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밤 8시 반. 방학을 맞이한 학교 앞은 인적이 드물었다.
아니, 원래의 7월 31일대로였다면 여름이 내뿜는 열기로 두근대는 청춘의 심장을 안은
학생들이 학교 앞을 헤매고 다녔겠지만, 지금은 상황이 그렇지 않다.
겨울인 7월 31일인 것이다. 겨울답게 8시 반임에도 한밤중인 것처럼 하늘은 어두웠고,
추위를 피해 사람들은 실내에 머물러 있었다. 그리고 바로 지금이 신선이 말한 그 때였다.
나는 그 때를 놓치지 않기 위해 학교 앞 까페 테라스에 서 있었다.
내복에 목도리에 점퍼까지 꽁꽁 동여매고 있었지만, 추위에 약한 탓에
발을 동동 구르고 있었다. 머릿속으로는 신선이 설명한 시나리오를 계속 반복하고 있었다.
신선의 시나리오는 간단했다. 눈의 여왕이 학교에서 내려와 횡단보도를 건너려다가
오는 차를 보지 못하고 치일 뻔 하는 것을 내가 나타나 구해준다.
위험에서 공주를 구해 준 왕자님효과, 깜짝 놀라 심장이 뛰는 것인데 나를 보고
심장이 두근거리는 것이라고 착각하게 만드는 흔들다리효과를 노린다는 것이었다.
진짜 신선이라 하고서는 신통력을 발휘하지는 못하고
심리학책 여기저기서 긁어모은 이론을 내세운 것뿐이다.
그럼에도 그 말에 내가 지금 여기 나와 서 있는 것은,
혹시나 하는 기대와 역시 내가 세뇌에 빠지기 쉬운 사람이기 때문이겠지.
시간은 어느덧 9시를 가리켰다. 생각해보니 눈의 여왕의 근로는 오후 1시부터
도서관 폐장까지다. 그리고 도서관 폐장은 9시. 당연히 눈의 여왕은 9시에 도서관에서 나와
언덕길을 내려올 것이었다. 나는 무식하면 손발이 고생한다는
옛 선조들의 말을 뼛속 깊이 체감할 수 있었다. 그리고 9시 5분이 되었을 때,
교문에서 눈의 여왕이 모습을 나타냈다. 눈의 여왕이지만 추위는 느끼는지
주머니에 손을 넣은 채로 종종걸음으로 내려오고 있었다. 그 모습이
아기새 같아 귀여웠다고 느껴졌다면 내 솔로생활이 너무 길었던 탓일까.
나는 고개를 흔들곤 다시 마음을 다잡았다. 신선이 진짜 신선이 맞는다면
이제부터 신선이 얘기한 시나리오가 펼쳐진다는 뜻이다. 그 얘기는
겨울이 끝나고 말고를 떠나서 내가 눈의 여왕을 구하지 못하면 눈의 여왕이
교통사고를 당한다는 뜻이다. 그렇게 생각하자 갑자기 긴장됐다. 입이 마르기 시작했다.
눈의 여왕이 내려왔다. 그런데 눈의 여왕 귓가에 무언가가 대롱대롱 매달려 있었다.
나는 눈을 찌푸려 그것에 집중했다. 머리카락처럼 보였던 그것은 바로 이어폰이었다.
눈의 여왕의 두 귀에서 내려온 이어폰은 그녀의 턱 쪽에서 하나로 만났고,
하나로 이어진 그 선은 눈의 여왕의 오른쪽 주머니로 들어가 있었다. 음악을 듣고 있는 것인가.
그 순간, 눈의 여왕이 횡단보도로 발을 내딛었다. 그리고 왼쪽에서 차가 나타났다.
신선의 시나리오대로다. 침을 꿀꺽 삼켰다. 차는 눈의 여왕을 발견하고 경적을 울렸지만
눈의 여왕은 앞만 보고 걸을 뿐이었다.
‘음악소리가 큰 것인가!’ 나는 눈의 여왕을 구하기 위해 달려가 몸을 날렸다.
차가 급브레이크를 밟아 미끄러지는 소리를 들으며 나는 정신을 잃었다.
* * *
눈의 여왕은 내 옆에 사과가 깎여있는 접시를 내려놓고 “얘기 나누세요.” 하고는
병실 밖으로 나갔다. 나는 신선과 얘기를 하기 위해 침대를 일으키게 조절했다.
두 다리와 왼쪽 팔이 골절이었기에 나는 좀 불편했다. “다행이지 않소. 모두가 해피엔딩이오.”
신선은 사과를 입에 물고, 너무나도 맛있게 사과를 씹었다.
신선은 앞쪽에 神仙이라고 쓰여 있는 반팔 티와 반바지를 입고 있었다.
내가 글자를 지적하자, 요즘은 신선들도 자기 PR시대라고 주장했다.
결과적으로 눈의 여왕은 교통사고를 면했고, 나 또한 이렇게 살아있다.
그리고 신선의 말대로 7월 31일 밤의 그 사건이 계기였는지
다음날인 8월 1일부터는 언제 겨울이었냐는 듯 기온이 31도로 올라갔다.
눈은 금세 녹았으며 사람들은 목도리와 두툼한 옷을 정리하고 반팔 반바지를 꺼내
입고 다니기 시작하였다. 이 계절실종 및 되찾음 사건의 주인공이
눈의 여왕과 나라고는 아무도 생각 못 할 것이다.
아니, 신선만큼은 그렇게 생각하고 있다.
“그럼 이만 가보겠소. 어서 나으시게.” 신선은 마지막 사과를 손에 들고
작별인사를 한 뒤 병실 밖으로 나갔다.
눈의 여왕은 병실 바로 옆의 의자에 앉아 있었는지 ‘좀 더 있다 가시지’ ‘아니오. 사과 고마웠소.’
같은 대화가 살짝 열린 문틈으로 흘러 들어왔다.
잠시 후 눈의 여왕은 다시 병실로 들어와 내 옆 자리에 앉았다. 나는 눈의 여왕을 쳐다보았다.
눈의 여왕도 시선을 느꼈는지 나를 쳐다보았다. 나도 모르는 사이에 내 왼쪽 입가는 올라가 있었다.
* * *
사실 이 얘기는 2년 전 얘기다. 현재의 나는 몸도 완쾌되었고 고시를 준비하며
도서관에서 열심히 공부하고 있다.
나와 눈의 여왕이 그 뒤에 어떻게 지냈느냐는 얘기는 적지 않겠다.
긴 솔로생활을 하면서 느낀 게 자신의 연애사를 주절주절 자랑하듯 늘어놓는 사람처럼
꼴불견이 없다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여기서 펜을 놓으려 한다. 독자들이여.
나의 이 남자다움을 이해해 주시길 바라며,
책을 덮으며 나와 눈의 여왕의 미래를 잠시나마 축복해 주시길 바라는 바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