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동아,경향,MBC의 워싱턴 특파원을 역임했던 문명자 기자가 1972년 도쿄에서 어렵게 ‘다카키 마사오’와 함께 만주신경군관학교에서 생도로 있던 일본인 장교 출신 두 명을 찾아 인터뷰한 내용을 보면 “....조.센징 다카키 마사오(박정희)는 하루 종일 같이 있어도 말 한마디 없는 음침한 성격이었다.
그런데 ‘내일 조.센징 토벌 나간다’는 명령만 떨어지면 그렇게 말이 없던 자가 갑자기 ‘요오시(좋다)! 토벌이다!’하고 우뢰같이 고함을 치곤했다. 그래서 우리 일본생도들은 ‘저거 좀 돈 놈 아냐?’하고 쑥덕거렸던 기억이 난다....” 고 회고 했다.
문기자는 그 후 박정희 당시 대통령의 지시로 KCIA(한국 중앙정보부) 요원들이 도쿄에서 정적 김대중을 납치해 동해바다에 수장하기 직전 헬리콥터로 급거 출동한 주한 미정보요원의 제지로 살해 계획이 실패한 후부터 철저한 ‘반 박정희’ 노선으로 선회, 백악관에 보고된 자료를 토대로 박 정권의 각종 비리와 인권유린 관련 기사를 낱낱이 폭로, 조국의 민주화를 적극 지원, 국내 언론을 무색하게 했으며 박정권이 없애버려야 할 ‘반한인사 제1호’가 된다.
그 후 문 기자는 박 정권으로부터 ‘빨갱이’(?)로 몰려 부모 친척의 장례식마저 참석할 수 없었다. 이 때 조선일보로 송고된 세상을 깜짝 놀라게 할 굵직굵직한 박정권의 부정 비리 기사들은 단 한 줄도 보도되지 않았음은 물론 오히려 그 기사를 미끼로 조선일보 사장은 청와대에서 계속 두둑한 사례를 받는 결과를 초래했기에 소속 언론사를 자꾸 바꿀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한국인 기자로서는 처음으로 당시의 국제 거물인 중국의 뎅샤오핑을 비롯해 북한의 김일성 등과 단독 인터뷰를 했던 문 기자는 박정권이 자신을 ‘반한인사’ 또는 ’친북인사‘로 낙인찍는데 대해 “유신정권 때인 70년대까지는 ‘반한인사’로 불렸는데, 80년대 말 남북고위급(김대중 김일성) 회담이 본격화된 후 북한 취재에 나서면서 ‘친북인사’로 호칭이 바뀌더라. ‘반한인사’ ‘친북인사’란 한국 중앙정보부가 만들어낸 용어로, 전혀 타당하지 않다.
굳이 말하자면 ‘반(反)박정희인사’나 ‘반(反)유신인사’라고 해야 옳을 것이다. ‘친북’도 그렇다. 남북은 같은 민족이다. 서로가 ‘친북’도 하고 ‘친남’도 해야 한다...” 고 받아쳤던 정의감과 패기로 가득 찬 원로 기자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