옵션 |
|
2016년 메갈리즘은 뜨거운 감자였다. 탄핵 이슈가 없었다면 가장 논란이 되었던 사회현상일 수도 있다.
메갈리즘은 다른 사람들과 조금 다른 의미로 나에겐 특히나 크게 충격이었다. 구조의 해체에 대한 여러 관심이 그 한 가지 이유였고, 나름대로 페미니즘에 관심을 가지던 한 사람에게 전해지는 신선하고 참혹한 충격이었던 것 같다.
이 충격은 해가 바뀐 지금에도 그 여운이 가시지 않는데, 이러한 충격이 남아있는 것은 나에게만 한정되지는 않는 것처럼 생각된다. 아직도 메갈리즘에 대해 완전히 다른 접근을 가지는 사람들이 상대방의 목소리를 소거하려한다.
이 글은 특정한 목적을 가지고 쓰는 것이 아니다. 이번 사태를 보면서 떠올랐던 여러 단상들을 묶어낸 것에 불과하다.
(짧게 여러 편으로 나눠 정리해볼 생각이다)
지루한 서론은 집어치우고 바로 본론으로 들어가보자. 사실 더 쓸 말도 없고 여러 미사여구를 억지로 엮는 것은 손이 오그라들어서 못한다.
메갈리즘. 그들이 나타난 것은 여성 억압인가?
1.
‘Do not need a prince’
‘코르셋 벗기’
메갈을 이슈화시킨데 크게 기여한 문구와 그들의 주장이다. 그렇다면 그들은 억압을 더 이상 견디지 못하여 그 축적된 분노가 메갈리즘 사태를 통해 폭발한 것인가? 그렇지는 않은 것 같다.
이번 사태에 대한 기저 문제는 성적 억압이 아니라 오히려 성적 자유의 무한성이며, 여성의 고착화가 아니라 여성성의 파괴이다. 이 말은 여성억압이 이번 폭탄을 터트린 도화선이 아니라 기존 여성관념의 해체가 여성에게 주는 충격이 시발점이었다는 생각이다.
좀 단순화시켜서 얘기해보자.
내가 중학교때에는 동성애가 터부시되던 개념이었다. 근데 지금은 동성애자가 티비에 나와도 ‘그다지 특별하지 않은’ 느낌만 남긴다.
나이가 많은 분들은 ‘남자는 이래야지, 여자는 저래야지’ 라는 고정적인 관념을 가지고 계신 분들도 계시지만, 이러한 사회적 성차도 많이 희석된 것이 사실인 것 같다. (물론 이것이 물리적 현실 전반에 남성과 여성의 사회적 차이가 해소되었다는 주장은 아니다. 인식과 실재 변화의 간극은 언제나 난감하다.)
동시에 고려해야 할 것은 사회적 여성성 변화보다 너무나 빠르게 여성성에 대한 교육이 이루어지고 있다는 것이다. 바로 위에 말한 것처럼 인식과 실재의 변화는
남성, 여성으로의 나(혹은 다른 성 정체성으로의 나)는 우리 사회에서 항상 존재하지만 잡을 수 없는 그 무엇이다. 근데 이 문제를 더 확장해보면 성적 정체성 뿐만 아니라 개인의 정체성의 혼란도 과거에 비해 큰 것 같다.
어릴 때는 대학 진학이라는 이름으로 개인의 다양성은 ‘있지만 없는 것처럼’ 작동하는 교육시스템, 일단 먹고 사는게 문제인 노동시장은 ‘나’에 대해 생각할 여유를 거의 허용하지 않는다. 심지어 우리는 ‘가족’, ‘국가적 정체성’, ‘친구관계에서의 나’마저 희미해져가는 사회에 살고 있다.
너는 이런 사람이어야 해. 라는 명령으로부터 힘들게 벗어났지만 그 해방감의 찰나를 지나 ‘그래서 나는 누구지?’ 라는 의문점이 우리에게 몰려오는 것이다.
그리고 정체성 상실의 책임은 개인에게 돌아가고 있다.
너는 뭐든 할 수 있어. 근데 넌 누군데?
우리는 정체성을 찾지 못하는 불안감을 어떻게 처리할까? 이 불안감은 그대로 수용할 수 없는 불안이다. 한병철 교수가 말하는 것처럼 탈진할 때까지 매달리던가(내 친구는 공부를 열심히 해서 안도감을 찾는데 건강을 버려가며 공부하더니, 심지어 대학을 6년다니고 다시 대학원을 들어간다), 불안감을 숨겨야만 한다.
숨기는 것은 생각보다 간단하다. 립스틱을 사며 여성성을 잃어버리지 않은 것처럼 자기를 설득해볼 수 있고, 드라마나 영화를 통해 상실한 정체성 대신 극중 인물의 정체성을 잠시 채워넣어보기도 하고, 혼자 망상에 빠지며 현실에서 도피해보기도 한다.(나의 경우에는 습관적으로 책을 읽으며 작가가 되지 못한다는 사실을 잊어버린다)
이러한 불안 숨기기는 우리 뇌내망상과 실재의 간극을 더욱 증가시키고, 결국 망상을 부정하던지 아니면 현실을 부정하던지 갈림길에 서게 한다.
여성의 문제를 이야기하는데 현대사회의 정체성을 이야기하는 것은 ‘몸’ 때문이다. 위의 여러 방법들이 때론 빈틈을 보이면, 우리의 신체성은 그 틈으로 삐져나온다. 모든 것이 불확실한 것 같은 불안감속에 우리가 부정할 수 없는 것이 우리의 ‘몸’이기 때문이다. 특히나 우리 몸은 ‘특수한 경우’를 제외하고는 우리의 성정체성을 강력하게 붙들어주지 않는가?
(이와 유사한 것이 가족/혈연이다. 우리가 인지할 수 없는 유전자적 동일성이 소속감을 가지게 하는 것도 아니고, 단순히 외모적 유사성이 소속감 자체를 설명해주지도 않는다. 붕어빵인 사람들도 있지만 30대 부모님과 5살짜리 아이의 외모가 얼마나 다른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혈연에 대한 소속감은 내가 저 사람에게서 태어났다는 것을 부정할 수 없고, 니가 나에게서 나왔다는 것을 부정할 수 없다는 점이다.)
2.
They need a prince
그들은 왕자님 따위는 필요하지 않다고 말하지만, 과연 남성이 배제된 메갈리즘은 성립할 수 있을까? 왕자님은 필요하지 않지만 왜 그리도 6.9cm를 자꾸 주장하는가? 다른 사이트에서 운영되던 메갈 게시판의 음란물과 그들이 남성향 컨텐츠(?), 남자들이 군대에서 서로 몸을 탐한다는 그 어떤이의 이야기는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나?
우리 몸을 통해 정체성을 얻기 위해서는 타자의 인정이 필요하다. 하지만 우리는 우리 스스로의 몸 자체를 볼 수 없고, 우리가 바라보는 나의 신체는 신체의 일부분, 혹은 거울을 통해 보여지는 신체의 일부분이다. 정체성이란 ‘나 자체’에 대한 인정이라는 점에서 스스로 바라보기는 그 한계가 분명하다.
하지만 내 몸을 누군가에게 계속 노출시키며 ‘여성성’을 인정받기란 쉽지 않은 일이다. (벗고 나가봤자 여성성을 인정받기보단 미친 사람인 것을 인정받을 수 있을 것 같다)
그래서 우리는 내 몸과의 차이를 강조하며 내 몸의 정체성을 찾아갈 수밖에 없다. 그래서 제일 쉬운게 일베에게는 김치녀, 메갈에게는 한남이다. 왕자가 필요없다는 메갈의 로고 자체도 왕자님을 갈구하고 있는 것이다.
푸코의 광기, 아감벤의 호모 사케르는 우리 정체성의 성립에 있어서 누군가에 대한 배제를 통해 동질성을 형성한다는 것을 보여준다. 메갈은 남성을 그 배제 대상으로 설정하였고, 이는 그들에게 왕자님이 필수라는 것을 보여준다. 그리고 메갈의 정체성이 흔들릴수록 더 왕자님을 찾아갈 수 밖에 없다.
메갈이 한남에게 분노하는 것은 여성에 대한 차별로 환원시키기 힘들며, 차별보다는 차이 자체가 남성에 대한 배제로 나타나고 있다.
결국 do not need a prince라는 말을 뒤집어보면, 그들의 주장은 ‘선한’ 왕자님은 필요없고 ‘악한’ 나쁜새끼가 필요하다고 볼 수도 있지 않을까? 그래서 메갈은 일베와 싸우지 않고 오유랑 싸우고 싶어 했는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