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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국을 통일한 진(晉) 제국 - 21
게시물ID : history_13075짧은주소 복사하기
작성자 : Belisarius
추천 : 21
조회수 : 1280회
댓글수 : 4개
등록시간 : 2013/12/18 02:42:04
 
 
- 영가의 난(永嘉之亂) -
 
 
 
유연(劉淵)의 뒤를 이은 소무제(昭武帝) 유총(劉聰)은 선제(先帝)의 유지를 착실하게 받들어 진(晉)에 대한 맹공을 퍼붓기 시작한다.
 
 
진(晉)의 연호로 영가(永嘉) 4년(서기 310년), 10월. 유총은 석륵(石勒)을 보내 진(晉)의 남부, 형주(荊州)까지도 정벌케 했다. 형주의 주도(州都), 양양(襄陽)과 형주의 여러 군(郡)들과 현(縣)들이 모두 석륵에 의해 점거당하니 이렇게 진(晉)은 또 하나의 주(州)를 상실하게 되었으니, 한(漢)이 결국에는 낙양(洛陽)을 동서남북으로 포위한 형국이 되고야 만 것이다.
 
그리고 다음달인 11월, 유총 자신은 유찬(劉粲 : 유총의 차남), 유요(劉曜), 왕미(王彌)등을 거느리고 점령한 사주(司州)에 홀로 남겨진 낙양(洛陽)을 목표로 하고 직접 4만여명의 친정군을 이끌고 나선다.
 
 
유총(劉聰)은 유찬(劉粲), 유요(劉曜), 왕미(王彌) 등에게 군사 4만을 거느리고 다시 낙양(洛陽)을 공격하게 하였다. 석륵(石勒)은 2만의 기병을 거느리고 대양(大陽)에서 유찬(劉粲)과 회사하였다. 유찬은 헌원(軒轅), 공양(攻梁), 진(陳), 여(汝), 허창(許昌) 등의 군(郡)으로 나아갔다. - 진서 유총전
 
 
형주(荊州)를 공략하고 다시 북상한 석륵과 유찬(劉粲)이 만나 합세하여 병력을 몇갈래의 길로 나누어 진군하게 했다는 기록이다.
 
 
 
이렇듯 진(晉)의 숨통을 끊어버릴 기세로 한(漢)의 공격이 시작될 무렵에 진(晉)은 어떠했는지 살펴보자.
 
 
 
앞에서 쭉 보셨다시피, 늘상 한(漢)의 공격에 대처해오던 이는 황제인 회제(懷帝) 사마치(司馬織)가 아니라 동해왕(東海王) 사마월(司馬越)이었다. 하지만 사마월은 승상(丞相)으로서 영가의 난 이전에도 진(晉)의 대권을 잡고 실질적인 권력가로서 조정을 좌지우지 했기에 회제(懷帝)는 이를 꺼려하여 사마월과의 관계가 그리 좋지 못했다.
 
 
거기다 사마월이 저지른 병크짓도 한몫했다. 또 황족들을 숙청하기 시작한 것이다. 하지만 무분별한 숙청이 아니라 황제와 관련있는 황족들만을 가려서 제거한 것인데, 이유는 그저 자신의 권력을 굳건히 하기 위함이었다. 행여나 황제가 주위 황족들을 통해 자신을 견제하려는 움직임을 사전에 차단하려는 것인지는 모를 일이나, 왜 굳이 그런짓을 했는지는 모를일디다. 청하왕(清河王) 사마담(司馬覃)이라는 회제의 친족을 비롯하여 친척일가를 모두 유배하거나 심하게는 처형까지 마다하지 않았다.
 
이러한 악행들은 집권초기에 사마월이 팔왕의 난으로 피폐해진 국정을 되살리려 애쓰는 모습으로 뭇 사람들로부터 받았던 덕망과 인망을 싹 날아가게 해버린 계기가 되어버렸고, 이는 결국 영가의 난으로 사마월이 한(漢)의 공격을 막을 병사를 모병하는 데에 있어서 민심이 호응하지 않아 병력을 모으지 못한 실패한 원인이 되어 한(漢)과의 싸움에서 열세를 면치 못하는 결과를 낳기도 했다. 물론 이전의 무제(武帝) 사마염(司馬炎)이 시행한 병력 축소정책에 의해 전국의 병력이 대폭 감소한 탓도 있고 무엇보다 팔왕의 난으로 제국의 병력을 죄다 날려먹었기에 근본적으로 군사 숫자가 적긴했다. 하지만 외침이라는 국난이 닥쳤을 때 다른 문제도 아니고 지도자에 대한 민심이 호응하질 않아 군사를 모으지 못해 적에게 박살이 났다라는 것은 한심하기 짝이 없는 일이다.
 
 
예전의 그런 실수를 만회하기라도 하려는 듯, 한(漢)의 침공에 사마월은 동서분주하며 대응하기에 바빴다. 애초에 유연(劉淵)의 흉노(匈奴)가 거병했을때도 자신의 친동생인 (앞에서 나온 그 사마등이 맞다) 신채왕(新蔡王) 사마등(司馬騰 : 예전의 동영공 사마등이다. 작위가 올라 신채왕이 되었다)을 병주(幷州)로 보내어 막게하고 양왕(梁王) 사마략(司馬略)이나 남양왕(南陽王) 사마모(司馬模 : 예전의 평창공 사마모다) 등의 번왕들을 주요 요충지나 전선으로 보냈고, 그리고 자신은 직접 군을 이끌고 낙양(洛陽)에서 그리 멀지 않은 허창(許昌)에 주둔하여 전황을 관망하며 만일의 사태에 대비하고자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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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번왕들의 주둔상황.
 
검은색 화살표 : 동해왕(東海王) 사마월(司馬越), 허창(許昌)에 주둔하며 수도 낙양을 방어.
초록색 화살표 : 양왕(梁王) 사마략(司馬略), 양양(襄陽)에 주둔.
빨간색 화살표 : 남양왕 사마모(司馬模), 장안(長安)에 주둔.
파란색 화살표 : 신채왕(新蔡王) 사마등(司馬騰), 업(鄴)에 주둔.
 
위의 지도에서 보듯이, 각 번왕들은 모두 각 주(州)의 주도(州都)에 주둔하며 해당 주(州)도 방어할 겸해서 수도 낙양(洛陽)을 여러방향에서 방어하는 형국을 갖추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조치에도 전세는 이미 한(漢)에게로 많이 기울어 진(晉)에게 불리하게 돌아가고 있었다. 여러 주(州)가 한(漢)에 의해 결딴나버렸고 각지에서는 패전소식만이 들려오는데다, 병력을 모집하려 해도 이미 돌아선 민심 탓에 더이상 병력을 모으지도 못하는 실정이었다.
 
사마월은 이에 큰 위기를 느낀다. 그래서 그 불안감과 두려움을 애꿎은 회제(懷帝)와 신하들에게 발산하기 시작한다. 예전의 과오까지 들춰내 한(漢)의 공격을 막아내지 못했다는 비난을 덮고자 했던 것이다. 황제 회제를 겁주고자 이번에는 황족들에 이어 신하들까지 숙청의 칼부림에 죽어나갔다.
 
 
갖은 스트레스로 인하여 신경이 극도로 쇠약해진 나머지 사마월은 병을 얻어 골골하게 되는데 그래도 끝까지 허창에 주둔하며 군무를 보았다고 하니, 진짜 애가 타기는 했던 모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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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제(懷帝) 사마치(司馬織).
 
 
지렁이도 밟으면 꿈틀한다고, 사마월의 횡포가 그 쯤되니 회제(懷帝) 사마치(司馬織)도 이를 더는 용납할 수 없다 여겼는지, 사마월을 역적으로 몰아 주살하려고 했다.
 
그리고 서기 311년, 당시 전선에 있던 정동대장군(征東大將軍) 구희(苟晞)란 장군에게 대장군(大將軍)의 직책과 사마월을 역적으로 간주하여 이를 토벌할 것을 명하는 조서를 내린다.
 
그러나 이는 머지않아 사마월에 의해 발각되고 구희(苟晞)는 체포되어 사마월 앞으로 끌려온다. 구희로부터 일의 전말을 들은 사마월은 병으로 가뜩이나 쇠약했던 차에 울분에 찬 나머지 분통이 터져 병이 더 악화되었고, 진중의 병상에서 머지않아 사망한다. 사인은 분사(憤死)였다.
 
 
석륵(石勒)이 성고관(成皐關)으로 들어갔을때, 진류태수(陳留太守) 왕찬(王鑽)에게 패했는데, 태부(太傅) 사마월(司馬越)이 이 기회에 석륵을 정벌하려고 군사를 거느리고 나섰다가 항(項)에서 죽고 말았다. - 진서 사마월전
 
 
이처럼 외적의 침입으로 나라의 운명이 풍전등화에 놓인 상황에도 진(晉)에서는 그 순간까지도 내분이 일고 있던 것이다. 그리고 이후 그 값을 제대로 치루게 된다.
 
 
- 낙양(洛陽) 함락 -
 
 
서기 311년.
 
 
작년에 출정했던 유총(劉聰)이 이끄는 한(漢)의 주력군은 낙양(洛陽) 공략을 시작했고, 그 와중에 한(漢)군의 별동대로서 연전연승 공을 세우고 있는 석륵(石勒)은 계속해서 진(晉)의 수비군을 깨뜨리고 있었다. 기록만으로 보면 석륵은 이곳저곳 왔다갔다 하며 닥치는대로 다 깨부수는 것처럼 보이는데, 실제로도 그랬다. 파괴본능이 있는지, 되는대로 동서남북 다 돌아다니며 일단 다 때려부수고 본다.
 
진(晉)의 감군(監軍) 배막(裵邈)을 민지(澠池)에서 크게 무너뜨리고 마침내 낙천(洛川)에 이르렀다. - 위서 석륵전
 
그리고 직후에 위에서 사마월의 최후에 대해 싣어놓은 기록에서도 나오듯이, 진류태수 왕찬이란 사람에게 패한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이번에는 북으로 갔다가 또 한번 흔들어 놓고 예주(豫州)로 내려간다.
 
예주자사(豫州刺史) 풍숭(馮嵩)을 진군(陳郡)에서 요격하나 이기지 못하고 양성태수 최광(崔廣)을 공격해 죽였다. - 위서 석륵전
 
그리고 이후로도 또 형주(荊州)나 옹주(雍州)로 왔다갔다 하던차에, 진(晉)에서는 동해왕(凍海王) 사마월(司馬越)이 사망한다.
 
사마월 휘하의 신하들은 섬기던 주군의 죽음에 마땅히 그 시신을 모시고 고향 땅(사마월의 영지는 동해(東海)였기에 동해로 간다고 하는 것이다)에서 장례를 치루어야 한다고 입을 모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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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동해왕 사마월의 영지는 수도 낙양에서 멀고 먼 서주(徐州)였다.
 
근데 저들끼리만 가는 것이 아니라 황족, 대신, 부호, 낙양(洛陽)의 백성들에다 호위하는 병력까지 포함해 도합 10만여명이 넘는 무리를 모두 데리고 떠났는데, 이 운구행렬을 이끄는 사람은 죽은 사마월의 심복이자 당시 진(晉)의 태위(太尉), 왕연(王衍)이라는 인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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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연(王衍).
이 글에서는 조금 무능력하게 비추어질지는 모르겠으나, 위진 남북조 시대에 유행했던 청담사상 쪽에서는 으뜸가는 사상가였다고 한다. 진(晉)에서도 알아주는 명사(名士)이기도 했다고 하지만 다만 성품만은 별로였는지 '의리가 없다' 라고 평되었고 삼국지연의의 대미를 장식하는 인물들 중 하나인 진(晉)의 명장, 양호(羊祜)도 그를 두고 '큰 인물이 되겠지만 풍속을 무너뜨리고 교화를 손상시킬 것이다' 라고 평했다. 근데 나중가면 단순 풍속만이 아니라 나라를 무너뜨리는 위인으로 거듭나게 되신다.
 
태위(太尉)란 예로부터 고대 중국의 최고 벼슬인 삼공(三公) : 태위, 사공, 사도)의 하나로, 최고 군책임자직 중 하나다. 그런 거물이, 더구나 고위 군책임자라면 외침으로 인한 국난에 순전히 장례를 핑계로 타지로 간다는 것은 예나 지금이나 상식적으로 이해가 안될 말이었다.
 
사실, 이 무리의 본질은 난을 피해 도망가는 피난민이었다. 수도 낙양(洛陽)도 포위되어 언제 떨어질지 모르는 마당에, 장례를 핑계로 하여 아예 다른 곳으로 피하고자 했던 것이다. 왕연 또한 마찬가지. 사마월이 죽으면서 왕연에게 권력을 이임했는데, 그것을 명분삼아 대이동을 결심한다.
 
군사들은 태위(太尉) 왕연(王衍)을 후임이 되도록 추천하여, 왕연은 군을 이끌고 동쪽으로 갔다. - 위서 석륵전
 
그 무리의 구성원들은 실로 다양했다. 위에서 언급한 것처럼, 황족부터 대소신료에다 부호, 백성들까지 있었는데 이들 모두가 낙양에서 거주하던 이들이었다. 나라에 큰 화가 닥칠 것을 예감이라도 했는지 이를 피하고자 덩달아 왕연의 피난민 무리를 따른 것인데, 훗날 낙양(洛陽)의 함락을 예고라도 하는 듯한 전조이기도 했다.
 
근데 문제는 왕연이 생전에 사마월이 거느리고 있던 10만여명의 병력까지도 그대로 데리고 갔다는데에 있었다. 위에서도 설명했듯이 사마월은 수도 낙양을 방어하고자 낙양 수비군을 가까운 허창에 주둔시켜 둔 것인데, 낙양을 수비할 주력군을 죄다 데리고 가버리면 막말로 낙양은 누가 지킨단 말인가?
 
마치 왕연의 실책을 벌하기라도 하듯 그들을 쫓는 재앙의 무리가 있었으니, 바로 석륵(石勒)이 이끄는 한(漢)군이었다.
 
 
본래 석륵은 사마월에게 반격을 가할 생각으로 왔으나 때마침 사마월이 죽었고 그 남은 병력이 동쪽으로 향한다는 말을 듣고 칠 요량으로 왔던 것이다.
 
하지만 눈앞에 펼쳐진 광경은 군사들에 백성들까지 이리저리 뒤엉켜 혼잡한 상황으로 느릿느릿 걸음을 재촉하는 무리 뿐이었다. 그래서 석륵은 이들 모두를 다 죽여버린다. 진(晉)군은 말할 것도 없고 황족, 신하, 백성들까지 다 포함해서 10만여명이 모조리 몰살당했다.
 
석륵이 추격하여 고현(古縣)에서 이를 격파했다. 석륵이 거느리고 있던 기병을 나눠 포위하게 하고 살육하니, 시체가 산과 같이 쌓였고 왕연과 양양왕(襄陽王) 사마범(司馬範) 등 10만여명을 죽였다. - 위서 석륵전
 
기록에는 그냥 살육 중에 죽였다고 되어있지만 사실은 왕연과 여러 종실왕들, 신하들과 같은 고위층 인물들은 살려두고 포로로 잡았다고 한다. 이때 잡힌 숫자가 도합 48명이었다.
 
그리고 그 우두머리 격이 되는 왕연은 석륵 앞에로 끌려와 이야기를 나눈다.
 
석륵 : "그대의 나라가 이렇게 된 이유가 뭐라고 생각하시오?"
왕연 : "황족들의 다툼(팔왕의 난) 때문입니다. 나라가 망한 것에 대해서는 저는 관여한 바가 없습니다. 저는 원래 젊었을 때부터 출세할 생각이 없었고, 천하의 일에도 알지 못했을 뿐더러 관심도 없었습니다. 그리고 만일 장군께서 존호(왕이나 황제를 말함)를 칭하시면 제가 따르겠습니다."
석륵 : "그대는 젊어서 조정에 입조하여 그 이름이 사해를 덮을 정도였고, 지금도 태위(太尉)라는 중요한 관직에 몸담고 있거늘, 어찌하여 출세할 생각이 없었다고 말하는가? 천하를 망친 자가 그대가 아니면 누구란 말인가?" - 십팔사략
 
그리고는 포로로 끌려온 다른 사람들에게도 똑같이 묻자 모두들 두려워한 나머지 자신의 죄를 시인했다고 한다. 석륵은 이에 왕연을 비롯한 고위인사 48명을 담장에 앉혀두고 돌담을 무너뜨려 압사시켜 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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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륵(石勒).
 
일화에서 보여지는 그대로다. 석륵의 질문에 왕연은 두려운 나머지 "나는 나라나 정치 같은거 몰라요ㅜ 살려주셈ㅜ 그리고 님이 황제나 왕이 되시면 제가 도와드림" 이라는 망발을 해버렸고 석륵 曰, "출세는 관심도 없다는 놈이 국방부 장관질이냐? 나라 망친 놈들 주제에 입만 나불대기는." 하며 죽인 것이다.
 
사실 진(晉)이 망한게 왕연의 탓만은 아닐 것이다. 왕연의 말대로 뭣보다 팔왕의 난이라는 병크가 나라를 패망의 길로 접어들게 했으니 말이다. 하지만 석륵은 그걸 방치한 고위층들에게 그 책임을 물었고, 그와 같은 석륵의 일침에 할말이 없어진 진(晉)의 고위인사들은 대꾸한번 못하고 모두 살해당하고 만 것. 명색의 한 국가의 고위인사라는 사람이 내뱉는 말이 고작 그 정도니 나라가 망하는 것도 무리는 아니지 싶다. 
 
아무튼, 이 학살사건으로 인해 수도 낙양(洛陽)을 방어할 주력군은 전멸당했고 이제 남은 것은 텅빈 것이나 다름없는 낙양을 접수하는 일뿐이었다. 
 
 
그리고 서기 311년, 5월.
 
 
유총은 대장군(大將軍) 호연안(呼延晏)을 선봉으로 삼아 2만 7천여명의 군사를 주어 낙양(洛陽)을 총공격하게 했다. 이미 주력군을 상실했던 진(晉)군은 낙양근교에서의 싸움에서 수차례 패해 3만여명의 전사자를 내고 후퇴한다.
 
절체절명의 위기가 닥치자 회제(懷帝) 사마치(司馬織)는 장안(長安)으로 탈출을 시도하지만, 도중에 도적들을 만나 실패한다. 그리고 두번째로 이번에는 북쪽으로 탈출하려 하자 뭇 대신들이 반대했는데 이유인즉, 자신들의 토지와 재산을 모두 들고 갈 방법이 없어서였다. 참 가지가지 한다. 최후의 순간까지 병신짓을 잊지 않는 진(晉)의 신하들이었다. 세번째로는 낙양(洛陽)에 흐르는 강인 낙수(洛水)에 배를 띄워 탈출하려 했는데, 한(漢)의 호연안이 죄다 태워버려 이마저도 실패한다.
 
결국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꼼짝없이 낙양에 갇혀있는 꼴이 되고 말았다.
 
 
그리고 다음달인 6월.
 
 
호연안에 이어 유요(劉曜), 왕미(王彌)의 후속부대가 도착해 공격하니 끝까지 버티던 낙양(洛陽)은 함락당했다. 유요(劉曜)는 병사들에게 방화, 약탈을 허용해 낙양은 삽시간에 생지옥으로 변해버린다.
 
회제(懷帝) 사마치(司馬織)는 궁성을 빠져나가 탈출을 감행하지만 곧 한(漢)의 추격군에게 붙잡혀버린다.
 
그리고 조정대신들과 황족들도 포로신세가 되었고 낙양 백성 3만여명이 한(漢)군에 의해 살육당했다. 특히, 왕미(王彌)의 병사들에 의해 자행된 경우가 많았다. 도적출신이라 그런지 그 쪽분야에선 전문가다.
 
그 뿐만 아니라 왕미는 진(晉)의 역대 황제들의 능(陵)을 훼손하고 도굴하기도 했는데, 이 바람에 진(晉)의 시조인 사마의(司馬懿)나 무제(武帝) 사마염(司馬炎) 등의 능이 크게 훼손되어 오늘날에 복구하기까지 구분하기가 힘들었다고 한다.
 
 
그리고 마치 진(晉)이라는 나라를 지워버리기라도 하려는 듯, 낙양을 철저히 파괴하고 태워벼려, 예전 후한(後漢)의 동탁(董卓)에 의해 파괴되어 삼국시대 위(魏) 왕조의 수도로서 꾸준히 재건되던 낙양은 그렇게 120여년만에 다시 한번 파괴되고 말았다.
 
 
유총은 회제(懷帝) 사마치(司馬織)와 진(晉)의 신하들을 한(漢)의 수도, 평양(平陽)으로 압송해가니 진(晉)은 그렇게 끝나는 것처럼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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