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지와 함께하지 않는 첫 명절을 보내시는 어머니께서 바람도 쐴 겸 이번 설날에는 서울로 오시겠다고 했다.
어머니께서는 광화문 교보문고, 대한극장, 덕수궁 돌담길 등 아버지와 연애 시절부터 신혼 초 추억이 있는 장소를 다니시며
아버지와의 기억을 떠올리셨다고 한다.
그리고 설날 당일 우리 집에 형제들이 모두 모였다. 아버지께서 돌아가신 후 첫 명절.. 조카 녀석과 삼삼이 덕분에
우울할 줄 알았던 분위기는 오랜만에 웃음으로 가득했다. 삼삼이는 어린이집에서 배워 온 엉덩이를 씰룩쌜룩하는 세배를 어른들에게
했고, 조카 녀석은 새파랗게 어린 동생에게 그동안 독차지하던 귀여움을 뺏길 수 없다는 질투심인지 다른 어떤 해 보다 격렬하게
소리 지르고 동작을 크게 하며 세배를 했다.
오랜만에 삼 형제 부부가 모여 어머니가 보는 앞에서 "똥이나 먹어! 형 죽어! 쌌네 쌌어.. 등의 훈훈한 대화가 오가는 멱살잡이 수준의
화투패가 오갈 때 아이들은 (특히 조카 녀석..) 심심함과 무료함에 지쳐가고 있었다.
그때 조카 녀석이 형수의 눈치를 보며 말을 걸었다.
"엄마 나 포켓몬고 하면 안 되나?"
순간 형수의 표정이 큰형이 작은형에게 피박에 쓰리고를 맞았을 때보다 더 험악하게 변했다. 그리고 짧고 단호하게 말했다.
"안돼!"
"나 심심하단 말야! 엄마 아빠는 도박하잖아! 나도 놀고 싶단 말이야!!"
하나밖에 없는 소중한 조카 녀석이 우리를 가족 도박단으로 만들어 버리고 있었다. 녀석은 바로 동작을 바꿔 한동안 보지 못했던 뒤집어진 거북이
자세로 바둥거리며 "포켓몬고!! 포켓몬고 하고 싶다고!!" 라고 외치기 시작했다. 그리고 옆에서 구경하던 삼삼이도 조카 녀석을 따라 자세를
취하기 시작했다.. 거실에는 두 마리의 거북이가 유흥과 쾌락에 빠지고 싶은 탈선의 몸부림을 치고 있었다.
형수님은 표정 관리를 하며 4세부터 10세 아이들이 명절에 가장 두려워하는 말인 "너 이따 집에 가서 보자.." 라고 말씀하셨지만, 형수님의
강렬한 협박에도 불구하고 조카 녀석의 몸부림은 더 격렬해졌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어머니께서 형수를 향해 "아니.. 애가 서점 간다는데 보내주지 그러니? 내가 데리고 갈께.." (어머니는 포켓몬고를 포켓문고로
들으셨고 아동 전문 서점으로 아셨다고 한다..) 형수님은 어머니께 포켓몬고가 서점이 아니고 핸드폰 게임이며 밖에 나가서 해야 하는 게임이라고
말씀을 드렸지만, 조카와 삼삼이는 어머니께 매달려 "할머니 포켓몬고 하고 싶어요!!" 라고 간절히 외치고 있었다.
어머니께서는 손자들에게 점수를 따고 싶었는지 아니면 손자들의 간절함에 마음이 움직이셨는지 "애들이 이렇게 하고 싶어 하는데 하라고 하자..
명절인데 얘들도 하고 싶은 거 해야지.. 내가 데리고 나갔다 올게. 애들 옷 따듯하게 입혀봐.." 조카와 삼삼이는 뭐가 그리도 좋은지 큰 소리로
할머니 최고! 할머니 나이스! 할머니 ! 할머니!를 외치기 시작했다.
어머니와 아이들이 빠져나간 집은 조용했으며, 화투짝이 서로 부딪치는 소리만이 집안에 가득했고 내 지갑은 점점 두툼해지고 있었다.
1시간이 지나도 어머니에게 연락이 없자, 형수님과 삼삼이 엄마는 조금씩 불안해지기 시작했는지 계속 나와 형에게 어머니께
전화 드려보라고 말했다. 그리고 내가 어머니께 전화 했을 때 집안 한 구석에서 요란하게 전화벨이 울리기 시작했다. 어머니는 휴대폰을 두고
나가셨던 것이었다.. 조카 녀석이 들고 나간 형의 핸드폰으로 전화 했을 때도 통화가 되지 않았다. 분명 전화가 올 때마다 조카 녀석이
끊어버리는 것이 분명했다.
그렇게 30분 정도의 시간이 지났을 때 내 전화기가 울리기 시작했다. 익숙한 그 번호 바로 형의 전화번호였다.
어머니는 지친 목소리로 (폭염이 기승하던 한여름 밭에서 일하실 때도, 추운 겨울 비닐하우스에서 일하실 때도 지치지 않던 어머니였는데...)
"성성아.. 제발 차 가지고 우리 좀 데리러 와라.."
"어디신데요?"
"내가 어딘지 알아 여기가.."
"어딘지 모르시는데 제가 어떻게 모시러 가요? 주변에 뭐 큰 건물 없어요?"
"잠깐.. 무슨 큰 찜질방이 있어.. "
"*** 찜질방이요? 왜 거기까지 가셨어요?"
"몰라 **이 녀석이 괴물 잡는다고 여기까지 끌고 왔어. 삼삼이는 다리 아프다고 해서 계속 안고 다녔더니 죽겠다. 빨리 좀 와.."
어머니께서 계신 곳은 우리 집에서 지하철 2개 역 정도의 거리였고, 이러다 어머니께서 좋은 명절에 몸살이 날 거 같아 빠르게 그곳으로 어머니를
모시러 갔다. 그리고 그곳에 도착했을 때 핸드폰을 마치 나침반처럼 들고 앞장서서 걷고 있는 조카 녀석과 그 뒤를 삼삼이를 업은 어머니께서
조카 녀석의 이름을 외치며 그만 좀 가! 라며 애처롭게 부르며 따라가고 있는 모습이었다. 그 모습을 보고 왜 그리도 웃음이 나는지..
이제 집에 들어가자는 나의 말에 조카 녀석과 삼삼이는 들어가기 싫다고 반항했지만, 강제로 내 손에 끌려 집에 돌아왔다.
어머니께서는 가족 앞에서 포켓몬고 대모험 이야기를 시작하셨는데, 처음 초등학교 운동장에 갔을 때 만 해도 조카가 하고있는 게임이 신기하기도
하고 신나게 운동장을 뛰어노는 삼삼이를 바라보며 흐뭇하셨다고 했다. 그런데 용마산을 등반하고 (물론 입구의 놀이터까지만..) 용마산 근처의
몇 개의 아파트 단지를 헤매고 중곡역까지 두 망나니와 함께 걸으시면서 왜 형수님께서 말리셨는지 이해가 됐다고 하셨다.
"그리고 그 썩을 괴물들이 말이야.. 알을 던지면 곱게 들어갈 것이지.. 튀어나오고.. "
그리고 형수님에게 아주 작은 목소리로...
"지워.. 저 사람 잡는 썩을 것 당장 지워.." 라고 하셨다.
그날 밤 피곤하셨는지 어머니께서는 일찍 잠이 드셨고, 잠든 머리맡에 있는 핸드폰에 나는 조용히 포켓몬고를 다운 받아 드렸다.
어머니의 무료한 전원생활에 새로운 활력소가 되었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