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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설탕물 1
나는 재 속에서 천천히 타오르는 불씨다. 그런 생각을 자주 한다.
아무도 나를 만나기를 원하지 않는다. 나는 재 속에 가려진 불씨이므로. 꺼져가는 불씨를 되살리는 일은 너무 귀찮은 일이다. 아무도 나를 원하지 않는다. 나는 도구로서 사용되고 싶은데. 그러기를 기다리는데.
설탕물을 마시면 기분이 조금 나아질 것이다. 나는 설탕물을 마시고 스스로를 소진해가는 중이다. 아무도 나를 만나기를 원하지 않는다.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스스로를 꺼뜨리는 일 뿐이다.
나는 샤먼이다. 나는 제사를 지낼 때 이외에는 아무런 쓸모가 없는 존재이고 또 일상 속에서 마주치기엔 너무 기괴한 존재일 뿐이다. 나는 도구로서의 효용성 밖에는 아무런 가치가 없다. 나는, 사실 다른 많은 사람들도 그러하듯이, 도구로서만 존재할 뿐이다. 나는 기능이다.
나의 가면 안에 무엇이 있는지는 더 이상 궁금해하지 않기로 한다. 그것은 아무도 대답할 수 없는 질문이다. 아무것도 없거나, 대답할 수 없다.
인간이 서로를 도구로서만 대한다는 사실을 지각하는 것이 이렇게 괴롭다니. 모두가 도파민을 위한 버튼일 뿐이다. 우리의 게임 속 사후세계에서 사람들이 생존하기 위해 필요한 것은 딱 한가지, 어떤 종류의 진정제 뿐이다. 우리는 그것을 마약이라고 불렀다. 마약은 다른 존재를 죽일 때만 얻을 수 있다.
생각해보면 현실세계에서도 마찬가지이다. 우리는 다른 사람들이나 물건을 소모하고 소비해야만 생존해 나갈 수 있다. 나는 설탕물을 마신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서로를 너무 아무렇지 않게 소비한다. 교수님의 말 대로 아무런 의미 없이. 그리고 아무런 거리낌도 없이. 나는 그게 소름 끼쳤다.
나는 향정신성 약물을 복용했을 때만 잠시 빛을 발하고 사라지는 자아이다. 카페인 니코틴 알약 설탕 초콜릿. 타인 대신 자신만을 소모하고 소비해가며 지낸다는 것이 왜 그렇게 기괴한 일처럼 되었는지. 나는 아무도 접근 불가능한 분장 뒤의 나의 열화판 일 뿐이다. 그런 의미에서 나는 끝없이 키치일 뿐이다. 모두가 그러하듯이. 나는 설탕물을 마신다.
우리가 찾아낸 사후세계에서 사람들은 모두 불온한 존재였다. 그래도 우리는 사람들을 확립체라고 불렀다. 발버둥을 치고 우리의 형태가 어느 하나로 고정되고 나아지는 것은 하나도 없었다. 사후세계의 어떤 인물은 술에 취하면 그런 현실에 대해서 비아냥거리기도 한다. 우리는 이미 한 번 죽은 자들이고, 그럼 이것보다는 나아야 한다고, 최소한 이것과는 달라야 한다고. 하지만 모두가 외면하는 말을 꺼내는 자는 언제나 싸늘한 눈초리를 받는다. 왜 또 그런 말을 해? 그는 맥주를 마시다가 맥주를 가만히 쳐다볼 뿐이었다.
내가 배운 것은 인간만이 인간을 구원할 수 있다는 것이었다. 인간은 너무 복잡한 존재이다. 구원은 구원 받는 존재를 모두 포함하고 포괄해야 하므로, 인간을 구원하기 위해서는 인간만큼 복잡한 것이 필요하다. 하지만 사상도 종교도 하나의 인간만큼 복잡할 수는 없다. 모든 개체 중에서 오로지 인간만이 인간만큼 복잡하며, 고로 인간만이 인간을 구원할 수 있는 자격과 능력을 가졌다.
나에게는 그것이 이토록 당연했는데. 나에게 당연한 사실들은 사람들에게 별로 당연하지 않다. 나는 왠지 모르게 눈초리를 받는다. 내 착각일 수도 있다. 하지만 눈초리란 착각이더라도 실존하는 종류의 것이 아닐까?
나는 누군가 입김을 불어 주길 기다리는 불씨와 같다. 하지만 아무도 그러지 않을 것이다. 누군가 입김을 불어주더라도 나는 소생하지 못하는 것이 아닐까? 하는 의문이 그 증거이다. 나는 설탕물을 마신다. 나는 소진해가는 중이다.
누군가 나를 제사에 불러준다면. 나는 신을 불러낼 자신이 있는데. 나는 아직 신을 불러낸 적 없는 샤먼일 뿐이다. 내가 좋아하는 만화에서 우리는 모든 빈 곳을 자신의 처소로 삼는 신과 같은 존재에 대해 읽었다. 그는 절망이었다. 지금 와 생각해보면 그를 경배할 수 있는 존재는 불 뿐이지 않을까 생각이 든다.
돌멩이.
설탕물은 따뜻해야 더 달다. 결국 그 정도일 뿐이다. 잠깐의 따뜻함으로 설탕물을 데우는 일. 어차피 모두가 설탕물을 마신다. 우리 게임의 마약처럼. 연애도 친구도 장래도 직업도 결국 설탕물을 데우기 위해 소모되고 소비될 뿐이다. 모두가 설탕물이 더 달아졌다고 좋아한다. 내 생각에 중요한 것은 따뜻함인데. 뜨거운 설탕물을 마시지 않고 쥐고만 있는 아이를 보면 울 것 같다.
나는 긴 글을 적지 못한다. 솔직히 말을 부풀릴 자신이 없다. 그건 너무 역겨운 일 같다. 얼마 전에는 시인들에 대해 많은 혐오감을 느꼈다. 소설가에 대해서도. 문장을 기능으로 사용하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을 알았고 그건 너무 충격적인 일이었다.
사람들은 문장을 문장으로 내버려두지 못한다. 모두가 그걸 가지고 무언가를 하려고 한다. 하지만 문장은 그냥 문장일 뿐이다. 문장에는 소통도 의미도 지시도 없다. 문장은 정말 그냥 문장이다. 그걸 그냥 내버려두는 일이 이렇게 어렵다니. 모두가 모두를 기능으로서 대하고자 한다. 나는 그냥 그게 싫었다.
결국 나도 순수하지 않다.
위 문장에서 결국이라는 단어를 지운다.
결국 아포리즘만이 남았다. 아마도 이건 내가 멍청한 탓이다. 나는 글을 길게 하는데 소질이 없는 것 같다. 나는 이야기도 이미지도 별로 만들지 못한다. 그냥 그것들과 별로 친하지 않은 것 같다. 아마 이야기와 이미지도 나를 좋아하지 않을 것이다. 소비될 수 있는 모든 것에 대해 경멸을 품는 것은 괴이한 일이다.
나는 분을 덧칠한다.
모두 잘 지낸다 2.
예전에는 내가 살아있을 때에 어떤 인간이었다고 많이 가정해 보기도 했다.
내가 어떤 인간이었다고 상정해 보는 것은 일상에 많은 활력을 준다. 예컨대 내가 공부를 하는 인간이라면 내가 살아있을 적에 학자였다고 상정해보는 것이다. 나는 저번 생에서 학자였고, 따라서 이번 생에서도 어느 정도 그런 능력을 타고 났을 것이라고. 실제로 학자로서 죽은 후에 다시 학자가 되는 경우가 적지 않다. 나도 그런 사람들 중 한 명이고, 고로 그런 사람들처럼 잘 될 것이라고 생각해보는 것은 어렵지 않은 일이다.
이런 생각들은 사실 자기 합리화에 지나지 않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일반적인 자기 합리화와는 조금 다른 면이 없지 않다. 자기 합리화는 보통 일생에서 이미 일어난 사건을 긍정적으로 생각해보거나, 아니면 아직 일어나지 않은 사건에 대해서 낙관해보는 것을 말한다. 이미 일어난 사건은 과거의 일이므로 내가 일단 지각한 것이고, 아직 일어나지 않은 사건은 미래의 일이기는 하지만 결국 언젠가는 그 결과를 알게 된다. 이런 면에서 자기 합리화는 항상 반항 같은 것이 존재한다. 부정적인 일에 대해서 우리가 긍정적으로 낙관을 할 때면, 그것이 과거의 사건이든 미래의 사건이든 ‘아니야, 사실 난 망했어.’ 하는 생각이 최소한 무의식적으로 떠오른다.
하지만 우리는 결국 저번 생이 어떤 것이었는지 완벽히 알지 못한다. 모두가 약간의 암시 같은 것을, 저번에 이야기했듯이 마치 꿈을 기억하는 것처럼, 가지고 있기는 하지만 정말로 그 암시가 맞는지 우리는 확인할 길이 없다. 고로 내가 살아있을 적에 어떤 인간이었고 어떤 인생을 보냈다고 상정해보더라도 대부분의 사람들은 큰 반향을 느끼지는 않는다. 기분 좋은 꿈을 꾸면 실제로도 기분이 좋고 왠지 좋은 일이 생길 것만 같은 느낌을 받는다. 그렇다면 꿈이 잘 기억나지 않는 날에는 사실 기분 좋은 꿈을 꾼 것이라고 상정해봐도 괜찮은 것이 아닌가?
나는 이 방법을 많이 사용했었다. 공부를 할 때에는 내가 학자였다고, 누군가를 만날 때에는 내가 인간 관계가 원만하고 사회적인 기술이 좋은 인간이었다고, 상정하고는 했다. 이런 내 노력은 잠시 동안은 도움이 되기도 했다. 나는 공부도 썩 잘 하는 축에 속했었고, 노력하면 인간도 때때로 잘 만날 수 있었다.
하지만 다른 많은 처세술처럼 이 방법도 썩 오래 가지는 못 했다. 그건 내가 많은 일들에 쉽게 흥미를 잃는 일종의 허무주의자이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자주 적었듯이 나는 어떤 일들에 남들과 비슷한 호감이나 동기를 느끼지 못하는 것 같다. 애초에 그런 능력이 있는지 조차 의심스러울 정도로. 나는 때때로 사람들이 자신이 하는 일에 어떻게 열정이나 하고 싶다는 생각을 품을 수 있는지 의문스러워 하고는 한다. 그 일에 대해 낙관 하든 비관 하든 상관 없이, 어떻게 어떤 일이 의미 있다고 생각할 수 있는 것일까? 나에게는 이렇게 많은 일들이 별 것이 아니고. 또 나와는 무관하고. 그리고 이렇게 부질 없는데. 이전의 생이 그렇게 쉽게 꿈처럼 취급될 수 있고, 또 사람들이 자주 이야기 하는 것처럼 현재의 인생에 비하면 전혀 중요치 않은 일이라면. 현재의 생 또한 마찬가지로 취급하지 않을 이유는 또 무엇이란 말인가? 만약 많은 과학자들이나 사상가들이 말하는 것처럼 이 세계의 죽음이 다시 다른 세계로 가는 문이라면, 그 문을 지나는 순간 이번 생도 꿈처럼 너무 아무렇게나 취급해도 좋은 것이고, 또 문 너머의 세계에 비하면 너무 중요하지 않은 일이 될 텐데. 그리고 나에게는 그 문을 지나는 것이 다른 많은 문들과 마찬가지로 너무나 간단하고 쉬운 일처럼 느껴지는 것이다.
그것은 내가 가진 마지막 영상이자 기억이 쓰러진 의자였기 때문이다. 그래. 그것이 내가 이번 생에 가지고 태어난 암시였다. 나는 나에게 무척 처참하고 또 번뇌를 가져다 주는 어떤 사물이 이토록 도처에 있다는 사실에 놀란다. 나의 암시를 사람들이 아무렇지 않게 사용하고 그 위에 앉을 수 있다는 사실에. 당연하게도 나의 집에는 의자가 없는데, 그것이 남들에게는 별로 당연하지 않다는 사실에.
쓰러진 의자가 정확히 무엇을 암시하는지는 더 이상 생각하지 않으려고 노력한다. 물론 많은 일들이 그렇듯이 노력한다고 잘 되는 것은 아니지만. 어떻게 해도 그 영상이 정확히 어떤 상황이었는지 확신할 수는 없다. 나는 어쩌면 그냥 심장이 안 좋은 인간이었고 갑자기 심장마비가 와 쓰러진 것일 수도 있다. 나는 어쩌면 몸에 맞지 않는 알레르기성 음식을 먹다 쓰러진 것일 수도 있다. 나는 어쩌면 그냥 바보같이 뒤로 넘어져 뇌진탕으로 죽은 인간일지도 모른다.
그리고 나는 어쩌면 내가 생각해왔듯 의자를 스스로 차는 죽음을 선택했을지도 모른다.
차라리 내가 나의 죽음의 방식을 어느 쪽으로든 확신할 수 있었다면 지금보다는 덜 공허하게 지냈을지도 모르겠다. 예컨대 마지막 영상이 단지 의자가 아니라 의자와 밧줄이었다면. 그럼 나는 아마 처음부터 ‘그래 한 번 더가 나왔어. 이번 기회는 잘 해보자!’와 ‘이런 아직도 남았다니. 똑같이 한 번 더.’ 중에서 확실히 선택할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 어느 쪽을 선택 했을지는 잘 모르겠다.
사람들 사이에서 나는 많은 죽음의 가능성을 본다. 모두가 외면하는 가능성들이 나에게는 너무 명료하게 다가온다. 친구들의 말 속에서 나는 단어들이 서 있는 외면된 죽음의 카펫을 느끼고, 종종 그 말들은 서로 섞이어 어딘가로 실려가지 못하고 귀를 통해 나의 머리에 엉겨 붙는데. 저들은 카페에서 자리를 잡는 것만큼이나 아무렇지 않게 말한다. 사람들의 말 속에 화자도 모르게 깃드는 연기들을 본다. 발화 없이 생기는 연기를 나는 본 적이 없으므로, 나는 말들이 세계에서 가장 잘 타오르는 휘발성 물질임을 안다. 사람들 눈동자 안에는 의자가 있어 내가 다가오면 쓰러지려고 준비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어딘가에서 의자가 나를 향해 다가오는 것을 느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