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6년 연대 항쟁
연대 항쟁.
쉽게 생각하면 아주 간단하다.
학생들은 매년 개최하는 범민족대회를 연세대에서 거행했고
경찰은 연세대를 그 집회 자체를 무산시키려 했고
그 과정에서 학생들은 쫓겨 건물로 피신하여 원치 않는 점거농성을 하였고
경찰은 끝내 무력 진압 하여 단일 사건 최대의 연행자와 구속자를 만들어 냈고
한총련은 이듬해 한총련 출범식에서 이석씨 프락치 오인 폭행치사 사건과 맞물려
급속한 쇠락의 길을 걷게 된다.
노태우 정권을 거쳐 소위 말하는 문민정부 김영삼 정권에서도
건대 항쟁, 연대항쟁과 비슷한 일이 일어날 뻔 한적도 있었다.
94년 서울대 범민족대회
때도 엄청난 숫자의 백골단과 전경들이 밤 12시 자정을 기해
페퍼포그를 앞세우고 서울대 정문을 돌파, 무력진압을 시도했었다.
하지만 서울대 범민족대회 당시 사수대는 사수대뿐만 아니라 일반 학우들도 결합해서 싸울정도로
워낙 투쟁의 결의가 높았고, 견찰의 야밤을 틈탄 기습작전이 교문은 돌파했지만 행사장인
아크로폴리스광장까지는 올라오지 못하고 중간에 사수대와 뒤엉켜 피튀기는 접전을 벌이던 와중에
후퇴하던 페퍼포그에 전경 한명이 깔려 척추가 부러지는 중상을 입고 퇴각 하였다.
이때도 헬기를 동원해 다음날까지 연속으로 최루액을 뿌려대고, 거의 연대항쟁과
비슷한 양상이었으나, 다음날 범민족대회를 마친 학생들이 자진해산하겠다고 하자
경찰이 서울대 후문길을 열어주었다.
한총련은 93년에 기존의 전대협을 계승 발전한다는 취지로 결성된
전국대학 총학생회연합체.
정식명칭은 '한국대학총학생회연합'의 줄임말.
93년 출범식 당시 주최측 추산 15만명의 대학생들이 고려대학교 대운동장에 모여
4년제 종합대학뿐만 아니라 2년제 전문대 총학생회까지 망라한 대규모 학생운동조직으로 출범했다,
NL계가 주도하고 PD계가 '따로 또 같이' 결합한 형태. 93년 출범식 당시 한총련 본집회가
고대 대운동장에서 열리던 시간에 PD계는 노천극장에 따로 모여 집회를 열고 있었다.
학생대중의 참가숫자가 기존 전대협과는 비교가 안되게 늘어나고, 이에 고무된 한총련지도부가
과격한 투쟁노선을 고수하는 와중에, NL과 PD계열의 갈등이 점차 노골화 되던 시기였다.
PD파가 소위 '통일지상주의', '달력투쟁'이라며 NL파의 무슨무슨 기념일 투쟁 관행을 신랄하게
비판. 예를들어 노동자와 시민 학생이 사망하는 일이 생겼을때 '열사의 주검안고 통일의 한길로
달려나가자' 등의 NL계의 뜬금없는 구호가 횡행했다.
어쨋든 엄청나게 불어난 학생운동의 동력에 자신감을 가진 한총련지도부는 대규모연합집회시
공세적 가투로 경찰의 저지선을 여러번 뚫고 거리로 진출하는데 성공,
강경 투쟁노선이 더 강화되는 경향. 원래 사수대(혹은 선봉대)는 경찰폭력에 맞선 학생운동의 집회사수조직이었으나 이 시기에는 경찰봉쇄선을 뚫고 거리로 진출하기도 했다.
96년 3월 29일 종묘공원 평화가두 시위 도중 경찰의 토끼몰이식 진압과 폭력에
연세대 2학년 노수석 열사가 사망하는 사고가 발생하였다.
김영삼 정권은 한총련등에서 주장하던 "대선자금 공개"
에 많은 부담을 가지고 있었으며 엄청나게 불어난 학생운동 세력에
불안감을 가지고 있었고 그에 대한 대처로 공세적인 시위 진압 방식을 고수한 것이 주요 원인 이었다.
한총련은 노수석열사 건에 대한 정부의 공식적인 사과와 대선자금 공개와 더불어
김영삼 정권 타진의 대정부 투쟁을 전면적으로 개시 하였다.
각 대학에서 전면적인 시위가 벌어지던 그 해 6월 조선대학교 시위 진압 도중
의경이 시위대의 쇠파이프에 머리를 맞아 뇌사 상태에 빠지게 된다.
한치의 양보가 없던 학생운동 세력과 정부의 과잉진압이 충돌하여 발생한 또 사고 였다.
이 사고는 김영삼 정권이 수세적 국면을 돌파할 수 있는 선동의 분기점이 된다.
해마다 815광복절이되면 참가인원이 1~3만명에 달하는 대규모 통일운동행사가 서울대, 한양대 등
전국 주요대학을 돌아가며 '범민족대회'라는 이름으로 NL계 주도하에 열리고 있었다.
96년 이 범민족대회가 연세대학교에서 열린 것이고, 그동안 커진 학생운동에 불안감을 느끼던
김영삼 정권이 조중동의 '주사파가 백주대낮에 쇠파이프를 들고 서울거리를 활보하는데도
정부와 치안당국은 뭘하냐'는 등의 설레발에 힘입어 작심하고 무력진압을 행한 것이 소위
'연대항쟁'의 큰 줄기.
그동안의 범민족 대회는 94년 서울대 집회를 제외하고 실제 집회가 열리는 행사장
내로의 진압을 하지 않아 왔었다.
그런데 이례적으로 96 연대집회는 8월 14일 낮 2시 45분께에 학생들이 남북학생연석회의를
강행하자 전경 6천여명과 헬기 11대를 동원해 연대 정문과 북문 동문쪽으로
1차 진압 작전을 시도하였다,
경찰의 진압에 사수대들은 폐타이어, 의자등의 바리케이트에 불을 지르고격렬히 저항했다. 경찰은 진압작전에 나선 지 40분 만인 3시 20분경에 바리게이트를 제거하고
노천극장과 이공대 대강당 등에서 해산작전을 폈고 압수수색 영장을 발부받은 학생회관 대강당 등에 대한 수색을 벌인 뒤 4시 17분경 철수했다.
사수대를 중심으로 한 학생들의 격렬한 저항에 경찰병력 일부가 부상당하고 무장해제 되기도 하였다. 정부는 후에 시위 학생수를 제대로 파악하지 못해 부적절한 경찰병력 투입과
진압방식이었다고 해명하였지만 이는 한총련의 폭력성을 강조하기 위한 여론 조작용 이었고
실제 조중동을 비롯한 언론에서는 매일 같이 학생들의 폭력성을 비난하는 기사와 방송을 내보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