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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학은 매 순간 발전하고 있다. 몇 십 년 전에는 인간이 우주를 가고 달에 착륙하였고, 요즘에는 혜성에조차
착륙시킬 수 있는 로켓을 만들기까지 한다고 한다. 하지만 독자들이여, 알고 있는가? 그럼에도 아직
과학적으로 설명할 수 없는 일들이 우리 주위에서 벌어지고 있다는 사실을. 나는 그것과 관련해 겪은 이야기를
잠깐 얘기해보고자 한다.
* * *
지옥과도 같던 고3시절을 보내고 이제는 천국이 펼쳐지리라 믿어 의심치 않으며 진학한 대학교.
하지만 나란 인간에게 주어진 인생의 운은 특별한 것이 없었는지 그곳에서의 삶 또한 고등학교의
삶과 별다를 바가 없었다. 아니, 그래. 솔직하게 까놓고 얘기하련다. 내가 말한 운은 연애의 운이다.
남자로 태어나 다리 사이에 무엇인가 달고, 두 발로는 땅을 굳게 딛고 혼자서 앞만 보며 살아온
세월 20년. 대학교에 진학하면서 이제는 내 옆에도 여리여리하고 보들보들하며 향기가 나는
여성이 나타나리라는 부푼 희망을 안고 있었지만 그것은 헛된 망상에 불과했다.
대학교 1학년을 마무리 하는 지금. 내 옆에 있는 것은 자신을 신선이라고 굳게 믿고 있는
정신병자 한 명 뿐이다. 그것도 군내 나는 남자로.
* * *
“연애의 신이시여, 어찌하여 저에게 시련만 내리시나이까!!”
밤마다 나는 연애의 신부터 시작하여 이 세상의 온갖 잡신들에게 불평을 늘어놓다 잠들었다.
나의 이 오랜 불만에 화가 난 신이 있었는지 2학년이 되면서 이상한 일이 시작되었다.
불만을 터뜨린 내게 이상한 일이 생긴 거라면 겸허히 받아드릴 마음도 있건만, 이건 그걸 넘어
동네가 이상하게 변해버리고 말았다. 사실 내 입으로 말하기는 좀 뭐하지만 우리 학교는
작은 대신 계절마다 풍경이 굉장히 아름다웠다. 여기서 내가 과거형으로 말했다는 사실에
주목하시라. 어쨌든 풍경이 아름다울 수 있었던 것은 교내에 심겨진 꽃들과 나무들 덕분인데,
봄이면 벚꽃이 운치 있게 흩날리고, 여름이면 풍성한 잎사귀를 자랑하는 나무들이 언덕에
서늘한 그늘을 만들어 주고, 가을에는 그 나무들이 노랗고 빨갛게 물들어 어느 산 부럽지 않은
단풍을 보여주고, 겨울에는 가지마다 눈꽃이 아름답게 맺혀있다. 대학교라는 이름이 부끄럽게
작고 작은 학교지만, 이렇게 한 곳에서 각 계절의 절경을 누릴 수 있는 학교는 전국적으로도
몇 되지 않으리라.
* * *
옛말에 ‘자고로 남자는 도량이 넓어야 한다’ 고들 한다. 이 말 뜻은 즉, XY염색체를 갖게 된 이상
어지간한 일은 넓은 도량으로 넘기는 것이 마땅하다는 것이다. 초등학교 때 민속무용을 하면서
잡았던 여자 짝의 손이 평생의 마지막 스킨십이라거나, 남중 남고를 나오면서
이성과 대화를 5년이 넘게 안 해봤다거나 하는 자잘한 일은 마음에 담아 둘 필요 없이
넘기면 된다는 뜻이다. 나 또한 그 말에 감복하여 태평양과도 같은 넓은 마음을 가지고
평생을 살기 위해 노력해왔다고 자신한다. 하지만 그런 나도 이번 일 만큼은
그냥 넘길 수가 없었으니.... 앞에서 내가 과거형으로 말했던 것을 기억하는가?
학교가 있는 이 동네에 계절이 없어진 것이다. 평소 관찰력 좋고 눈치가 빨랐던 나였기에
누구보다 빠르게 그 사실을 알아 낼 수 있던 것이지, 만약 유유자적 사는 신선 같은 사람이라면
8월이 되어서야 “여름인데 왜 아직도 눈이 내리지” 하면서 뒤늦은 혼란에 빠졌을 것이다.
하지만 나는 4월이 되자마자 계절이 이상하다는 사실을 깨달아 버렸다.
3월까지는 춥기도 하고 종종 눈이 내리기도 한다. 그래서 관찰력 좋고 눈치가 빠른 나조차도
3월에는 이변을 눈치 챌 수 없었다. 하지만 4월이 되고 마침내 이상하다고 결론을 내리게 된 것이다.
4월이 되어도 눈이 녹지 않고 오히려 바닥에 쌓이도록 눈이 내리는 나날이 이어졌다.
나는 벽에 걸려있는 달력을 쳐다보았다. 4월 20일. 들고 있던 작년도 일기를 펴 보았다.
작년 4월 20일에는 분명 벚꽃이 조금씩 피고 있다고 쓰여 있었다. 난 일기를 덮고 일어나
창문을 열고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열린 창문으로는 찬바람이 들어왔고
하늘에서는 작고 눈이 내리고 있었다. 한참을 올려다보던 나는 창문을 닫았다.
이래서야 벚꽃놀이를 할 수 없다. 문득 작년의 벚꽃놀이가 생각났다. 나는 신선과 함께
학교 앞의 편의점에서 맥주를 사고, 치킨집에서 치킨을 사서 교내 분수대에 돗자리를 깔고
앉아 새벽까지 사회문제를 토론했었다.
* * *
“자연적으로 아기가 태어날 때 성비는 1.5 : 1로 남자가 많다고 하였소.” 신선이 말했다.
“그러니까 우리가 남자끼리 앉아 있다는 것도 자연스러운 일이지 않겠소? 우리가 솔로인 것은
이 세계가 정해준 뜻이란 말이오.” 신선은 맥주를 꿀꺽꿀꺽 넘기고선 치킨을 하나 집어 먹었다.
“그래. 네 말도 무슨 얘긴지 알겠는데 왜 하필 그 0.5가 나인건데!” 나는 분개했다.
“진정하시오, 청년. 살다보면 인연이 또 있지 않겠소.” 신선이 말했지만
“너는 그래도 연애경험이라도 있으니까 여유롭겠지!” 나는 또 분개했다.
신선은 음악과의 학생이었다. 공부에 뜻을 두고 있지 않아 학점만큼은 밑바닥이었지만
대금실력만큼은 어딘가의 전설에 나오는 신선 못지않았다. 그가 대금을 꺼내들고
곡조를 연주하기만 하면 봄꽃 같은 소녀들의 눈이 하트로 변해가는 것을 볼 수 있었다.
게다가 얼굴도 잘생겼기에 대입 전에도 교제의 경험이 있었고 대입 후에도 봄꽃 같은 소녀들로부터
고백을 몇 번 받았다는 얘기를 들었었다.
나 또한 음악과의 학생이었다. 역시 공부에 뜻을 두고 있지 않아 학점만큼은 밑바닥이었지만
신선과는 반대로 내세울 장기도 없었고 내세울 외모도 아니었기에 대입 전에도 교제의 경험이 없었고
대입 후에도 봄꽃 같은 소녀들에게 고백을 몇 번 받기는커녕 여자와 대화를 해보지도 못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