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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국을 통일한 진(晉) 제국 - 22
게시물ID : history_13078짧은주소 복사하기
작성자 : Belisarius
추천 : 23
조회수 : 1262회
댓글수 : 7개
등록시간 : 2013/12/18 11:13:40
 
 
- 진(晉)의 굴욕 -  
 
 
 
 
진(晉)의 연호로 영가(永嘉) 6년, 서기 312년.
 
 
포로로 잡혔던 회제(懷帝) 사마치(司馬織)를 비롯한 진(晉)의 신하들은 한(漢)의 수도, 평양(平陽)에 도착한다. 승리자 소무제(昭武帝) 유총(劉聰)은 포로일행을 잘 대접해주며 의식주에 불편함이 없게 조치해줬다.
 
 
특히 회제(懷帝) 사마치(司馬織) '회계공(會稽公)' 에 봉해 한(漢)의 작위를 내려 한(漢)의 제후이자 신하로 삼았다. 망국의 황제이니 더이상 황제가 아니었기에 작위를 두단계 깎아 '공(公)' 으로 봉한 것이다.
 
더구나 유총과 사마치는 구면이었는데, 예전에 유총의 아버지인 유연(劉淵)이 진(晉)의 흉노정책에 따라 볼모로서 잠시나마 진(晉)에서 생활했던 것처럼, 유총도 똑같이 진(晉)에서 볼모생활을 했을때 아직 예장왕(豫章王) 시절의 사마치를 한번 본 적이 있었다.
 
 
그때는 오랑캐의 왕자가 대국 진(晉)의 왕(王)을 알현하는 것이었지만, 이제는 입장이 바뀌어도 한참 바뀌어 승자와 패자가 만나는 자리가 되었다. 유총은 연회를 열어 사마치를 초대해 대화를 나눈다.
 
 
"유총 : 공(公)이 예장왕(豫章王)이던 시절, 나는 왕무자(王武子 : 왕제(王濟)를 말한다. 무제 사마염의 사위)와 함게 공을 방문한 적이 있소. 그때 왕무자(王武子)는 나를 칭찬했고 공은 "그대의 명성을 익히 들어 알고 있다." 라고 했소. 그리고 공은 직접 작곡한 음악을 들려주었고 나와 왕무자에게 작사를 부탁했소. 우리는 공을 찬양하는 가사를 썼는데, 공은 이를 좋아하고 기뻐했소. 그리고 활을 쏘며 즐겼는데 나는 열두번 명중시켰고 왕무자와 공은 아홉 번씩 명중시켰소. 그리고 공으로부터 뽕나무로 만든 활과 벼루를 선물로 받았는데, 이를 기억하시오?"
 
사마치 : 신(臣)이 어찌 그걸 잊겠습니까? 다만 후회스러운 일은 그때 폐하를 미처 몰라뵈었다는 것을 한스럽고 안타깝게 여길 뿐입니다."
 
유총 : "공의 집안에서 어쩌다가 일족끼리 살육(팔왕의 난)을 벌이게 되었소? 또 공은 이를 어찌 생각하시오?"
 
사마치 : "대한(大漢)은 장차 하늘의 뜻에 감응하여 천명을 받았던 연고로 폐하를 위해 스스로 서로 살육을 벌였으니, 이는 하늘의 뜻이지 사람이 저지른 일은 아닐 것입니다. 또 만약 신의 집안이 무황제(武皇帝) : 사마염의 뜻을 받들어 9족이 단합된 상태로 있었다면 어떻게 폐하께서 황제가 되셨겠습니까?"
 
유총은 이에 감명받아 밤늦도록 이야기를 나누었다. - 자치통감
 
 
씁쓸해지는 일화라 하겠는데, 사마치에게 지금의 위치와는 달랐던 시절, 과거의 일을 꺼내 기억하냐며 묻는 유총의 말은 짖궂다 못해 사마치에게 치욕스럽게 느껴졌을 것이다. 거기다 "너네 어쩌다 그리되었누?" 라는 유총의 질문에 "우리끼리 치고박은 팔왕의 난은 다 너희 한(漢)나라가 하늘의 뜻을 받은 나라이니까 우리가 너희를 위해 알아서 자멸한거다." 라 하는 아부성 짙은 대답을 하는 사마치의 심정도 얼마나 굴욕스러웠을지도 대강 짐작이 간다. 하지만 뒤이어 은연 중에 속내를 이야기하기도 한다. "우리가 내분없이 있었더라면 네깟것들이 감히 그 자리에 올랐을 수나 있었겠냐?" (근데 그걸 아는 사람이 그러나?) 라는 사마치의 비꼼에 유총도 그건 인정하는지 감명받아 더 이야기한다.
 
그리고 유총은 사마치에게 자신이 평소에 아끼던 애첩을 사마치의 부인으로 주었다고 한다.
 
 
 이렇듯, 망국의 황제 사마치와 진(晉)의 유신들에게 대접을 잘해주던 유총이었으나, 점차 뒤로가면서 대접은 소홀해지고 오히려 굴욕을 안겨다주는 일이 빈번해졌다. 이는 유총이 자만해진 나머지 뒤로 갈수록 성격이 글러먹어진 탓도 있었다.
 
 
 
해가 바뀌어 서기 313년.
 
 
 
새해를 맞아 평양(平陽)의 궁성에서는 연회가 열렸다. 여러 대소신료들과 황족들이 즐기는 가운데, 유총은 사마치도 부른다. 하지만 '푸른 옷을 입히고 술을 시중들게' 시켰다.
 
비록 망국의 황제라 하지만 한때나마 황제였고 또 한(漢)에서도 '회계공(會稽公)' 의 작위를 받아 어엿한 제후였음에도 불구하고 만인이 보는 앞에서 엄청난 굴욕을 준 것이다.
 
그때 함께 그 자리에 있었던 진(晉)의 신하들은 차마 이를 보지 못하고 울분에 찬 나머지 울었다고 한다. 유총은 이를 보고 불쾌해져 그 신하들을 모두 잡아다 죄를 씌우고 처형해버린다.
 
그리고 사마치에게도 불똥이 튀어, 그 역시도 당시 병주(幷州)에서 한(漢)에 항전하던 진(晉)의 장수, 유곤(劉琨 : 18편에 나왔던 그 유곤이다)과 내통한다는 죄명이 씌워져 독살당하고 만다.
 
 
유총은 진제(晉帝)를 핍박하여 술을 권했고, 진(晉)의 광록대부(光祿大夫) 유록(劉錄) 등이 평양(平陽)에서 유곤(劉琨)과 호응하길 도모했기에, 진제(晉帝)를 살해하고 유록 등을 주살했다. - 위서 유총전
 
 
포로로 잡혀있던 사마치마저 죽임을 당해 이제 진(晉)은 완전히 멸망한 것처럼 보였지만, 그 명맥을 유지하려는 움직임은 있었다. 그리고 아무리 진(晉)이 한(漢)에 의해 짓밟히고 깨졌다 해도, 이는 어디까지나 중원에만 해당하는 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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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진(東晉) 원제(元帝) 사마예(司馬睿).
팔왕의 난을 피해 일찌감치 강남에 자리잡아 그 신의 한수 덕택에 팔왕의 난, 영가의 난을 피해갈 수 있었다.  
이후, 서진(西晉)이 멸망하자 강남의 호족들의 지지를 받아 그 대통을 잇는다는 명분으로 제위에 오른다.
 
 
전에도 밝혔지만 제국 각지에는 비록 반독립 세력이었지만, 여러 번왕들과 주자사(州刺史)들이 건재했고 특히 번왕들 가운데 양자강 이남의 강남에 위치한 낭야왕(琅耶王) 사마예(司馬睿)는 강남의 호족들의 지지와 호응을 바탕으로 한창 세력을 확장 중인 상태였다. 즉, 황제가 죽고 도읍이 불타 파괴되었다 하더라도 전란의 피해를 입지 않은 곳은 상당수 있었으며, 여전히 진(晉)이라는 나라 또한 아직 멸망이란 말을 쓰기엔 과한 감이 있었다.
 
다만, 한(漢)에 대항할 여력이 없었다라는 점에서 보았을때는 거의 멸망한 것과 다름없긴 했다.
 
 
 
- 민제(愍帝) 즉위 -
 
 
 
회제(懷帝)가 사로잡혀 끌려간 이후로, 난에서 살아남은 신하들은 다시 항전할 구심점을 찾고자 했다. 그리고 그 구심점이란 다른 황족을 의미했는데, 하지만 팔왕의 난을 거쳐 대다수의 황족들이 죽어나갔고 그나마 남아있던 황족들도 왕연(王衍)을 따라 도망가다 석륵에 의해 모두 죽임을 당한데다 영가의 난을 마지막으로 역시 여럿이 피해를 입어 거의 남아난 황족이 없는 실정이었다.
 
 
그나마 찾아낸 이가 무제(武帝) 사마염(司馬炎)의 손자요, 오왕(吳王) 사마안(司馬晏)의 아들로서, 당시 고작 12살의 소년이었던 진왕(秦王) 사마업(司馬業)이었다.
 
 
사마업(司馬業)은 낙양(洛陽)이 함락될 때 간신히 몸을 피해 숙부인 회제 사마치를 비롯해 여러 황족들처럼 끌려가는 일은 면했다. 해가 바뀌어 서기 312년에는 밀현(密縣)이란 곳에 은거해있다가 그곳에서 순번(荀藩), 순조(荀組)라는 신하들에게 구출되어 진(晉)의 유신들로부터 보좌받게 된다.
 
참고로 순번(荀藩), 순조(荀組)는 형제로, 위(魏)진(晉)시대의 명문호족들 중 하나인 영천(潁川) 순씨(荀氏) 출신의 인물들이며, 삼국지연의에서 조조(曹操)의 책사이자 위(魏)의 중신이었던 순욱(荀彧)의 후손들이다.
 
 
이 형제의 주도하에 진(晉)의 신하들은 사마업을 군주로 추대했고 항전의 구심점으로 삼아 진(晉)을 부흥시키려고 했다.
 
 
그러기 위해서는 기반이 되는 곳이 필요했는데, 마땅한 곳이 없다라는 게 문제였다. 그때 염정(閻鼎)이란 장수가 장안(長安)이 속해있는 관중(關中)지방으로 옮겨갈 것을 건의하는데, 이때 관중(關中)지방 일대는 비교적 한(漢)의 세력이 미약한 곳일 뿐더러 관중지방과 접해있는 옹주(雍州)에는 아직 힘을 가진 신하들과 무장들이 있어 도움이 될 것이라 판단한 것이다. 
 
 
하지만 이를 두고 여러 신하들 간에 의견이 갈려 분분했고 결국 이 과정에서 반대하는 이들은 떠나버린다. 다만 그 반대자들이 사마업을 추대한 지지자들의 대다수를 차지하고 있었다라는 점이 큰 타격이긴 했다.
 
 
결국 사마업(司馬業)은 염정(閻鼎)의 뜻대로 관중(關中)지방으로 향했고, 옹주(雍州)의 안정군(安定郡)을 수비하던 안정태수(安定太守) 가필(賈疋)과 옹주자사(雍州刺史) 국윤(鞠允)에게 환영받으며 지원 받게된다.
 
 
그리고 가필(賈疋) 국윤(鞠允)은 여기서 사마업에게 장안(長安)을 공략할 것을 건의한다. 그렇잖아도 기반이 될 곳이 필요했던 사마업과 신하들은 이를 승낙했고 가필과 국윤은 곧장 군사를 이끌고 장안으로 쳐들어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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옹주(雍州)와 안정군(安定郡)이 보인다. 관중(關中)지방은 장안(長安)과 그 주변일대를 말한다.
 
 
애초에 한(漢)의 유총(劉聰)은 낙양을 함락하면서 더 나아가 장안(長安)과 관중(關中)지방까지 공략했었다. 당시 장안을 수비하던 이는 남양왕(南陽王) 사마모(司馬模)로, 전편에서 언급했듯이 동해왕(東海王) 사마월(司馬越)이 한(漢)의 침공에 대비하고자 이 사마모를 장안에 주둔하게 했었는데, 사마월이 죽고 낙양이 함락되고 난 이후에도 사마모는 계속 장안에 있었던 것이다.
 
 
한(漢)의 공격은 장안공략은 낙양이 함락되고 2달 후인 서기 311년, 8월에 시작되었다. 유총은 사촌동생인 유요(劉曜)를 보내 장안(長安)을 치게 했고 아들 유찬(劉粲)도 후속부대로 보내 지원하게 했다.
 
몰려오는 한(漢)의 대군에 비해 장안(長安)을 수비하는 진군(晉軍)의 숫자와 물자 및 무기는 보잘 것 없었다. 며칠 채 버티지 못하고 남양왕 사마모는 한(漢)에 항복하고 만다.
 
 
한(漢)은 그렇게 장안과 관중지방까지 점거하고 있었던 것인데, 그로부터 약 1년 후에 진(晉)이 장안(長安)을 탈환하러 쳐들어온 것이다.
 
 
 
가필(賈疋)과 국윤(鞠允)의 병력은 5만여명 정도였고 장안(長安)의 한(漢)군은 그 갑절이었다. 하지만 장안을 포위당해 일종의 고립전의 양상으로 흘러가며, 성 밖으로 치고나오는 한(漢)군을 진(晉)군이 족족 격파하니, 장안을 진수하던 유요(劉曜)는 안되겠다 싶었는지 장안의 백성 8만여명을 인질삼아 평양(平陽)으로 도주한다.
 
 
장안(長安)은 다시 수복되었고 사마업과 그 휘하의 신하들도 장안으로 옮겨와 조정을 차려, 비로소 임시조정을 수립할 만한 기반을 마련한다.
 
 
 
그리고 서기 312년, 가을. 여러 신하들의 추대를 받아 사마업(司馬業)은 황태자(皇太子)가 되어 훗날 진(晉)의 대통을 이을 후계자가 된다.
 
 
 
황제를 칭하지 않은 이유는 아직까지 회제(懷帝) 사마치(司馬織)가 살아있었기 때문이다. 대신에 그 뒤를 이을 황태자(皇太子)가 되어 정식 후계자임을 선언한 것이다.
 
 
그리고 해가 바뀌어 서기 313년, 봄. 회제(懷帝) 사마치(司馬織)는 살해당했고, 이 소식은 장안(長安)에 있는 사마업에게 전해지기까지 3개월이 걸렸다.
 
 
숙부가 피살되었다는 비보를 접한 사마업은 정식으로 상을 치루고 시호를 '회제(懷帝)' 라 올린다.
 
 
그리고 바로 뒤를 이어 황제에 즉위하니, 그가 곧 진(晉)의 제4대 황제이자 마지막 황제인 민제(愍帝)다. 이때 사마업의 나이는 13살에 불과했다.
 
 
황제의 자리에 올랐다고는 하나, 상황은 암울했다. 언제든지 한(漢)의 대군이 들이닥쳐 끝장내도 이상할 것이 없는 형국인데다, 무엇보다 민제(愍帝)정권의 세력이 너무나 미약했기에 불안한 요인은 산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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