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을 대충 보신 분들은 김만덕이 당연히 남자라고 생각했겠지만., 이분은 1739년에 태어나서 1812년에 생을 마감한 제주토박이 독신녀야.
조선시대에 독신녀라니!
스마트 폰으로 모든 것을 할 수 있는 이 시대에도 여자에게는 “너 독신이니?”라고 고개를 갸웃거리며 바라보는 웃기는 시선이 남아있는데 조선시대에 제주도에서 독신녀로 파란만장한 삶을 살았다?
현재 제주시에 있는 모충사에 그녀를 기리는 만덕비가 있는데 앞뒤 면에는 아래와 같은 내용이 적혀 있다고 해.
<행수내의녀 김만덕지묘.>
본관은 김해이며 탐라 양갓집 딸이다. 어려서 부모를 여의고 가난하여 고생이 심했다. 옷과 식비를 줄여 재산을 크게 불렸다. 칠순에도 외모가 신선 부처와 같았고, 눈동자 두 개가 빛나고 맑았다.”
자 그럼 이 묘비명을 시작으로 하여 그 녀의 일생을 추적해보자고.
고아인데 여자의 신분으로 제주도에서 어떻게 큰 돈을 벌었고, 어떤 일을 했기에 기념관까지 세워지게 된 거지?
묘비명에 내의녀 라고 적혀 있는데. 의녀로 활동을 한 건가?
조선시대에는 제주도 여자들은 육지로의 진출이 법으로 금지 되어 있는데 어떻게 내의녀가 되었을까? 궁금한 것이 한 두 가지가 아니야.
그래도 차근차근 살펴 보자고 원래 영웅의 힘겨웠던 시절을 짚고 넘어가야 뒤에 듣게 될 성공 스토리가 더욱 더 가슴에 와 닿는 법이니까.
김만덕은 -제주도 올레길이 생기기 270년도 전인- 1739년 (영조15년) 양인 이었던 아버지 김응열과 어머니 고씨 사이에서 태어났어. 하지만 12살이 되던 1750년 전국에 역병이 퍼지고 이 여파는 제주도까지 미치게 되었지. 초등학교도 졸업을 하지 못 한 나이에 부모를 잃은 김만덕은 기생집 몸종으로 지내며 생명 연장을 하게 되었어.
미모가 출중해서 기생집으로 간 거냐고?
후에 영의정 체제공의 기록에 따르면 그녀는 엄청난 미모의 소유자는 아니었어. 고로 12살의 고아소녀 김만덕은 기생으로서도 어드밴티지가 전혀 없었지. 그녀는 오직 살아남겠다는 생존본능과 성실함 밖에 믿을게 없었던 거지. 출발은 기생의 몸종이었으나, 워낙 열심히 일을 하다 보니 어느 날 기생의 수양어머니에게 눈에 띈 거야.
“명월아.. 저기 저 아이 이름이 머라 했더냐?”
“네. 만덕이라는 아이입니다. 양인집안 아이인데 지난번 역병이 돌 때 양가부모를 잃고 떠돌다 얼마 전부터 제 수발을 들고 있는 아이입니다. 어찌 그리시오?”
“애가 키도 크고 덩치도 큰 것이 굼떠 보이는데 일 하는 게 아주 야무지구나. 그리고 무엇보다 눈빛이 살아있어. 독기로는 설명 할 수 없는 광채가 나는구나. 내가 한 번 다듬어 볼 만 하겠다. 물건 한 번 만들어보자.”
“어머니. 제 눈에는 기생의 재능은 전혀 안 보이는데 어찌 그런 말씀을! 성실하다고 기생이 될 수 있는 게 아닌 걸 아시면서.”
“모르는 소리 말아라. 니 년이나 내가 저 아이 덕 보고 살 날이 올 것이다.”
이때부터 김덕만에게 혹독한 기녀수업이 이어졌어. 좀 부족한 재능은 악착 같은 승부근성으로 대신하며 입단 첫 해부터 슈퍼루키로 조명을 받으며 승승장구 했다고 해.
김만덕 본인은 기생을 천직으로 여기지 않고 흔해빠진 말로 자기 인생에서 2보 전진을 위한 1보 후퇴로 여겼었어. 성공의 수단이자 다음 단계로 가기 위한 전 단계로 여긴 거지. 고아인 그녀가 이 험난한 세상에서 죽지 않고 인간적인 대접을 받는 유일한 길은 오직 돈 이었지. 이 후에는 정승같이 돈을 쓰게 되지만 기생생활 기간 동안은 주변 동료들에게 좋은 평판은 듣지 못했다고 해.
그 당시 동료들의 증언을 재구성 해 보자고.
이 증언은 1794년 제주목사로 재직 중이던 아버지에게 들러 몇 달 동안 머물렀던 심로숭이란 사람의 기록을 바탕으로 재구성 해봤어.
“아 지금이야. 다들 만덕이라고 이름도 잘 못 부르지만. 그 당시 어땠냐고요? 말도 말아요. 얼마나 지독했는지. 한 마디로 돈에 환장한 돈 벌레였소. 우리도 다 같은 기생처지지만 그런 독종은 첨 봐. 흔히 남자 단물까지 빨아 먹는다고 하잖아. 단물 빠는 과정에 기생도 사람인지라 나중에는 남자에게 미안한 마음도 들고 해서 조금씩 챙겨 주기도 하고 해. 그런데 그 인간 아니..그 사람은 남자 바지저고리까지 벗겨버린 거야. 은유적인 표현이 아니라 진짜로 그렇게 모은 바지 저고리가 수백 벌 이었어요. 그러니 기생들 사이에서도 그 이에 대해서는 치를 떨었지. 머 소문이야 과장되게 마련이지만 독종인건 확실했어요. 그리고 그 눈빛이 예사눈빛이 아냐. 멀 해도 할 줄 알긴 알았지.”
이렇게 개 같이 돈을 벌은 김만덕은 20살이 넘자 관아로 찾아가 생떼를 쓰기 시작해.
“사또 저는 본래 양인집안의 자식 이었으나 굶어 죽지 않기 위하여 어쩔 수 없이 기적에 이름을 올리게 되었습니다. 이제 제 앞가림을 할 나이도 됐으니 기적에서 제 이름을 빼 주시기를 간곡히 청하는 바입니다.”
“멋이라? 네가 살아보겠다고 기생을 하겠다고 할 때는 언제고 이제 와서 먹고 살 만하니 기록을 지워 달라고? 내가 왜 너에게 그리 해주어야 하느냐?”
이 말을 들은 김만덕은 위에서 여러 차례 언급 된 그 특유의 눈빛으로 사또를 바라보며 말을 이어.
Compound eye (겹눈) :곤충류, 갑각류 등의 특이한 눈으로 흔히 복안이라도 함. 낱눈이 벌집모양으로 모여서 형성. 어쩌고 저쩌고……
본인이 이런 저런 자료를 대충 뒤져보니 쉽게 말해 꿀벌의 눈 같은 형태라고 설명이 가능해. 그런데 갑자기 왠 과학 다큐냐고?
김만덕의 눈은 이 겹눈이라는 소문이 파다했다고 해.
훗날 호기심 대 마왕 다산 정약용께서 직접 김만덕을 만나 눈을 자세히 확인 해보니 겹눈은 아니었다고 말했다고 하는데, 김만덕은 정약용의 방을 나오면서 이렇게 말했다고 해.
“누가 머래도 나는 겹눈이다.” 소문이 진실로, 진실이 믿음으로 그 믿음이 기적을 이루어 낸 게 아닐까 싶기도 한데, 아무튼 이 날도 김만덕은 그 특유의 눈빛으로 사또를 응시하며 다시 한 번 간청했고 사또는 오케이 사인을 내렸어. 머라고 말했쓰까?
“사또! 소녀 비록 천하고 개 같이 돈을 벌었지만 앞으로는 절대 그런 일이 없을 것입니다. 그리고 제가 큰 돈을 벌게 되면 반드시 우리 백성들을 위해 귀하게 쓸 것이니 제발 한 번만 제 말을 믿고 청을 들어 주십시오..”
이 약속은 결국 지켜졌는데, 이제 그녀가 탐라 제일의 거상이 되는 과정을 살펴 보자고.
아 그리고 어차피 부자만 되면 장땡인데 학벌이나 신분세탁이 왜 필요하냐? 스토리의 개연성이 떨어진다. 저렇게까지 해야 할 이유가 머냐고 따지실 예리한 겹눈의 소유자들이 계실 법 한데. 부연설명을 하자면.
김만덕이 기생집에서 일을 시작 하고 겨우 입에 풀칠을 할 때 동생들이 구걸로 끼니를 때우고 있었나 봐. 혼자 살아남기도 힘들었기에 그 들을 잘 돌보지 못했는데, 김만덕이 기생으로 이름을 날리게 되니 주변 친지들이 가족도 내 팽개친 독한 년이네. 양인 집에서 기생이 되서 집안 망산 다 시키네 하면서 미주알고주알 뒷담화를 다녔다고 해. 이제 좀 설명이 됐나?
기생 신분에서 벗어나자 마자 김만덕은 흩어진 가족들을 한 집으로 모으고, 주둥아리를 나불거리던 친척들의 더러운 입에 더럽게 번 돈을 쑤셔 박아줬더니 모두가 꼬리를 살랑거리며 집을 찾아와서 이제는 우리 가족이 모두 화해를 했구나 라며 입 방정을 떨었다고 해.
조선시대 기준 이미 노처녀이지만 김만덕은 결혼 따위는 안중에도 없었어. 이제 진짜 돈을 벌기 위해 오늘도 다시 허리띠를 졸라 매었어. 어제의 전직 기생이 오늘은 CEO로 아침을 맞이 하게 되었어.
객주 집을 오픈 한 거야. 동네 사람들을 불러 떡도 돌리고 이 사람 저 사람들의 축하 인사를 받는 와중에도 만덕은 ‘만덕객주’의 주인이 자신이라는 사실이 도무지 믿기지가 않아. 자장면이 싫다며 너 먼저 먹으라는 어머니도 없었고, 천한 기생이라고 이유 없이 매를 맞아도 일러 바칠 아버지도 없이 오롯이 혼자 힘으로 이 모든 걸 해낸 거야. 12살 여자아이가 세상과 몸으로 맞서 싸워 이루어낸 결과야!
이제 직원들 앞에서 기생출신 젊은 사장은 일장 훈시를 시작해
“우리 객주를 드나드는 모든 상인들은 귀한 손님입니다. 그리고 그 들이 가지고 오는 다른 지역의 물산의 많고 모자람이나 가격의 변동은 보물과도 같은 것입니다. 손님들을 대할 때 임금님을 대하듯이 해야 할 것입니다. 나만 믿고 따른다면 주 5일 근무에 매년 특별 상여 500%가 헛된 꿈이 아닐 것이오.”
그녀는 이렇게 정보를 귀하게 여겨 상품의 유통과정을 익힌 후 사업 초창기에는 전라도에서는 쌀을 사들이고 제주도의 특산물인 약재, 전복, 갓 등을 수출(?) 하면서 이익을 내기 시작했어.
사업에 대한 촉이 생기자 가격변화를 예상하여 더 많은 이익을 창출하고, 신 사업에도 손을 대었는데 한라산에서는 흔한 사슴을 이용하여 녹용 사업을 론칭했어. 이어 난초 재배에도 영역을 넓혔는데 이 것마저 트리플 대박.
이렇게 승승장구 하다 보니 만덕객주는 어느 새 대형 무역 거래소가 되어 있었어.
또한 전 직장생활에서 얻은 노하우로 상류층 사모님들이 좋아할 만한 옷감과 장신구, 화장품까지 취급하며 귀족사회의 트랜드를 이끌기 까지 한 거야. 이런 게 또 몇 개 안 팔아도 돈이 엄청 되잖아.
그녀는 이런 식으로 하는 일 마다 대 성공을 거두고 마침내 대거상이 되었어. 그러던 어느 날 문득 거울 보고 56세가 자신을 발견 했어.
‘이쁘지는 않아도 곱던 얼굴은 온데 간데 가 없구나. 그래도 누구보다 열심히 살았고 남에게 해 안 끼치며 돈도 충분히 벌었구나. 만덕아 수고했다. 이제 세상과 한 약속을 지켜야 할 시간이다..’
그녀는 전 재산을 환원 하기로 했어.
가장 적절한 시기에 이런 결정을 내렸는데 1795년 제주도에는 기상악화로 인한 식량 부족으로 10만 명이던 인구가 3만 명까지 줄었다고 해. 무려 7만 명의 사람들이 아사를 한 거야. 정조는 제주도로 식량을 실은 배를 출발 시켰으나 태풍 때문에 식량공수 작전은 실패를 하고 말아.
“거 누구 없느냐?”
“네. 찾아 계시옵니까?”
“지금 당장 전 재산을 현찰화 해서 전라도 지방으로 가거라. 그리고 쌀 500섬을 실어 오너라. 50석은 여기 적힌 내 평생의 은인들에게 나눠주고 나머지 450석은 관아에 보내도록 해라.”
“정..정말..전 재산을 이 일에 쓰시려고 하시는 겁니까?”
“자네도 독립하면 반드시 하나만 지켜 주게. 돈은 자네 방식으로 벌어도 되지만 쓰는 건 나처럼 해주게. 모으는 재미에 빠지기만 하면 악인이 되지만 나누는 것에 뜻을 두면 만인이 행복해 지는 법이라네.” (이건 제가 김만덕의 입을 빌어 세상에 하고 싶은 말인데 좀 멋지지 않나요?^^)
이렇게 전 재산을 투자해 제주 도민을 살려내니 도민의 영웅이 되었어.
제주목사는 조정에 이 사실을 알리고 정조는 크게 기뻐했다고 해.
“나라도 과인도 하지 못한 일을 섬에 사는 아낙이 해냈단 말이냐? 참으로 부끄럽기 짝이 없다. 여봐라 도승지. 내가 머라도 해 주고 싶구나. .”
“전하. 제가 이미 알아보았으나 돈이나 재물은 필요 없다고 하고 여인이라 국법상 벼슬을 내려 줄 수도 없습니다.”
“그래? 그럼 내 무엇이던 소원을 들어 줄 테니 3가지만 소원을 말해보라고 하거라.”
시간을 빨리 돌려 보자고. 임금의 명을 받고 도승지는 그녀의 3가지 소원을 확인 하여 보고를 하게 되었어. 도승지는 어금니를 꽉 깨물고 웃음을 참으며 정조에게 보고를 하였는데 그녀의 소원이란 것이 무척이나 귀엽기 때문이 아닐까?”
“저의 제일 큰 소원은 임금님을 뵙는 것이고 두 번째는 한양구경, 세 번째는 금강산 유람입니다. 라고 합니다. 전하.”
“고래? 너무 소박한 거 아니냐? 첫 번째 소원은 나 듣기 좋으라 한 말 일터, 진짜 소원은 금강산 유람 이겠구나. 도승지는 지금 당장 김만덕이 지나는 고을에 역참들에게 일러 호위를 지시 하도록 하고 숙소 및 각종 편의제공에 하등의 불편함이 없도록 하여라. 또한 탐라의 여인은 뭍으로 올라 올 수 없으니 그녀에게 명예직인 내의녀를 내려 한양으로 올 수 있는 편법을 쓰도록 하라.”
“전하. 방금 말씀 하신 편법이란 단어는 사초에서 빼도록 하겠습니다.”
“아 그렇지,,, 굳이 내가 그 말을.. 그리고 이왕 내리는 명예직이지만 내의녀 최고직인 행수에 봉하도록 하라. 마지막으로 한양에 구경을 마치고 금강산으로 떠나기 전 나랑 조찬도 준비하도록 하고”
정조의 김만덕에 대한 사랑은 형식적인 것이 아니었어. 영의정 체제공을 시켜 그녀의 일대기를 쓰게 하고, 초급 관리들 진급시험과목으로 진입 시켰다고 해.
마침내 제주 섬 소녀가 57세의 나이에 국민스타가 되어 한양으로 입성을 하게 되었어. 그녀가 지나는 고을 마다 온 동네 사람들이 나와 박수를 보냈다고 해.
‘나도 저 분처럼 될 테야’ 하는 김만덕 키즈들이 많지 않았을까?
한양구경도 하고 임금도 알현하고 그녀는 마침내 금강산 유람까지 마치게 되었어. 떠나는 그녀에게 78세의 체제공이 이런 말을 했다고 해.
“너는 탐라에 태어나 한라산의 백록담 물을 마시고, 이제는 금강산을 두루 구경 하였으니 온 전하의 사내들 중에서도 이런 복을 누린 자가 있겠느냐?”
제대로 걸 크러쉬 아냐? 꼭 내 글이 아니어도 이 분의 일생을 한국의 재벌들이 봤으면 싶은데, 쉽지 않겠지? 봐도 바뀔 사람들 아닌 거 알지만 그래도……혹시나 하는 마음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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