 짓쳐들어 갔다. 쳐들어간 방향은 여러갈래였지만 주요 접전지는 검은색 동그라미로 표시된 '비수(淝水)' 였다. 이곳에서의 승패에 따라 부견의 바람대로 통일이 이루어지느냐 마느냐가 결정될 만큼 전진(前秦)과 동진(東晉)의 주력군이 맞부딪치는 곳이었다.
 
여담이지만 지도 왼쪽 위에 '여광' 이라 표시된 푸른색 화살표는 '여광(呂曠)' 이란 장군이 이끄는 서역 정벌군으로, 당시 대군을 동원해서 동진(東晉)을 치는 그 와중에도 서역정벌까지 병행하고 있었으니 전진(前秦)의 국력을 짐작할 만하다 하겠다.
 
 
 
 
흔히 많은 숫자의 병력을 비유하는 말로 '백만대군' 이란 표현을 쓰는데, 전진(前秦)은 실제로 백만에 가까운 무려 97만명의 군사를 동원하는 위엄을 보여주었다. 거기다 그 병력이 진군해 나갈때 동서로 길게 장사진을 펼쳤는데 그 길이가 1만여 리에 달했다고 기록은 전한다.
 
또한 기록에서 보듯이 부견(苻堅)은 나라 각지의 주(州)의 병력까지도 동원했는데, 이것만 봐도 부견(苻堅)이 이 전쟁을 얼마나 중요하게 여기고, 또한 거의 모든 것을 걸다시피하여 만전의 준비를 다했는지를 알 수있다.
 
 
총사령관은 동생인 부융(苻融)이었고, 부견(苻堅)도 자신이 친정하는 전쟁이니만큼 직접 지휘하는 3만여명의 어림군을 거느리고 제일 최전선으로 나간다.
 
그리고 마치 이미 전쟁에서 이기기라도 한듯 동진(東晉)의 황제인 효무제(孝武帝) 사마요(司馬曜)와 동진(東晉)의 재상 사안(謝安)에게 그들이 전쟁에서 패해 항복하고 난 이후에 하사할 관직들까지 미리 마련하고 게다가 친절하게도 살 집까지 마련해주겠다고 하며 자신감에 찬 행동들을 보여준다.
 
 
"사마창명(司馬昌明 : 사마요를 말한다. 창명(昌明)은 사마요의 자(字))은 상서좌복야로 삼고, 사안(謝安)을 이부상서로 삼을 것이며, 환충은 시중으로 삼을 것이다. 형세로 보아 이기고 돌아갈 일도 머지않았으니 이들에게 살 저택을 새로 만들어 줄 것이다! - 자치통감
 
 
김칫국 마시는 부견이었다. 그만큼 전쟁에서의 승리를 확신하고 있었고 상대적으로는 동진(東晉)군을 얕보고 있던 것이다.
 
 
전진(前秦)군은 오늘날 중국의 안휘성(安徽省)에 속하는 비수(淝水)란 곳에 이르러 진을 펼치고 주둔했다. 동진(東晉)군을 기다리기 위함이었다.
 
 
 
이렇듯 전진(前秦)이 동진(東晉)을 씹어먹을 기세로 대군을 동원해 쳐들어 오는동안 동진(東晉)에서는 어떻게 대처하고 있었을까.
 
 
 
위에서 밝혔듯 당시 동진(東晉)의 황제는 효무제(孝武帝) 사마요(司馬曜).
 
 
 
전진(前秦)이 대군을 동원해 쳐들어온다는 급보를 접하자 즉각 재상 사안(謝安)을 불러들여 대책을 논의했다. 백만에 가까운 대군 앞에서는 쫄만도 해서 항복론이 기어나올 법도 한데 논의는 '어떻게 막을까' 쪽으로 흘러가고 있었다. 
 
 
효무제(孝武帝) 사마요(司馬曜) : "우리의 병력이 얼마나 되오?"
 
사안(謝安) : "이곳 저곳의 병력을 모으면 족히 8만 가량 됩니다."
 
효무제(孝武帝) 사마요(司馬曜) : "......"
 
사안(謝安) : "폐하께서는 조금도 심려마십시오. 신이 막아 보이겠나이다."
 
 
무슨 자신감이었는지는 몰라도 황제 앞에서 담담하게 출사표를 던지고 나온 사안(謝安)은 그길로 집으로 돌아가 동생과 아들들, 조카 모두를 전쟁에 장수로 내보낸다. 이들 역시 모두 관직에 몸담고 있는 몸들이었다. 나라가 존망의 위기에 처하자 재상의 친족들도 출전한 것이다.
 
사안.jpg
 
사안(謝安).
 
당대의 명문가인 양하(陽夏) 사씨(謝氏)출신으로 동진(東晉)의 명재상으로 뛰어난 문학가이자 시인이기도 했다.
재상으로서의 취임기간 동안 동진(東晉)의 중흥기를 이룩해내는 업적을 세웠다.
 
 
 
전진(前秦)의 대군에 맞설 동진(東晉)군의 총사령관은 사안(謝安)의 동생인 사석(謝石), 선봉장은 조카 사현(謝玄), 그리고 아들 사염(謝炎)도 장수로 참전했다. 그 밖의 여러 제장들에게 각자의 임무를 주어 요격하고 대비하게 했다.
 
 
 
아무리 동진(東晉)군이 비장하게 출전했다고 해도 아무래도 쪽수가 쪽수이니만큼 전투초반에는 전진(前秦)이 우세를 점하고 있었다.
 
 
먼저 선봉군 몇갈래를 보내 주요 요충지를 점거하게 하고 동진(東晉)의 선봉을 꺾는데에 성공한 것이다. 이는 본군이 당도하기 전에 안전하게 자리잡을 조건을 미리 마련하기 위한 조치였다.
 
 
그해 10월, 양평공 부융이 수양을 공격하고 계유일(18일)에 승리해 진(晉)의 평로장군(平虜將軍) 서원희(徐元喜) 등을 사로잡았다. 부융은 자신의 참군(參軍)인 곽포(郭褒)를 회남태수(淮南太守)로 삼아 그곳을 지키게했다. 모용수(慕容垂)가 운성(隕城)을 함락시켰으며 진(晉)의 장수 호빈은 수양이 함락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후퇴하여 협석(硤石)을 지키는데, 부융이 나아가 이곳을 공격했다. - 자치통감
 
hb1_114_i2.jpg
 
 
복잡한 지명(굳이 알고싶다면 위 지도를 참고하기 바란다. 지명이 명시되어 있어 참고하면서 기록을 보면 전황이 어떻게 돌아가고 있었는지 알 수있다. 다만 다른 곳에서의 전투는 윗 지도에서 확인할 수 없고 바로 그 위의 지도에서 확인가능)들이나 관직들은 볼 것 없고 그저 여러 전선에서 전진(前秦)군이 승세를 타고 있었다는 것만 알면 된다.
 
 
위에서 말한 내용이기도 하지만 전진(前秦)군은 애초에 동진(東晉)의 국경 전역에 걸쳐 쳐들어 왔기에 비단 비수(淝水)에서의 전투만이 전부는 아니다. 다만  비수(淝水)에 전진(前秦)과 동진(東晉)의 주력군이 대치 중이었다는 점에서 전쟁의 중심이 되었다 뿐, 전선은 꼭 이쪽에만 국한된 것이 아니었다.
 
 
 
전진(前秦)군은 '수양' 이란 곳을 집중공략했다. 수양의 점령여부에 따라 승패가 좌우될 정도로 수양은 중요 거점이자 진출의 교두보였다. 그러나 위에 싣어놓은 기록대로 전진(前秦)군의 총사령관 부융이 공격해와 기존에 점거하고 있던 호빈의 동진(東晉)군은 수양을 빼앗겨 협석으로 후퇴했고, 전진(前秦)군은 더 나아가 '낙간(洛間)' 이란 곳에 목책을 설치해 동진(東晉)의 주력군을 통솔하는 사석(謝石), 사현(謝玄)의 병력과 앞서 협석으로 물러난 호빈의 병력 간에 연계하는 것을 차단하기에 이른다. (말로만 설명해서는 모르니 윗지도를 참고바람)
 
 
설상가상으로 협석(硤石)에 고립된 호빈의 동진(東晉) 병력은 식량마저 동이 나, 호빈은 총사령관 사석(謝石)에게 구원을 요청하는 파발마를 띄웠지만 중간에 버티고 있던 전진(前秦)군에 의해 붙잡혀 버리는 사태가 일어난다.
 
 
 
구원을 요청하는 서신은 부견(苻堅)의 손에 들어가게 되고 이를 통해 동진(東晉)군의 포진을 알게 된 부견은 갓 점령한 수양에 주둔하고 있는 동생 부융에게 즉각 공격할 것을 명령하는 한편, 적의 총사령관 사석(謝石)에게는 항복을 권유하는 서신을 보내 그 의사를 물어보게 했다.
 
 
지금까지의 전황을 정리해서 이때 부견이 보낸 서신의 내용을 보자면, 너희는 병력이 두개로 분산되어 우리를 당해낼 도리가 없는데다 그나마 한갈래 병력도 식량이 없으니 이길 수가 없다. 그러니 항복하는 것이 좋지 않겠는가.. 정도로 요약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주서(朱序)라는 이에게 그 서신을 전달하는 임무를 맡겼는데, 이것이 부견(苻堅)이 범한 치명적인 실수 첫번째가 되었음은 부견(苻堅) 본인은 꿈에도 몰랐을 것이다.
 
 
실책의 원인은 주서(朱序)의 출신에 있었다. 주서(朱序)는 본래 개전 초기에 형주(荊州)전선을 방어하던 동진(東晉)의 장수였으나, 싸움에서 패해 어쩔 수없이 전진(前秦)에 투항한 사람이었다. 달리 말하자면 여전히 동진(東晉)의 신하였다는 것이다.
 
 
주서는 우선 명령받은대로 동진(東晉)의 진영을 찾아가 사석(謝石)에게 서신을 전달하며 부견의 말을 전했다.
 
 
강약의 기세가 다르니 빨리 항복하는 것만 못하다.
 
 
그리고 바로 기다렸다는 듯 동진(東晉)의 편으로 돌아서서는 정보를 흘려준다.
 
 
"부견이 이끄는 본군이 당도하기 전에 신속히 이곳 전진(前秦)군의 선봉대를 쳐야 합니다. 만약 본군이 도착해 선봉군과 합류한다면 실로 이기기가 어려워 질 것입니다. 선봉이 무너지면 전진(前秦)군은 사기가 꺾일 것이고 그 나머지를 물리치기란 쉬울 것입니다."
 
 
겉으로 보기엔 별거 없어보이는 듯한 기밀유출이었으나 이는 당시 전진(前秦)군의 포진형태나 병력 규모 등의 정보에 대해서 아는 바가 부족했던 동진(東晉)군에게 크나큰 도움이 되었다. 아직 본군이 도착한 것이 아니었다는 것을 알았거니와, 더구나 지금 상대하고 있는 병력이 선봉대라는 것을 안 이상, 주서의 말대로 전투에 있어서 초장부터 그 선봉을 꺾으면 사기가 크게 저하되리라는 것은 오랜 세월간 무관직에 몸을 담아왔던 사석(謝石)이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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