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 질 적 으 로 는 요 .
다만 한 발짝 물러서자면 그것이 굳이 자기만족이라 말하는 현대 여성들에게도 적용이 되는가 인데 이 글을 적을려고 하면서도 장담은 하지 못하겠네요.
폭풍짱돌(혹은 폭풍무관심)이 예상 되지만 저의 생각을 이야기 해 보겠습니다.
오유분들은 게시판에 민감하셔서 고민하다가 많은 부분 이 책에서 가져온 생각들이기 때문에 책게로 하였네요.
그렇기 때문에 책 이야기도 할까 합니다.
에두아르트 푹스의 풍속의 역사 라는 저의 인생책 중에 하나가 있습니다.
리영희 선생님 글은 다 읽었다고 생각하는데, 못 보고 지나친건지 아니면 기억이 안나는 건지 모르겠지만,
이 분의 어마어마한 독서량에 비해 추천한 책은 이 하나로 기억합니다.
그것만으로도 이유는 충분해서 두번 읽고 몇년 전 세번째 읽다가 멈췄었네요.
이 책이 처음 아시아로 들어온 것은 군국주의하에서 진보적인 지식인들의 주치의로 활약했던 한 일본인 야스다 도쿠타로라는 의사에 의해서인데, 극우군벌이 재벌과 손잡고 일본을 전쟁의 사지로 끌고 가던 1936년, 38세 때부터 병원 일을 끝낸 후 매일 밤 8시부터 5시간씩 할애하여 번역을 시작하고 1940년에야 몇 차례의 퇴고를 거쳐서 세 권 중 한 권이 완성이 됩니다. 하지만 1942년 조르게 사건이 빌미가 되어 진보적인 지식인과 그 자신도 검거되면서 초고와 정서 원고 그리고 이 번역 작업을 위하여 모아 놓았던 수백권의 경제사, 역사 관계 서적들이 압수되고 맙니다. 4년의 집행유예, 집필금지 조치를 받고 풀려나지만 책들과 정서 원고는 못 받고 초고만을 돌려 받습니다.
그는 전쟁이 격화되자 시골로 가게 되었고 거기에서 풍속의 역사 2,3권의 번역에 착수합니다.
전쟁이 끝난 후 고분샤의 제의로 이 책의 출판을 결심하고 옛 초고를 다시 원서와 대조하는 작업을 벌임으로써 1936년의 작업 시작 이후 도합 일곱 차례의 퇴고를 거친 원고가 완성되어 1953년부터1959년에 걸쳐 전체 열 권의 풍속의 역사를 상재하게 됩니다.
그 후에도 푹스의 다른 자료들까지 번역하여 다시 묶은 열 권의 방대한 문고본을 출판합니다. 이 때도 1970년 3월부터 일흔을 넘긴 고령임에도 불구하고, 하루 여섯 시간 기준으로 매일 작업하여 1971년 12월에야 끝냈다고 합니다. 햇수로 따지면 35년에 걸친 평생의 작업이었던 것입니다.
책 이야기로 장황하게 시작한 이유는
이 글을 쓰는 목적, 즉 제가 쓴 글로 다른 사람들을 이해시키고 설득하기 위함 혹은 제가 설득 당하기 위함이지만,
그것과는 별개로 이 좋은 책을 다만 몇 사람이라도 읽게 만든다면 이 글은 그것만으로도 의미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본론으로 들어가서,
지구상에 존재하는 모든 생명체는 두 가지의 의무를 가지고 태어납니다.
생존 그리고 번식이죠.
태어났다면 무슨 수를 써서라도 살아남아야 합니다. 살아남아서 자신의 종족이 존재함을 자신의 존재로 증명해야 합니다.
그것이 피식자든 포식자든 아니면 전혀 관계 없는 옆집 똥개에게라도 상관없이 말이죠.
그렇지만 아무리 오래 백년 천년 살아남는다고 해도 번식하지 않는다면 그 종은 언제고 멸종하게 될 것입니다.
그래서 번식이라는 것을 하게 됩니다. (섹스요 섹스)
이 번식의 과정에서 암컷과 수컷은 각자의 역할이 있습니다. 역할과 동시에 암수는 각각 수동적, 능동적인 자신의 위치도 부여받게 됩니다.
무슨 말이나면,
암컷은 수동적인 입장에서 수컷을 유혹하고 끌어들이며 반대로 수컷은 능동적인 자세로 암컷에게 적극적으로 구애활동을 하게 됩니다.
여기서 수컷들은 암컷의 마음에 들기 위해 먹이를 가져다 준다던지 아니면 경쟁자를 물리쳐 자신의 강함을 증명한다던지 하면서 암컷의 마음을 뺏기 위해 노력합니다. 대부분의 종들이 일부일처, 일부다처 혹은 그 반대의 상황에서도 암컷은 다가오는 수컷들 중에서 선택한다던지 아니면 치열한 수컷들간의 경쟁에서 이긴 강자에게 자신을 맡깁니다. 경쟁에서 진 수컷은 크게 다치거나 죽기도 하지요.
이러한 과정들이 인간 세상에서는 조금 더 지능적으로 창조적으로 입체적으로 다양하게 나타납니다.
남성의 경우 능동적, 적극적인 역할에 따라 끊임없이 자신의 이상형을 표현하면서 구애를 합니다.
한 때 전 여성을 표현하는 예술작품들은 많지만 남성을 표현하는 건 왜 적지 라고 궁금했던 적이 있었죠. 남성의 사회 진출이 더 많으니까 그런게 아닐까 라고 생각했지만 근본적인 답은 아닌 것 같았습니다.
그것과 동시에 아주 예전에, 가장 아름다운 예술품은 여체다 라는 말을 듣고 그건 니가 남자니까 그렇지 라며 웃었는데, 사실 이 말은 반은 맞고 반은 틀립니다. 왜냐, 이것은 남성이 한 말이기 때문에 반은 맞는 겁니다. 끊임없이 자신의 이상형을 표현하는 적극적인 능동적인 남성이기 때문에요.
그럼 어떻게? 시나 소설 같은 문학작품, 그림 혹은 조각 등으로 아니면 현대에서는 영상도 포함되겠지요. 남성들은 가능한 모든 수단을 동원해서 자신의 이상형을 구체화 시키기 위해 노력합니다.
그래서 시대에 따라 혹은 시대의 요구에 따라 이상적인 여성상이 달라지는 것이지요.
반면에 여성들은 짧은 치마를 입거나 가슴이 파인 옷을 입거나 혹은 몸매가 드러나는 옷을 입습니다. 혹은 화장을 하면서요.그 누구도 그러한 것들을 강요하지 않습니다.
목적은 하나입니다. 나를 이성에게 예쁘게 보이게 하기 위함입니다.
적극적으로 남성을 다가오게 만들어야 하거든요.
비키니 수영복이 살아남고 그 전의 반바지 같은 수영복이 사라진 건(중간 과정은 생략하구요) 비키니가 여성용 수영복의 두 가지 조건을 충족시켰기 때문입니다. 하나는 수영하기 편한 복장, 둘은 노출입니다. 가릴 건 가리지만 노출 할 수 있는건 최대한 노출 할 수 있거든요. 반면에 남성용 수영복은 그저 수영하기 편한 복장일 뿐입니다. 노출이 더 필요하다면 삼각팬티 형태로 발전했겠지요.
이 두 가지 역할은 어느 한 쪽이 우월하다거나 열등한 것이 아니라 그저 역할의 차이일 뿐입니다.
남녀는 머리 끝부터 발끝까지 평등해야 하지만 결국 서로의 다른 점은 분명 많이 존재하니까요. 이것도 그 중에 하나일 뿐입니다.
인류는 얼마 전까지 이 공식을 유지하고 있었습니다.
다만 처음에 말했듯이 현대의 여성들에게도 똑같이 적용이 되는가 에서는 확실한 답을 내리기가 어렵네요.
결론은
여성의 화장에 대해선 1도 모르므로, 아까 낮에 봤던 베오베 글에서 뭘 어떻게 발랐고 뭘 어떻게 했다 하는건
결국 한가지의 목적입니다. 꾸밈 즉 예쁘게 보이려 한다는 것이지요. 당장 주위의 남성을 대상으로 하지는 않더라도 아니면 주위에 남성이 없다 하더라도 말이지요. 그리고 그 대상이 저는 아니겠지만요. 그것이 여성들이 가지고 있는 기본적인, 자연스러운 그렇지만 남성들과는 표현 방식이 다른 그들만의 욕구입니다.
라는 것이 저의 생각입니다.
그렇지만, 아니라니까!!!! 라고 하는 여성분들에게 이론적인 잣대를 자꾸 들이댈 수는 없으니까 여기서 급하게 마무리 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