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겨레21] 고문으로 인한 ‘악몽의 50년’, 자식들에겐 ‘조작된 원죄’ 대물림돼
1960년대 남북관계가 칼날 위에 섰다. 북한은 남북 바다의 경계를 오가며 남쪽 어선을 무더기로 납치했다. 정부는 막을 힘이 없었다. 나침반 하나에 의지해 바다 보고 하늘 보고 물고기 잡던 시절이었다. 어민들은 북방한계선(NLL)이 어디인지조차 제대로 알 길이 없었다. 해군 경비정의 존재가 월북을 경고하는 ‘빨간 신호등’ 구실을 했지만, 이마저도 거의 찾아보기 어려웠다.
1969년 6월10일은 안개가 많이 낀 날이었다. 연평도 인근에서 조업하던 신성호 근처로 북한의 고속경비정이 거센 엔진 소리를 내며 다가왔다. 갈고리로 신성호의 닻을 낚아채고, 북한 군인들이 총을 들이댔다. 나포였다.
자유의 품으로 돌아온 줄 알았는데…
1969년 11월3일 아침 6시25분, 김성덕씨는 19t짜리 어선 신성호 동료들과 함께 북에서 인천항으로 돌아왔다. 피랍 5개월 만이었다. 함께 피랍된 복순호, 흥덕호, 신흥2호의 선원 30여 명도 있었다. 당시 언론은 “고기잡이하다 북괴에 납북됐던 어선과 어민들이 다시 자유의 품으로 돌아왔다”고 대서특필했다. 인천 황해여관에서 먹은 아침 식사는 따뜻했다. 운 좋은 생환이었다.
그러나 곧바로 검찰은 반공법(현재 국가보안법으로 통합)과 일반이적수산업법 위반 혐의로 이들을 기소했다. 당시 조아무개 검사는 “어로저지선과 군사분계선을 넘어 닻을 내리고 어로를 함으로써, 반국가 단체인 북괴 지배하에 있는 지역으로 탈출했다”며 이들이 대한민국 해안초소와 예비군 개수 및 경비 사항을 알리고, 북괴 간첩에게 은닉·호송·안내 등 편의를 제공했다고 주장했다. 북에서 폭행·협박을 당한 사실이 없고, 환대를 받다가 구체적 지령과 금품을 받은 채 북에서 보내준 선편으로 귀국했다는 혐의도 씌워졌다. 어민들이 “북괴의 무서운 감시 속에 지낸 시간이 지옥 같았다”고 말했지만 소용없었다. 그리고 지옥은 따로 있었다.
2월6일 충남 서천군 장항항에서 만난 김씨는 충남 장항의 보안대 지하실에 끌려온 날부터 불법 감금과 고문이 시작됐다고 기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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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하실에 다른 건 아무것도 없어. 새카만 책상 하나랑 의자 2개, 곡괭이 자루, ‘쇠찡줄’(체인줄) 몇 개가 걸려 있어. 들어가자마자 옷 벗기고, 다리에 ‘꽈배기줄’이란 끈을 달아서 거꾸로 매달아. 그 끈을 확 잡아채서 돌리면 사람이 한 번에 수십 바퀴씩 돌아가. 그때가 한겨울이었는데, 기절하면 무조건 찬물을 틀어버리는(퍼붓는) 거야. 그래도 안 되면 책상 모서리에 얼굴만 얹게 하고, 큰 주전자 2개에 고춧가루물을 담아서 얼굴에 막 부어. 코피가 터지고, 나중에는 코 안이 고춧가루 독으로 부어서 몇 날 며칠을 숨 쉴 수도 없게 돼. 기절하면 또 찬물 퍼붓고, 정신 차리면 참나무 곡괭이로 몽둥이 찜질하고…. ‘간첩질한 거 불라’고 했는데, 우리가 ‘진짜 없다’고 하면 또 시작해. 고문하다 지들이 힘들면 기어 들어가서 자빠져 자다가 나와. 그런 시련을 수십 번씩 당했어.”
김씨는 이듬해 대전지방법원 홍성지원에서 반공법과 일반이적수산업법 위반으로 징역 1년, 집행유예 2년이 선고됐다. 김씨의 나이 고작 16살 때였다. 옥살이는 면했지만, ‘빨갱이 딱지’가 붙자 그와 가족의 삶은 완전히 붕괴됐다.
김씨의 아버지는 40대 젊은 나이로 숨졌다. 김씨가 북에 납치된 동안 아버지가 먼저 보안대에 끌려갔다. ‘아들과 연락이 닿지 않느냐’며 감금과 고문이 이어졌다. 아버지는 숨을 거두기 전 김씨에게 “너 때문에 경찰서에서 뒤지게 맞았다”고 했다. 김씨는 “그때를 생각하면 지금도 눈이 삼삼하다. (당시 고문 경찰이) 눈앞에 있으면 죽이고도 남았다”고 회고했다.
취직도 할 수 없었다. 형사들이 매일 뒤를 따랐다. 어쩌다 자리를 소개받아도 신원조회에 걸렸다. 날일을 하는 인력사무소에서도 일을 주지 않았다. 배를 타면 경찰들이 선주에게 찾아가 “저 새끼 간첩이니까 잘 감시하라”고 했다. 그러면 또 일이 끊겼다.
“여러 차례 ‘여자도 얻어’봤지만, 간첩으로 몰린 사실을 알면 모두 달아났다. 제주도 여자는 임신한 상태에서 나를 두고 갔다. 덕분에 내가 <청춘을 돌려다오>란 노래 하나는 끝내주게 부른다”며 김씨는 눈가를 적셨다. 어머니는 ‘간첩 아들’이 있는 집에 들어오는 걸 무서워했다. 김씨는 “(나중에) 시집간 여동생은 남편이 ‘니 오빠가 이북 갔다온 간첩인데 까불지 말라’며 학대를 일삼았다고 한다”고 말했다. 아이를 셋이나 낳았지만, 여동생은 결국 목을 맸다.
그는 2015년 대전지방법원 홍성지원에 낸 재심 대상 판결에서 ‘1969년 수사 당시 6일간의 불법 구금’ 사실이 인정됐다. 오는 2월23일 유무죄를 가리는 최종 판결을 앞두고 있다. “나 때문에 가족이 갈래갈래 다 찢어졌다. 미안하지만, 나는 미안한 짓을 한 게 아무것도 없다. 재판 가서 또 얼마나 울지 모르겠다.” 세월보다 더 깊이 파인 그의 눈가 주름 사이로 눈물이 고였다.
“글씨라도 알아야 간첩질도 할 것 아니냐”
최은수(65)씨는 김성덕씨를 ‘형’이라고 불렀다. 신성호와 또 다른 어선 복순호의 선주가 그의 아버지 최남옥씨였다. 아버지 최씨는 학교를 다닌 적이 없었지만 가족을 돌보기 위해 18살부터 배를 탔다. 마흔을 갓 넘은 나이에 배 두 척을 샀다. 게다가 대를 이을 큰아들 은수씨는 공무원을 시켜도 될 만큼 꽤 공부를 잘했다. 그즈음 북한은 신성호와 복순호를 납치했다. 남한 정부는 선주 최씨와 어민들을 간첩으로 ‘조작’했다. 아버지 최씨는 선주라는 이유로 ‘주범’으로 몰렸다. 재판에서 징역과 자격정지가 각각 2년6개월 확정됐다.
최은수씨는 “아버지가 간첩죄로 누명을 쓴 것도 억울하지만, 아버지가 두 어선의 총책임자라는 이유로 고문을 엄청 당했다. 교도소에서 나온 아버지를 만났는데, 손톱·발톱이 하나도 없었다. 우리 동네 사람들은 다 아는 사실이다. 후유증으로 정상적 생활이 불가능했지만, 한마디도 못한 채 평생을 살다가 결국 후유증으로 돌아가셨다”고 말했다. 그는 억울하다고 했다. “글씨라도 알고, 세상 물정이라도 조금 알아야 간첩질도 할 것 아니냐. 아버지는 평생 가족을 위해 일만 했지, 낫 놓고 기역자도 모르는 분이었다.”
최은수씨의 동생도 그때를 회상했다. “당시 꼬마였던 내가 보안대에 밥 배달을 하러 오가면서 참상을 봤다. 같이 배 탔다가 보안대에 갔던 사촌형(최아무개씨)이 지하실에서 끌려나오는데 ‘심하게 맞으면 혀가 쑥 빠진다’는 걸 눈으로 봤다. 사촌형이 17살, 내가 14살 때 일이다.”
끝이 아니었다. ‘조작된 원죄’는 자식들에게 대물림됐다. 사건 당시 최씨는 ‘주범 아들’이란 이유만으로 보안대에 끌려가 끔찍한 폭행을 당했다. 마지막은 언제나 “맞고 당한 거 어디 가서 말하면 너는 죽는다”는 말이었다. 친한 친구들은 ‘간첩 가족 친구’를 뒀다는 이유로 보안대에 끌려갔다. 툭하면 가택수색을 나왔다. 군홧발로 집 안에 들어와 물건을 싹 뒤지거나 부수는 일이 다반사였다.
‘간첩 식구’란 눈총을 피해 장항 안에서만 여섯 번을 이사 다녔다. 객지로는 나갈 수 없었다. 외지에서 ‘간첩 가족’으로 낙인찍히면 무슨 변을 당할지 예측할 수 없었다. 대학도 그만뒀다. 대학 중퇴면 꽤 괜찮은 학벌이었지만 취직을 할 수 없었다. 신원 조회에서 ‘1순위 배제 대상’이 ‘간첩 가족’이었다. 물건 하나만 사려 해도 보안대가 따라와 조사했다.
그나마 아버지를 이어 배를 탈 수 있어서 행운이었지만, 집안은 쑥대밭이 됐다. 간첩사건 이전에 최씨 가족은 꽤 부자였다. 배 2척만 해도 아주 큰 재산이었지만 그것에 더해 쌀 1천 섬, 고구마 500가마의 농사를 지었다. 그러나 사건 이후 생계를 위해 재산을 모두 팔아야 했다. 최씨는 “자살하려고 몇 번 산에도 올라갔지만 내 새끼, 아내, 형제 두고는 못 죽겠더라”고 말했다.
장항과 가까운 전북 군산에서 살아온 서창덕(69)씨는 이들보다 2년 앞서 비슷한 일을 당했다. 1967년 5월28일 낮, 그는 어선 승룡호를 타고 연평도 해역에서 조기잡이를 하다가 북한 경비정에 피랍됐다. 북에 머무른 124일 동안 남쪽에서 그의 신분은 ‘가난한 어부’에서 ‘이적 간첩’으로 바뀌어 있었다. 그해 첫 조사에서는 불기소 처분을 받아 석방됐다. 그러나 1969년 1월 군산경찰서에 다시 연행됐다. 혐의는 반공법상 잠입탈출, 찬양·고무, 수산업법 위반이었다.
당시 군산경찰서의 범죄 인지 보고서 자료 작성일이 1969년 1월27일인데, 서씨의 진술조서는 같은 해 1월14일자로 쓰인 사실이 드러났다. 10일 이상 불법 구금된 것이다. 물고문, 전기고문, 구타, 잠 안 재우기 등 혹독한 고문이 이어졌다. 거꾸로 매달아 살이 터지도록 몽둥이로 때리거나 코에 물을 붓고, 꿇어앉힌 채 군홧발로 온몸을 짓밟았다.
서씨는 “구둣발로 차이는 게 다반사였고, 잠을 안 재우고 전기고문까지 하며 거짓 진술을 유도했다. 결국 고문을 이기지 못해 거짓말을 했다. 그때부터 고문이 줄었다”고 말했다. 함께 배를 탄 일부 동료는 거짓 자백을 하지 않고 버티다가 후유증으로 반신불수가 되거나, 불과 40대 초반에 죽기도 했다.
1969년 7월 서씨는 징역 2년과 자격정지 2년, 집행유예 3년형을 받았다. 삶이 무너졌다. 보안대가 선주한테 ‘간첩을 태우지 말라’고 겁을 줘서 배도 못 탔다. 인력사무소에 나가도 경찰들이 따라다니며 방해했다. 리어카 끌고 고물을 주우며 사는 게 제일 편했다. 100원을 벌어도 그게 낫다고 생각했다. 더 황당한 건, 17년 뒤인 1984년 이적 행위를 했다는 이유로 다시 기소돼 징역 10년형을 선고받고 7년 만에 가석방된 것이다.
정부는 승룡호를 지키지 못했다
서씨는 이제까지의 삶이 ‘악몽’이었다고 했다. 그는 “아버지도 ‘간첩 자식’ 뒀다는 이유로 약 먹고 돌아가셨다”며 쓴눈물을 삼켰다. 열 번 넘게 여자와 살아봤지만 ‘간첩 딱지’가 이들을 다 달아나게 했다. 세 차례나 이혼 법정에 섰고, 여자들의 바짓가랑이를 붙잡으며 매달려도 봤지만 소용없었다. 그렇게 청춘을 다 보냈다.
“판길이라는 동생은 주기적으로 불려가서 고문을 당하다가 갈비처럼 말라 죽었어. 맞아서 먼저 죽은 사람들 보면 몸이 새까매. 나도 죽으면 구렁이가 온몸을 감고(맞은 부분이 새까매지는 모습) 있겠지.” 서씨는 “정부가 우리를 지켜주지 못했고, 그것 때문에 평생을 악몽 속에 살게 됐다. 지금도 어느 때 나를 잡아다가 고문하는 게 아닐까 무섭다”고 했다.
가장 억울한 점은 그가 아무 잘못도 하지 않았다는 데 있다. 가난한 집에서 태어나 돈 벌러 바다에 나갔다. 안개가 잔뜩 끼었고, 북쪽 경비정이 있었다. 집으로 돌아오지 못했다. 정부는 승룡호를 지키지 못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