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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편] 문자 그리고 나의 '두번째 엄마'
게시물ID : panic_92247짧은주소 복사하기
작성자 : 야설왕짐보
추천 : 47
조회수 : 4447회
댓글수 : 19개
등록시간 : 2017/01/24 17:43: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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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번째 엄마_효과.jpg


  ※ 안녕하세요 스릴러/공포소설 전문 창작자 '야설왕 짐보' 입니다. 
     일단 장르는 스릴러이며, 신작이 아닌 예전 글의 수정/보완판임을 먼저 말씀드리고자 합니다.
      (아마도 기억나시는 분 계실 듯! 너무 예전에 써서 엉망이길래 새로 싹 써 봤어요 ㅠㅠ)
     요즘 세태에 맞지 않게 글은 조금 길지만, 첫 게시 당시 반향이 꽤(?) 좋았던 글이니
     인내를 가지고 끝까지 참고 읽으시면, 가슴 한 켠... 무언가 남는 것이 있지 않을까?
     그와 같은 생각으로 감히 일독을 권해 봅니다.
    


문자 그리고 나의 두 번째 엄마
*
우리 아빠! 그 년이 죽였어!
조금은 당황스러운 하진의 말에 유정의 시선은 갈 곳을 몰라 허둥댔다. ‘아무리 새 엄마라지만 아까는 하진이 니가 좀 심했어...’ 생각없이 내뱉은 입 바른 소리, 그 놈의 입이 방정이었다. 버스는 어느덧 도심을 벗어나 한적한 교외로 접어 들었건만 동갑내기 친구인 하진과 유정, 두 사람 사이에는 어색한 침묵만이 흘렀다.
괜히 문자 얘기를 해가지고...’
입술을 꾹 다문 채, 유정은 뒤늦게 후회해보지만 이미 엎질러진 물이었다. 머쓱해진 분위기가 풀어지려면 시간이 필요했다.
*
5시간 전의 모 패스트 푸드점, 흥겨운 음악소리 사이로 지금은 쉬이 찾아보기 힘든 단음으로 된 휴대폰 벨소리가 울려 퍼지자 몇몇 사람이 피식 조소를 머금었다. ‘엄마가 섬 그늘에 굴 따러 가면으로 시작하는 익숙한 멜로디의 동요때문이었다.
잠시 후, 비품 정리를 위해 자리를 비웠던 하진이 창고에서 돌아오자 유정은 뭐가 계속 울리길래 봤더니 전화랑 문자가 계속 오더라라는 말과 함께 휴대폰을 내밀었다.
역시나 요즘은 도통 찾아 보기 힘든 은색의 구식 2G폰이었다.
사람들의 시선이 창피했던지 하진은 급히 휴대폰을 갈무리하고는 구겨진 얼굴로 뒤돌아 버튼을 눌렀다.
같은 사람에게서 온 부재중 전화가 5, 그리고 문자가 하나 와 있었다.
[아무리 전화해도 받지 않아 문자 남긴다. 네가 말한 그 돈, 마련해 볼게... 그러니 알바 끝나고 집으로 오렴. 8, 늦지도 이르지도 않게 8, 잊지마 8시야! 꼭 시간맞춰 오길 바라 순옥-]
하지만 문자를 확인한 하진은 대뜸 인상을 구기며 소리쳤다.
..! 지가 뭔데 오라가라야!”
평소 욕설은 커녕 언성을 높이는 일조차 드문 하진이었기에 친구인 유정은 물론 애꿎은 계산대 앞 손님조차 놀라 두리번거렸다.
죄송합니다. 죄송합니다. 얘가 원래 이런 애가 아닌데...”
유정이 연신 손님을 향해 사과하는 와중에도 하진의 흥분은 가라앉을 줄을 몰랐다. 그 뿐인가? 알바중인 것도 잊은 채 곧장 어딘가로 전화를 걸더니 대뜸 악다구니부터 내질렀다.
당신 미쳤어? 나 되게 바쁜 사람이거든? 꼴랑 100만원가지고 사람 귀찮게 하지 마! 계좌 찍어 줄 테니까 계좌로 부쳐!”
하진아 바쁜데 미안해... 그치만 꼭 만나야 돼. 만나자! 오늘 아니면 안돼! 8, 너 알바 7시에 끝나잖아. 끝나고 오면 8, 8시에 맞출 수 있어. 그 전엔 안돼. 알았지?”
하진의 엄마인 순옥이었다. 유정도 건너건너 들은 바가 있었다. 엄마지만 진짜 엄마가 아닌 새 엄마, 그래서일까? 수화기 너머로 들려오는 순옥의 목소리에선 간절함을 넘어 애달픔마저 느껴졌지만 대꾸하는 하진의 음성은 냉랭하기 그지 없었다.
시끄러! 당신이 뭔데 오라가라야! 내가 그 날, 분명히 얘기했지!”
“......”
당신이랑 나, 다시 만나는 날은 당신 죽는 날, 그때 뿐이라고! 보란 듯이 가서 웃어줄거야! 당신이 그랬던 것처럼 당신 영정에 대고 보란 듯이 웃어줄거라고!”
하진의 독기 서린 음성이 울려 퍼지자 모두가 놀라 입을 다물었다.
유정도 샌드위치를 주문하려던 손님도...
들려오는 것은 오직 수화기 너머의 목소리, 즉 순옥뿐이었다.
하진아... 안그래도 지금 내가... 많이 아파! 그러니까 8시까지 집에... 꼭 와줘, 내가 너 좋아하는 식혜도...”
매몰찬 거절에도 순옥은 집으로 와달라는 말만을 거듭 반복했다. 그러자 끝내 격분한 하진이 수화기를 향해 소리쳤다.
수작부리지마! 당신이 만든 식혜를 내가 왜 먹어! 그러니까 그깟 돈 몇 푼 주는 걸로 유세 떨지 말고 통장으로 부쳐! 아니면... ! 그럼 되겠네. 당신, 죽어! 죽어 버려! 그럼 내가 갈께! 됐어?”
끔찍했다. 그야말로 끔찍한 폭언이었다. 그럼에도 수화기 너머의 순옥은 화를 내기는커녕 아무런 대꾸도 하지 못 했다. 그저 끅끅대는 목구멍 안 쪽의 서러움만이 간간히 새어나올 뿐이었다.
하진아! 그만해...”
오죽했으면 곁에서 듣던 친구 유정이 나서 만류할 정도였다.
그럼에도 순옥은 꿋꿋했다. 떨리는 음성으로 같은 말을 반복했다.
... 그래도 와. 8시야! 오면 돈을 줄께. 잊지마 8시야. 더 일러도, 더 늦어도 안돼. 그게... .... .... ....
안 가! 안 간다고! 몇 번을 말해야 돼! 안 가! 이 미...!”
통화는 그걸로 끝이었다. 하진이 별안간 휴대폰을 내동댕이쳤기 때문이었다.
..... 흑흑... 누가! 누가... 엄마야! 크흐흑...”
하진이 얼굴을 감싸 쥔 채 주저앉았다. 순옥의 마지막 말 때문이었다.
잊지마 8시야. 더 일러도 더 늦어도 안돼. 그게... 엄마로서에 내 마지막 부탁이다.
*
5년 전, 급히 마련된 빈소 앞, 몇몇의 사람들이 모여 수군대고 있었다.
뭐예요? 저 여자 미친 거 아니에요?”
그라게 내 말이... 즈그 남편 빈소에서 처 웃는 년은 내 생전 처음봤다아이가! 거 참 망측스럽고로...”
사람들의 시선은 온통 상주이자 피투성이 환자복을 입고 실성한 듯 웃는 순옥을 향해 있었다. 갑작스런 교통사고로 죽은 영정사진 속 그녀의 남편, 즉 하진의 아버지도 활짝 웃고 있었건만, 죽은 이와 달리 산 자의 웃음은 타인을 설득하기 어려웠다.
비록 그것이 기구한 제 인생과 기어이 찾아온 끈질긴 불행에 대한 허탈감 때문일지라도 말이다.
하지만 인간은 늘 쉽고 얄팍하며 또 자극적이서 본인이 이해하기 쉬운 상황을 믿게 마련이다. 그들이 그랬다.
어허! 몰랐소? 저거 원래 미..년이요.”
? 그건 또 뭔 말이오?”
조울증인가 뭐신긴가? 원래부터 정신병 있던 여자라 안 하오! 하진애비도 그렇지 어디서 재혼상대라고 데려와도 저딴 걸... 어이구 쯧쯧
하이구... 어쩐지 정신병 있는 년이었구만! 하이구 무셔라... 그래서 즈그 서방 잡아 먹고 쳐 웃고 있구만... 으이구! 내가 복창이 터져서 원!”
즈그 서방을 잡아먹어요? 그건 또 뭔말이래? 장서방 사고로 죽은 거 아니오?”
! 몰랐소? 저 년이 자살한다고 난리를 피워서 그거 살린다고 하진애비가 급히 차를 몰다 빙판길에서 그 사단이 난 거 아니오! 으이구... 저승사자는 뭐 하나 몰라? 죽겄다는 년은 따로 있는데, 저건 안 데려가고, 왜 애 꿎은... 어이구! 하진아 언제 왔냐! ... 들었냐? 어이구 어린 것이 이를 어쩐다냐...”
어린 하진의 눈이 이글거렸다. 실성한 듯 웃고 있는 새 엄마 순옥과 그녀에 대해 수군거리는 사람들 그리고 사진 속에서 활짝 웃고 있는 아버지의 얼굴, 모든 것이 하진에겐 견디기 힘든 현실이었다.
*
3년 전의 가을, 노랗게 변한 은행나무들이 창가를 가득 채운 그런 날이었다.
그 날, 하진의 방도 거실도 집 전체가 온통 노랗게 물들었다.
안돼요! 이건 우리 아빠 집이에요! 저 여자 집이 아니라구요!”
어린 하진의 아우성이 울려 퍼졌지만 소용없었다. 법원에서 나온 사람들은 무심한 표정으로 은행잎을 닮은 노오란 딱지를 여기저기에 붙여댔다.
압류물품
순옥 탓이었다. 회원 둘을 모으면 그 둘이 넷을 모으고 그 넷이 다시 배가 되는 유망한 사업이라고 했다. 조울증과 싸우느라 세상을 잘 몰랐던 순옥은 그것이 흔히 말하는 다단계임을 몰랐다. 하지만 진실을 깨달았을 때는 이미 남편의 사망보험금과 담보로 잡힌 집이 넘어간 뒤였다.
울지마! 당신이 왜 울어! 이 집은 우리 아빠 집이고, 당신이 날린 돈도 당신 돈이 아니라 우리 아빠 목숨값이야! 근데 아무 상관 없는 당신이 왜 울어! 꼴보기 싫으니까 울지마! 차라리 웃어! 그 날처럼 차라리 웃으라고!”
그 날로 하진은 집을 나왔다. 처음엔 친구들의 집을 전전했지만 다행히 한 복지단체의 도움으로 거처를 마련했다. 예전과 다른 환경에도 하진은 악착같이 적응해나갔다.
*
나 때문이야. 내가 대학 얘기만 안 했어도...”
쉼 없이 달리는 버스 안, 먼저 침묵을 깨트린 쪽은 친구인 유정이었다. 그녀의 잦아들어가는 목소리에는 진심어린 자책이 묻어났다.
하진이 말했다.
아니야. 내가 미안해. 그 여자 일로 화낸 거... 절대 니가 미워서 그런 게 아니야. 그리고 대학... 니가 아니어도 갔을 거야. ‘우리 딸 언제 대학생이 되나그거 우리 아버지 입버릇이었거든...”
그랬구나... 후아... 근데 니 말 들으니까 갑자기 나도 화 난다.”
그러게... 미안! 내가 말이 너무 심했지?”
아니 너 말고, 대통령 말야!”
갑자기 대통령은 왜?”
반 값 등롱금이니 뭐니... 말이나 안 했으면... 밉지나 않지! 확 탄핵이나 당해버려라! 키키킥
그러게 이게 다 대통령 때문이다. 반 값 등록금, 그것만 해줬어도 내가 몇 년째 연 끊고 살던 그 미..년 한테 연락할 일도 없었을텐데...”
하진의 마음이 조금은 풀렸다 싶었을까? 유정은 문득 무언가 떠올랐는지 주섬주섬 가방을 뒤지다 캔 음료 두 개를 꺼내어 내밀었다.
흔히 볼 수 있는 노란 색의 캔 식혜였다.
뭐야?”
뭐긴 뭐야! 식혜지! 아까 점장님이 일 끝나고 가려는데 설 이라 몇 박스 주문했다면서 너랑 먹으라고 두 개 챙겨주더라! 뭐해 안 먹고?”
나 식혜 딱 질색이야!”
? 맛있는데?”
몰라! 그냥 그 밥알이 떠다니는 느낌이 싫어! 괜히 설거지 통에 들어 있는 밥풀생각나고!”
얘는! 하여튼 까칠해요! 됐어! 그럼 내가 두 개 다 마시지 뭐!”
니 맘 대로 하세요.”
두 사람이 티격태격하는 사이 어느새 버스는 언덕진 비탈길을 넘고, 행여나 목적지를 놓칠까 정류장 도착을 알리는 안내 방송이 흘러나왔다.
! 다왔나부다. 저길 걸?!”
유정이 벨을 누르며 말했다. 경기도 외곽, 그 중에서도 한 참을 들어가서야 도착한 후미진 곳, 유정은 물론 하진에게도 생소한 곳이었다.
일단 내리긴 내렸는데, 어째 동네 분위기가 좀 으슥하다? 그치? 꼭 뭐라도 나올 것 같아!”
이상한 소리마...”
순옥을 만날 생각에 벌써부터 침울한 하진 때문인지 유정은 부쩍 말이 많아졌다. 하진은 이상한 소릴 한다 핀잔을 주었지만 땅거미가 질 무렵의 마을은 유정의 말대로 그 한산함과 더불어 짙게 낀 안개 탓에 뭐라 표현할 수 없는 오싹함이 느껴졌다.
집은 생각보다 많은데... 왜 이렇게 사람이 안 보이냐?”
그러게...”
유정의 말에 하진이 주위를 둘러 보았다. 낡은 빌라가 서너 채, 그 주위로 띄엄띄엄 떨어진 집들이 십여채, 거기에 도로가엔 불 켜진 식당이나 가게들도 대 여섯은 족히 있었지만 행인은 이상하리만치 보이지 않았다.
알 수 없는 불안감이 두 사람을 사로잡았다. 하지만 하진은 망설임 없이 유정의 손을 잡아 끌었다.
마주보는 것조차 끔찍한 순옥과의 셈을 서둘러 마무리하고픈 것이 첫 번째.
그리고 순옥이 거듭 강조한 약속시간 8시가 코 앞에 다가왔음이 그 두 번째 이유였다.
저기네... 사랑빌라!”
! 나동 302호라고 했지?”
맞아! 빨리 가자 유정아!”
그래... 안그래도 여기 너무 으슥하고 별로다. 그리고...”
?”
아까부터 누가 자꾸 우리 쳐다보는 것 같아서 기분 나빠!”
기분 탓이겠지. 시간 다 됐어 빨리 가자!”
동네 자체가 협소해 순옥이 살고 있다는 빌라를 찾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다만 유정과 하진을 갸웃거리게 만든 것은 주변의 가로등이 모두 깨어져 빌라 주변이 몹시 어둡다는 점과 쓰레기와 폐가구가 아무렇게나 늘어져 있어 집이 아니라 커다란 쓰레기장을 방불케 한다는 점 때문이었다.
이런데 사람이 어떻게 산다니?”
유정이 계단 위까지 늘어선 쓰레기와 천장 위 구석구석 쳐진 거미줄을 보며 한 마디하자 하진도 조금은 굳은 얼굴로 말했다.
그래야 공평하지...”
뭐가?”
우리 아빠 죽게 만들고, 우리 집 날려 먹고... 그 년은 이보다 더 한 곳도 과분해!”
...”
하진의 굳은 표정에 유정의 표정도 따라 굳어져 갔다. 그렇게 터벅터벅 두 사람은 말 없이 계단을 올랐다. 그 흔한 전등 하나 없어 액정이 실금이 간 하진의 2G폰 불 빛까지 동원되야 했지만 쓰레기가 종종 발에 채이는 것 외에 큰 어려움은 없었다.
띵동! 띵동! 띵동! 띵동!’
다소 신경질적이기까지 한 벨소리가 연거푸 울렸지만 순옥의 목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반응이 없는 건 물론이요 인기척조차 없자, 이번엔 유정이 나섰다.
저기요. 안계세요? 저 하진이 친구 유정이라고 하는데요. 하진이랑 같이 왔어요. 아줌마! 안에 안 계세요?”
역시나 반응이 없자 이제껏 꾹꾹 참아오던 하진도 끝내 참지 못하고 폭발하고야 말았다.
이럴 줄 알았어! 이 미..! 이 정...! ? 8시까지... 시간 맞춰 와? 분명히 나 골탕먹이려고 이러는거야! 백만원! 그걸로 사람 비참하게 만들려고! ! 양순옥! 나와 이 미..년아! 너 안에 있지?”
격분한 하진이 302호의 문을 걷어 차며 거칠게 문고리를 잡아 돌렸다.
그때였다.
덜컹! 끼이이익
낡은 철문이 기분 나쁜 소리를 내며 열리고 불 꺼진 적막한 실내가 눈에 들어왔다.
유정이 침을 꼴깍 삼키며 고개만 살포시 내밀어 말했다.
? 안 잠겼네... 안에 계세요? 안에 누구 있어요?”
누군가를 부르기엔 모기소리처럼 작은 목소리였다. 그러자 이번엔 하진이 신발도 벗지 않은 채 성큼 안으로 들어가 현관 옆 전등 스위치를 찾아 켜며 말했다.
있긴 누가 있어! 그 년은 지..병이 있어서 잘 때도 불 켜고 자는 년이야. 내 말 맞다니까! 그 년이 나 골탕먹일려고 먼 길 불러 놓고 도망친거라고!”
수명이 다한 듯 형광등이 깜빡였지만 흥분한 하진의 얼굴 위 분노는 가려지지 않았다. 그러자 기에 눌린 유정이 역시나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대꾸했다.
그래도... 혹시 모르니까 조금만 기다려보자. ? 혹시 알아? 너 등록금에 보탤 백만원 마련하느라 여기저기 꾸러 다니시는지도...”
퍽이나...”
에이... 화 좀 그만 내... 뭔가 사정이 있겠지. 그리고 어차피 온 거니까 속는 셈 치고 안에 들어가서 조금만 기다려보자 응? 아잉 하진아~ ?”
알았어! 대신 딱 30분이야.”
그래 그래!”
유정의 손에 이끌려 마지못해 들어왔지만 막상 안으로 들어오자 내내 차갑기만 하던 하진의 눈시울이 대뜸 붉어졌다.
벽에 걸린 가족 사진 탓이었다.
저거 분명히 압류당했었는데... 아빠... 흐흑...”
사진 속 아버지는 환하게 웃고 있었다.
그녀의 아련한 기억 속 그 날, 그때처럼...
문득 그 날이 떠오르는 듯 하진이 눈을 감았다.
*
아 아빠는! 됐어! 싫다니까! 민망하게 갑자기 왠 가족사진? 새 엄마 때문이지?”
새 엄마는! 이제 엄마라고 부르라니까! 미안해요 순옥씨
하진의 아버지가 머쓱한 표정으로 사과하자 창백한 낯빛의 순옥도 민망한 듯 손사래를 치며 말했다.
아니에요 전 괜찮아요. 차차... 천천히... 저도 그 정도 각오는 했어요.”
고마워요 이해해줘서 그리고! 이런 말 하긴 그렇지만 오늘 사진 찍는 거 순옥씨 때문 아냐!”
그럼 뭔데?”
우리 딸... 하루가 다르게 크니까... 이러다 훌쩍 커서 시집이라도 가버리면 어쩌나... 덜컥 겁도 나고... 그리고 너 대학생 되기 전에 꼭 한 장 찍어둬야 겠다. 전부터 생각은 했었어!”
으이구! 그 놈의 대학생! 대학생! 아빠 딸 성적 간당간당한건 알고 계슈?”
하진은 입술까지 뾰루퉁히 내밀며 심술궂게 대꾸했지만 아버지는 그 모습마저 뭐가 그리 좋은지 한 참을 껄껄껄 웃다 이내 말했다.
하하하! 이 놈 말하는 거 봐라! 이 눔! 지금은 니가 공부에 집중을 못하지만, 아빠는 안다. 넌 절대 머리 나쁜 애가 아냐. 엄마 아빠가 얼마나 공부를 잘했는데. 그리고 너 대학가는 건 아빠 소원이기도 하지만 죽은 느이 엄마 소원이기도 해! 엄마 죽기 전에 아빠가 뭐라고 약속했는지 알아?“
알죠! 암요! ‘우리 하진이 학사모 쓰고 찍은 사진, 내 꼭 보여주리다.’ 아빠! 나 그 얘기 정말 귀에 못이 박히게 들었거든요? 이제 제발 그만! 플리즈!”
으이구! 말이나 못하면! 아는 놈 성적이 그 모양이냐?”
히히히!”
표정 좋네요. 이대로 한 방 찍겠습니다.”
*
허름한 동네 사진관이었다. 함께 웃던 사진사 아저씨의 주름진 얼굴과 눈이 시리도록 환하게 터지던 플래쉬까지... 하진의 기억 속엔 모든 것이 생생하건만 눈을 뜨자 보이는 것은 곰팡이 슨 벽과 깜빡이는 형광등 뿐이었다.
하진아 괜찮아?”
.... ... 괜찮아... 정말 괜찮아.”
괜찮다며 손사래를 치는 하진의 뺨 위로 또르륵 눈물이 맺혀 흘렀다.
그러자 안쓰러움에 따라 고개 숙인 유정이 돌연 무언가를 발견하고 소리쳤다.
이거 뭐지? 편진가? 뭐가 잔뜩 써 있는데? 이거 혹시 너희 새 엄마가 너 보라고 써 놓으신 거 아냐?”
어디 줘봐
하진이 종이를 건네 받았다. 유정의 말대로 하진이 보아라로 시작하는 장문의 글이었다. 비록 하진은 ..! 돈이나 놓고 가지!’라고 투덜대긴 했지만 차분히 순옥이 남긴 편지를 읽기 시작했다.
*
하진이 보아라
마지막으로 꼭 한 번, 네 얼굴을 보고 싶었지만, 그럴 수 없으리란 걸 알기에 이렇게 글로써 대신함을 이해해주기 바란다.
하진아... 내가 많이 밉지?
너를 내 배로 낳진 않았지만 네 아버지와 결혼한 그 순간부터 나는 누가 뭐래도 하진이 엄마였고, 피 한방울 섞이지 않아도 충분히 좋은 모녀가 될 수 있다 믿었어.
비록 너는 나를 쉽게 받아들이지 못했지만, 죽은 엄마에 대한 너의 사랑이 얼마나 깊고 단단한지 알기에 맹세코 한 번도 원망한 적이 없다.
게다가 아버지를 죽게 만들고 가산까지 탕진한 내가 무슨 낯으로 너를 볼 수 있겠니?
*
..... 왜 또 지..이야!”
하진의 미간이 구겨졌다. 편지의 한 쪽 귀퉁이도 하진의 이마처럼 꾸깃하게 구겨졌다.
*
조금 늦었지만 이제와 용기내어 사과한다.
미안하다 하진아...
그때의 나는 너무 아팠어. 네 아버지의 사랑과 관심에 많이 좋아졌지만 부담스런 약값에 약을 줄이자 조울증이란 악마는 또 다시 나타났단다. 그 날도 그랬어. 정신을 차렸을 때의 난, 나를 난도질 하고 있었지. 네 아버지, 그 착한 사람이 얼마나 놀랬게? 피투성이가 된 나를 안고 부랴부랴 병원으로 향했어.
그래... 그게 내가 기억하는 전부야...
잠시 정신을 잃었다 깨어나자 사람들이 말하더구나.
네 아버지가 죽었다고...
나 때문이라고...
그때 내가 받은 충격은 이루 말 할 수가 없어.
정말 미안하다.
좀 더 건강했어야 하는데, 그러지 못했던 내가 나도 너무나 원망스럽고 미안하다.
그렇게 네 아버지가 죽자, 나는 한층 더 막막해졌단다. 조울증이란 병 때문에 세상과 벽을 쌓고 살아온 내게, 우리 두 식구 건사하는 일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어.
누군가는 말했어. 피 한방울 섞이지 않은 너와 나는 남이다.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으니 새출발을 해라.
그 사람이 죽고 나를 미워하는 너를 보며 힘든 시기도 있었지만
맹세코 나는 한 번도 그런 생각을 해 본 적이 없다.
난 분명히 약속했으니까...
영원히 당신의 아내 그리고 하진이의 엄마로 살아가겠노라고 말이야.
*
어짜라고! 나보고 어쩌라고!”
편지를 읽는 하진의 어깨가 조금씩 들썩이고 있었다.
*
군가는 네 곁에 남은 나를 보며 보험금 때문이란 얼토당토 않은 말을 했지만 그건 사실이 아니야.
여자는 약하지만 엄마는 강하다는 말, 아마 그래서였나봐. 아빠 없이 홀로 된 너를 보살펴야 한다는 책임감에 오랫동안 나를 괴롭히던 조울증 마저 호전됐을 정도니까.
너로 인해 엄마는 의사선생님도 놀랄만큼 건강을 되찾았어...
하지만 그게 독이 될 줄... 누가 알았겠니?
병마와 싸우느라 세상과 벽을 쌓고 살던 내게 세상은 너무나 무서운 곳이었다. 죽은 네 아버지의 소원대로 대학생이 될 널 위해 좋은 것만 해주고 싶었던 내 욕심이...
끝내 너와 나를 갈라 놓을 줄... 어찌 알았겠니...
다단계...
그래 나를 욕하렴, 이 미련하고 몽매한 엄마를 욕하렴...
그래서 네 분이 풀린다면 천번이고 만번이고 그렇게 하련다.
엄마는 정말 멍청했어.
하지만 그 모든 것이 너를 위함이었단다.
그것 하나만 알아준다면 엄마는 그걸로 족해.
무일푼으로 널 떠나보내고 나 역시 쫓겨나 함바집과 식당을 전전하며 죽고 싶은 날도 많았지만 그때마다 나를 붙잡아 준 건 다름 아닌 너였단다.
비록 얼마 안되는 돈이지만 일당을 받고 월급을 받으면 너를 위해, 네 대학 등록금을 마련하기 위해 기를 쓰고 모았다.
내 한 달 중 가장 기쁜 날이 네 이름으로 된 통장에 입금하는 날이었다면 이해하겠니?
하진아... 내 딸 하진아...
마지막으로 한 번 더 네게 미안함을 전한다.
비록 내 죄는 어떠한 벌로도 용서받을 수 없겠지만, 내 비참한 최후가 네게 조금이나마 위로가 되었으면 하는 마음에 고백한다.
얼마 전 이었다.
네 아버지를 그렇게 보내고, 아버지의 목숨값이나 다름 없는 보험금과 네게 있어 친모와의 추억, 그 전부가 담겨 있는 집까지 날려버린 못난 이 엄마가 어떻게 행복하게 살아갈 수 있겠니?
하늘도 결국 벌을 주시더라
어느 날 빈혈로 쓰러져 온 나에게 의사가 묻더구나, 전부터 속이 뒤집어지고 소화가 안돼 미식거리지 않았냐고, 칼로 찌르듯 쿡쿡 아프진 않았냐고...
왜 이 지경이 될 때까지 참았냐고...
위암 3...
그게 이 죄 많은 엄마가 받은 벌이더라.
*
... 이 년... ... 왜 이런데니? 웃기지도 않는다. 그치? 말도 안돼... ... 위암이라니... ... 누가 그런 돈 필요하데?”
하진이 믿을 수 없다는 듯 도리질 치며 물었지만, 유정은 이미 할 말을 잃고 훌쩍이고 있었다.
*
의사는 안쓰러운 얼굴로 보는데, 엄마는 너무나 기쁘고 고마웠다.
내가 죽으면 너희 아버지처럼 보험금이 나오겠구나, 그럼 그 돈으로 우리 하진이 대학 등록금도 하고 집도 하나 얻을 수 있겠구나, 그 생각에 어찌나 감사하고 고마운지 눈물이 핑 돌 지경이었다.
그래서 엄마는 그 길로 달려가 제일 비싼 보험을 들었다.
하지만 그 마저도 엄마의 착각이자 무지의 소치였다.
보험사 말이, 이미 위암 판정을 받은 나는 위암으로 죽어도 보험금이 나오지 않는다더라.
화가 나 이 자리에서 목을 매 죽어도 나오지 않냐 따져 물으니, 자살해도 보험금이 나오지 않는다. 그 말만 하더라.
엄마 참 미련한 사람이지?
그래... 그러니까 다단계에 빠져 아빠 보험금도 날린 거지...
급히 사정해 봤지만 이미 납입된 보험금은 돌려 줄 수 없다더라, 게다가 이미 3개월이 넘게 불입되서 금액도 커져 있었어.
그래서 결국 엄마는 나쁜 생각을 하고야 말았다.
.........
하진이 네 몫으로 보험금이 나올꺼라는... 그런 생각을 말이야.
하여 별별 생각을 다 해봤지만 남의 손에 죽는다는 것이 보통 일이 아니더구나, 죄 없는 사람을 범죄자로 만드는 것도 죄스러운 일인데다. 차에 뛰어 들려해도 요즈음은 블랙박스란 게 생겨서 죄다 증거가 남는다고 하더라.
그래서 끝내 네게 사죄하고 포기하려던 찰나...
죽은 네 아버지가 도왔을까?
엄마는 놀라운 사실을 목격하고 말았다.
얼마 전까지 신문지상을 떠들썩하게 만든 그 흉악무도한 연쇄 살인범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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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우연한 기회였어. 전기라도 아끼잔 생각에 평소 불도 잘 켜지 않자, 놈은 나란 존재를 잊은 거지, 늦은 새벽, 놈이 끌고 나간 커다란 여행용 캐리어, 난 거기서 붉게 물든 핏자국과 열려진 틈 사이로 삐져나온 사람의 머리를 봤어.
마네킹이라 하기엔 너무 잔인하게 토막난...
사람의 머리를 말이야.
놈이 시체를 버리려 집을 비운 사이, 엄마는 놈의 집에 들어갔어...
역시나 집 안은 피비린내가 진동하더구나.
그제야 문득, 수개월 전 우연히 본 놈의 집 수도계량기가 떠올랐어.
남자 혼자 사는 집 치고는 물을 너무 많이 쓰길래, 집이 낡아 계량기가 고장이 난 줄 알았는데, 놈의 집 욕조엔 물대신 붉은 피가 가득 채워져 있었어...
그래... 사람을 토막내다 쏟아진 내장같은 부산물과 함께 말이야.
그때 엄마는 결심했다.
어차피 죽을 목숨...
보험금을 타기 위해 내가 아닌 타인에게 죽어야 한다면...
..........
*
하아... 하아... ... 보험은 뭐고 연쇄 살인마는 또 뭐야! 말도 안돼! ... 유정아... 이거 거... 거짓말이지? 그치? ... 이건 너무 말도 안되잖아? 그치?”
... 하진아... ... 나 갑자기 너무 무서워...”
*
그래, 놈에게 죽으면 보험금이 나온다.
엄마는 오직 그 생각만으로 놈에게 접근하기 시작했어.
그리고 알게 된 놀라운 사실은...
놈에겐 이미 무려 1억원의 현상금이 걸려 있었다는 거야.
나는 미칠 듯이 기뻤다.
내 딸 하진이를 위해 보험금과 현상금 1억을 줄 수 있다니...
먼저 간 그이가 얼마나 기뻐할까?
어서 빨리 그 이를 찾아가 자랑할 생각에 잠도 오지 않았다.
하진아... 이 말을 전하는 것이 너에게도 또 나에게도 너무나 힘든 일이겠지만, 어쩜 네가 이 편지를 읽고 있을 때 쯤, 엄마는 이미 아빠를 만나러 가고 있을지도 모르겠다.
*
... 하진아 이거 진짤까? 이게 사실이면 우리 빨리 도망쳐야 하는거 아냐?”
겁에 질린 유정이 떨고있는 하진의 손을 움켜쥐며 물었다. 하지만 그 순간 낡은 편지지 위 휘갈겨 쓴 글자 몇이 아스라이 번져갔다. 어느새 뚝뚝떨어지기 시작한 하진의 눈물때문이었다.
얼마 안 남았어... 마저 읽어야 돼... ...! ...! 누가 그딴 돈 필요하데! 흐흑...”
그렁그렁해진 눈시울을 훔치며 하진은 편지지를 넘겼다.
*
놈을 쫓기 시작한 지 벌써 일주일, 어찌 알았는지 최근엔 놈도 나를 의식하는 게 느껴진다. 대낮에 불쑥 벨을 누르고 찾아와 비린내가 나지 않냐 되묻는 것부터, 일을 마치고 돌아오는 골목길 어귀에서 나를 노려보는 모습하며, 나는 조금씩 내 목을 조여오는 놈의 손길을 느낀다.
네게 너무 이르지도, 늦지도 않은 8시에 와주길 간절히 소망한 이유도 그래서다.
혹 네가 놈과 마주치지는 않을까...
나는 그것이 두려웠다.
혹 이 편지가 네게 제대로 전해진다면, 반드시 신고하여 이 세상에 더 이상 그 흉악한 놈의 손에 죽임을 당하는 이가 없도록 애써주길 바란다.
엄마의 보험금 3억은 네게 저지른 죄의 댓가이고,
그 못된 놈의 현상금 1억은 나 이후에 생겼을지 모를 피해자들을 구한 네 실천의 댓가다.
사양하지 말고 부디 어긋나버린 네 미래를 위해 옳게 써 주기 바란다.
엄마는 이제 곧 이 세상을 떠나겠지만, 약소하나마 너를 위해 남길 수 있는 것이 있다는 생각에 조금도 슬프지 않다.
도리어 마지막까지 하진이 너의 엄마로 죽을 수 있다는 사실이 행복할 뿐이다.
하진아... 하진아... 사랑하는 내 딸아...
그 동안 엄마 많이 미워했지?
친 엄마도 아니고, 조울증을 가진 이상한 여자를 엄마로 둔 네 고통 내 어찌 다 알겠냐마는, 부디 다음 세상에서라도 꼭 건강하고 밝은 사람으로 다시 태어나 그땐 꼭 우리 하진이의 좋은 엄마가 되어보고 싶구나...
누구보다 부덕한 엄마지만 엄마에겐 죽기 전에 꼭 이루고 싶었던 마지막 소망이 있다.
마지막으로 네 얼굴 한 번만 보고
미치도록 듣고 싶었던 그 말
엄마...
이제 더는 보고 들을 수 없지만, 혹 네 마음이 조금은 편해진다면...
내 무덤가에서라도 한 번 해주면 안되겠니?
사랑한다.
하진아... 미안해... 엄마가 너무 미안해...
p.s 네게 따듯한 밥 한끼 제대로 해 준적이 없던 것이 기억나
밥 대신, 먼 길 오느라 고생한 네가 목이라도 축였으면 하는 마음에
평소 네가 좋아하던 식혜를 만들어 두었다.
정성을 다해 만든 것이니...
한 모금이라도 꼭 먹어주기 바란다.
.
- 너의 두 번째 이자 마지막 엄마 순옥 -
.
소리와 함께 하진이 무너져 내린 것은, 이미 번져있는 편지의 마지막줄을 읽은 후 였다. 유정도 함께 주저앉아 하진을 위로 했다.
... ..! ... 누가... 누가... 그렇게 해 달래? 흐흐흑... 내가 죽으란다고 진짜 죽으면 어쩌냐고... 흑흑흑... 식혜같은 거 필요 없어! 좋아하지도 않는다고! 흑흑흑
하진아... 흐흐흑... 울지마 흐흑흑...”
끌어 안고 오열하는 두 사람의 앞에는 식혜가 반쯤 차 있는 페트병이 놓여 있었다.
신고... 신고하자...”
얼마나 울었을까? 겨우 정신을 차린 하진이 눈물범벅이 된 얼굴로 품 안에서 휴대폰을 꺼내들었다. 유정도 그제야 정신을 차렸던지 앞에 놓인 식혜를 집어 들고 일어나려던 찰나였다.
그 순간...
꺄아아악!”
일어서려던 유정이 돌연 비명을 내지르며 뒤로 넘어져 엉덩방아를 찧었다.
경악과 공포에 찬 유정의 얼굴에 휴대폰을 든 하진의 눈동자도 휘둥그래졌다.
왜 그래?”
저기... ... 저기...”
유정이 가리킨 곳, 그 곳은 순옥의 집 안방이었다. 내내 닫혀 있던 문은 어느새 활짝 열려 있고, 그 안엔 온통 피로 범벅이 된 시체 한 구가 덩그라니 놓여 있었다.
숯은 적지만 길고 단아한 머리, 가녀린 몸, 그리고 주름지고 창백한 손...
단박에 시체의 주인이 누구임을 깨달은 하진이 또 한 번 무너졌다.
휴대폰은 바닥에 떨어지고, 겁에 질려 얼어붙은 두 사람을 향해 누군가 걸어나왔다.
어이구 이걸 어쩌나? 눈물겨운 모녀 상봉의 현장을 내가 다 망쳐놔서 말이야!”
검은 옷에 낡은 야구 점퍼와 모자를 눌러 쓴 20대 후반의 사내였다. 그는 날카로운 눈매로 두 사람을 훑어본 뒤, 곧장 굳어버린 두 사람 사이를 스치고지나 현관 앞에 섰다.
그리곤 문을 잠갔다.
비로소 그의 입가에 자리잡은 비릿한 미소...
분명 생면부지의 사내였지만 하진과 유정은 그가 누구인지 충분히 알고 있었다. 두 사람의 거칠어진 호흡과 정신없이 떨려오는 몸뚱이가 말하고 있었다.
그가... 바로 그 끔찍한 서남부 연쇄 살인사건의 범인란 걸...
... ... 하아... 하아...”
어이쿠... 많이들 놀라셨쎄요? 크크큿 와서 울고 짜고 하는 거 내내 지켜본 보람이 있네 하하하핫! 역시 임팩트는 누가 나오냐보단 어떤 순간에 등장하냐라니까! 하하하핫!”
그는 뭐가 그리 즐거운 지 큰 소리를 내며 웃었다. 마치 가벼운 게임을 하듯 편안한 얼굴이었다. 그것은 그가 커다란 칼을 손에 쥐었기 때문이었지만 한 편으론 지금까지 수없이 숙련되어왔던 행위에 대한 자신감 때문이기도 했다.
한 참을 웃어대던 그가 말했다.
어이 아가씨! 하진이라고 했나? ? 신고하게?”
급히 휴대폰을 주워든 하진의 시선에 눈부심이 스쳤다. 그의 손에 든 칼이 형광등 불빛을 반사해냈기 때문이었다.
하아... ... 신고... 신고...”
! 할라면 하라고 흐흐흣
의외의 반응에 놀란 하진이 당혹스런 눈빛을 보내자 그가 말을 이었다.
칼보다... 니가 누르는 112, 그게 더 빠를 것 같다 생각하면 누르라고! 난 자신있어! 황야의 무법자 알지? 옛날 서부영화라 모를려나? 흐흐흐 어짜피 죽는 건 마찬가지겠지만!‘
말을 마침과 동시에 그의 칼이 하진을 향해 날아들자 놀란 유정이 얼굴을 감싸 쥐었다.
흐읍!”
외마디 신음을 내지르며 질끈 눈을 감는 하진, 하지만 칼은 그녀의 얼굴이 아닌 턱 밑에서 멈춰 섰다.
히히히... 쫄기는 히히히힛! 걱정마! 바로 안 죽일거니까! 그거 알아? 진짜는 죽이는 순간이 아니라... 죽기 직전 바들바들 떨면서 공포에 질린 니들을 보는거야. 운 좋은 줄 알어! 저 여자! 그러니까 너희 엄마가 아주 작정을 하고 뒈..실 생각이라서 내가 오늘 재미를 못 봤거든. 울지도 않고 살려달라 애원도 안하고... 눈 꼭 감고 기도만 하데? 이건 뭐 재미가 있어야지! ..! 눈 밑에 칼 끝을 박아서 도려내는데도 이를 악물고 참데? 하 진짜... 황당해서 원...”
..!”
하진이 눈을 뜨며 외쳤다.
? 못 들었는데 다시 한 번 말해줄래?”
..! 아니 너는 개 만도 못한 새끼야.”
그러자 그는 어처구니가 없다는 듯 칼을 거두며 한 참을 깔깔대고 웃더니 이내 말했다.
하아... .! 그 엄마에... 그 딸이다? 아이구... 효녀 나셨어요 효녀! 내가 편지 다 봤는데... 딱 보니까 너도 썅.년이드만! 도낀개낀아녜요? 크크크... 어떻게 너도 네 엄마처럼 눈알을 도려내 줄까? 아니면... 네 코... 그래 코 좋다. 이번 기회에 두 구멍을 하나로 합쳐 줄게... 어때 마음에 들어? 난 돈도 안 받어! 크크크큿
그가 내뱉는 한 마디 한 마디가 섬뜩하게 파고 들었다. 억지로 참고 있지만 겁에 질려 혼절하지 않는 것이 신기할 정도였다.
얼래? 이건 뭐야?”
아니나 다를까, 그는 돌연 유정에게로 다가가더니 발 끝으로 툭툭 걷어차기 시작했다.
.팔 재미없게 이 년은 벌써 기절했네? 아 이럼 재미없는데...!”
그의 장난기 어린 발길질에도 유정은 꼼짝도 하지 않았다. 이상할 것이 없는 상황이었다. 스릴러 영화가 아닌 현실에서 연쇄 살인마를 만난다는 것, 그리고 그가 눈 앞에서 칼을 들고 위협하고 있다는 것, 그것은 평범한 여대생이 감내하기엔 너무 큰 두려움이자 공포였다.
그는 기절한 유정을 잠시 실망스런 표정으로 바라보다 이내 유정의 곁에 놓인 페트병을 들어 식혜를 그녀의 얼굴에 쏟아 부으며 말했다.
이제부터 시작인데... 벌써 이러면 재미없잖아? 야 일어나! 일어나라고! ! 편지보니까 너 식혜 좋아한다면서? 나두 좋아하는데 키키킥... 나는 벌써 좀 마셨어! 너희 엄마 작살내고 나니까 목이 너무... 마르더라고! 크크큭! 비록 이 식혜 너는 못 먹게 됐지만 대신에 네 친구가 이렇게 얼굴로 마셨으니까! 그냥 그걸로 퉁 치자 알았지? ! 이 씨...아 일어나라고!”
으으윽
그가 버럭 호통을 치며 배를 걷어차자 기절했던 유정이 고통에 신음하며 깨어나 몸부림쳤다.
그럴수록 점점 더 미소가 번지는 살인마의 얼굴...
그러자 눈을 뜨자마자 악몽보다 더 한 현실의 공포를 마주한 유정이 본능적으로 비명을 내지르기 시작했다.
꺄아아악!”
.! 닥쳐! 닥치라고! 아직 시작도 안 했는데 초치지 마라!”
우우웁...”
유정의 비명은 오래가지 못 했다. 놈이 유정의 상의를 끌어 당겨 입에 쑤셔 넣었기 때문이었다.
그 사이 하진의 손은 휴대폰 위에서 고민하고 있었다.
이미 눌린 ‘1’이라는 숫자와 아직 남은 ‘1’‘2’
그리고 통화버튼...
그것 뿐이라면 지금 당장에라도 눌러버리면 그만이었다.
하지만 지금의 믿을 수 없는 상황과 위치를 설명해야 한다는 감당하기 힘든 숙제가 그녀의 손을 주저케 만들었다.
냉철한 이성의 판단도 본능적인 감정의 판단도 모두 최악의 상황만을 떠올렸다. 어쩌면 그것이야말로 살인마가 두 사람을 조롱하며 내보인 자신감의 원천인지도 몰랐다.
그때였다.
문자왔어요!’
난데 없는 휴대폰 속 목소리에 놀란 하진이 휴대폰을 떨어뜨리자 살인마가 칼을 쥔 손목을 배배 돌리며 말했다.
? 신고하려니까 겁나? 그 전에 죽을까봐?”
아니... ... 그게 아니라...”
겁이 난 하진이 손사래를 치며 물러서자 이번엔 살인마가 바닥에 떨어진 휴대폰을 주워 하진의 손에 쥐어주며 말했다.
뭐해? 문자왔다잖아. 확인해야지 크크큭! 죽기 직전에 온 마지막 문자... 두구두구두구두구! 짜잔! 누굴까? 남자친구?”
... 아니요 오... 올 사람이 없는데...”
뭐해? 확인 안하고 크크큿 이거 봐 친구도 궁금해 하잖아! ?”
어느새 유정의 곁으로 간 그는 날카로운 칼날을 유정의 뺨에 가져다 대며 말했다.
흐윽!”
외마디 신음과 함께 꼭 감은 유정의 두 눈에선 연신 눈물이 쏟아져 내렸다. 절망과 두려움이 뒤섞인 참담한 눈물이었다.
그리고 휴대폰을 연 하진이 말했다.
... 아줌마?”
순간 당혹스러운 눈빛과 함께 하진의 고개가 휴대폰과 안방 구석, 붉게 물든 순옥의 시체를 번갈아 확인한다. 분명 순옥은 살인마의 손에 처참하게 도륙되어 쓰러져 있건만, 휴대폰 화면에는 순옥을 뜻 하는 ..이란 이름과 낯익은 번호가 표시되어 있었다.
... 말도 안돼... ... 아줌마는 주... 죽었는데... 어 어떻게... ... 문자를...”
순옥의 편지, 죽음, 그리고 갑작스레 나타난 살인마, 이제까지의 일들만으로도 모든 것이 혼란스러운 하진이었다. 그런데 거기에 죽은 순옥의 문자까지 발송되자 하진의 머릿속은 하얗게 새어버리고 말았다.
꿈이라면 모를까. 하진의 상식으론 절대 불가능한 일이었다.
믿을 수 없는 상황의 연속으로 멍해진 하진이 주저하자 살인마가 다가와 하진의 휴대폰을 넌지시 훔쳐보며 말했다.
뭐야? 아무리 새 엄마라도... 넌 니네 엄마를 ..이라고 저장하냐? 아 이거 완전 또...! 크크큿 좋아! 마음에 들어! 딱 내 스타일이야! 그래... 죽은 저 년이 뭐라디?”
하진이 말했다.
노래.. 노래를 부르래요.”
? 노래? 캬아~ 이거 모녀가 쌍으로 또..이구만? ...! 니네 진짜 버라이어티 하다! 애미는 죽고 싶어 안달이고, 딸 년은 지 애미 죽은 자리에서 노래라? 크크큿 재밌네! 어디 한 번 불러봐! 갑자기 나도 듣고 싶다.”
*
하진아! 딱 한 번만 날 믿고, ‘섬집아기어릴적 네가 즐겨 부르던 그 노래를 불러다오. 그게 널 구할거야. 제발... 부탁이야 한 번만...
-..-
*
이해할 수 없었다. 이유조차 알 수 없었다. 어릴 적 자신이 즐겨 부르던 그 노래 섬집아기가 어떻게 자신을 구할 수 있는지, 하진의 머리론 도무지 납득되지 않았다.
하지만 그것은 죽은 순옥의 부탁이자, 하진이 할 수 있는 마지막 몸부림이었다.
.......마가... ... 엄마가 섬...... ... 느을에...”
하아! 이 또...! 부르라니까 진짜 부르네! 크크큭 아 재밌어!”
구울... 따러어 가면.... ... 아기가... ... 혼자 남아...”
쫄지말고 열심히 불러! 그게 니들 장송곡이 될 테니까! 흐흐흐... 하아암! 그나저나 이 노래... 자장가 같은거라 그런가... 갑자기 좀 피곤하네...”
....입을 보오 다가...”
그때였다. 혼자 희죽희죽 웃어대던 살인마가 돌연 정색하며 칼을 들고 일어섰다. 어느새 창 밖 가득 깔린 초 겨울의 어둠 탓일까? 그의 얼굴엔 피곤한 기색이 역력했다.
그만해! 내가 오늘 무리를 좀 해서 그런지 피곤하다. 재미도 이쯤 봤음 됐고, 이제 슬슬 끝내야지 안 그래? 흐흐흐... 하아암...”
그는 연신 찢어져라 하품을 하면서도 하진을 향해 걸음을 옮겼다.
한 걸음...
또 한 걸음...
그에 반해 하진은 도망칠 생각도 못한 채 두 눈을 꼬옥 감고 순옥의 마지막 부탁인 노래를 불렀다.
...엄마가 부....불러주신... 자장 노래에...”
아 씨.! 그만하라고!”
.... 베고...흐흐흑... 스르르르 흐흐흑... 흑흑...”
너는 주둥이부터 찢어야겠다 크크큭
한 걸음...
또 한 걸음...
살인마가 하진의 앞에 섰다. ‘살려주세요. 제발 살려주세요.’ 유정의 간절한 애원을 비웃기라도 하듯 그의 손이 칼을 고쳐 잡았다. 그의 두 눈이 희고 가녀린 하진의 목덜미를 훑는다.
...... 흑흑흑...”
죽어 이... .!”
높이 들리는 그의 칼, 그리고 마지막 소절을 노래하는 하진.
드읍...흐흑...니다.”
그리고
문자왔어요!’
꺄아아아악!”
날카로운 비명소리 하나가 찢어져라 울려퍼졌다.
*
[긴급 특보입니다. 경기도 서남부 일대를 공포에 떨게 했던 연쇄 살인마가 바로 오늘 체포됐습니다.]
[검경 합동본부는 긴급 브리핑을 열고 경기도 화성에 위치한 모 빌라에서 그간 세간을 떠들썩하게 만들었던 서남부 연쇄 살인마로 추정되는 유력한 용의자 28세의 남성 고모씨를 체포했다고 발표했습니다. 합동본부는 추가 조사가 필요할 것으로 보이나 검거 당시의 현장 상황과 소지하고 있던 흉기로 미루어 고모씨가 범인임을 100% 확신한다고 밝혔습니다.]
[연쇄 살인마, 이름만 들어도 끔찍하시죠? 조금 전 9, 그 흉측한 살인마가 체포되었다는 소식에 대한민국이 발칵 뒤집어 졌는데요. 더 놀라운 사실은 그 살인마를 체포하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 사람이 올해 21살의 예비 대학생, 그것도 여성이라는 사실입니다. JTBO 단독보도입니다]
[늦은 밤 귀가하는 여성들을 주로 노려, 한 때 경기도를 공포에 떨게 만들었던 연쇄 살인마 고씨, 증거를 거의 남기지 않는 완벽주의와 주로 비가 오는 밤에 활동하던 특성 탓에 자칫 영구 미제사건이 되는 건 아닌가 하는 우려를 낳았던 그가 바로 오늘 9시 경기도 화성에서 체포되었습니다. 하지만 더 놀라운 사실은 경찰이 신고를 받고 출동했을 때는 이미 그가 완전히 제압 당한 상태였고, 그를 체포하는데 결정적 기여를 한 사람이 바로 21살의 여성이라는 사실이었습니다.]
*
[ㅇㅇ당 현직 의원이신 장ㅇㅇ님 발언하십시오]
[이번에 체포된 연쇄 살인마 고민철의 싸이코패스 테스트 결과 몇 점이 나왔는지 아세요? 지금 우리 사회는 이런 위험요인들에 대한 대비가 전혀 안 되어 있다 이 말입니다. 그 뿐입니까? 지금 전국적으로 치료 또는 관리되고 있지 못한 정신병력의 환자가 몇 인 줄 압니까? 조울증, 우울증, 환자는 해마다 늘어나는데 누가 무엇으로 그들로부터 우리를 보호할 겁니까?]
[이보세요! 장의원님! 지금 그 발언 문제 있습니다. 살인마 고민철은 싸이코패스입니다. 그런 인간과 아무 문제 없는 정신병력의 환우들을 동일 선상에 두고 이야기하신다는게 말이나 됩니까? 그 얼마나 무례하고 치졸한 발언입니까!.]
[싸이코패스나 뭐나 결국엔 다 똑같은 정신병자들 아닙니까! 국민들이 모두 두려워하고 있어요! 정신병자들이 우글대는 세상이란 말입니다!]
[닥치세요! 그게 무슨 말 도 안되는 얘깁니까! 그들은 치료와 보호가 필요한 대상이지 관리를 빙자한 격리가 필요한 대상이 아닙니다!]
[어허! 그런 안이한 태도가 흉악무도한 싸이코를 방치하게 만든 겁니다. 제가 이 두 눈으로 똑똑히 봤습니다! 살인마 고민철의 과거 병력기록 말입니다. 정신과 치료를 받은 기록이 있다구요!]
[어허! 장의원님 개인의 의료기록은 명백한 개인정보 보호법 위반입니다. 보실 수도 없지만 보셨다면 어디서 봤습니까? 지금 이 자리에서 밝히십시오!]
[... ... 그게... 증권가 찌라시에서 였나? 뭐 암튼! 위험한 존재라 이겁니다!]
[! ㅇㅇ! 어물쩡 넘어가지 말고! 확실히 밝여! 봤어 안 봤어!]
[! ㅇㅇ! 너 깡패야! 국민에겐 알 권리가 있어! 어디서 감히 품위더 없이! 내가 학교를 운영해 봐서 안 다고! 그것들 다 똑같은 것들이야!]
[... 토론이 조금 과열 된 것 같습니다. 두 분 모두 발언 멈춰 주시고요.]
*
[누가 봐도 연약하기 그지 없는 21살의 예비 대학생 장ㅇㅇ양과 김ㅇㅇ, 그들이 끔찍하기 이를 데 없는 연쇄 살인마를 만난 건, 어제 저녁 8시 무렵이었습니다. 어머니의 연락을 받고 찾아간 집, 하지만 장ㅇㅇ양의 어머니는 이미 잔인하게 살해 당한 후였습니다. 이미 신원이 탄로 난 살인마와 연약한 두 여학생, 누가봐도 불을 보듯 뻔한 절체절명의 상황을 이겨낼 수 있었던 건, 따듯한 어머니의 모정과 마지막 순간까지 희망을 잃지 않았던 두 학생의 용기 때문이었습니다.]
[경찰은 이틀 후 오전 10, 서울 경찰청 본관에서 연쇄 살인마 고모씨의 체포에 결정적 기여를 한 공로로 제보자 장ㅇㅇ양에게 현상금 1억 및 공로패를 수여하기로 결정했습니다.]
[우먼센시 단독, 연쇄 살인마 제보자 장ㅇㅇ양의 숨겨진 인생역정]
[불운한 장ㅇㅇ양의 사정 알려지자 언론을 비롯한 인터넷, 독지가들의 온정의 손길 이어져]
[국내 굴지의 보험사 ㅇㅇ보험은 절차상의 문제는 있지만, 약관상의 중대한 위반은 없다 판단하여 살인마 검거에 일조한 장ㅇㅇ양에게 어머니의 사망보험금 3억원과 회사 차원의 격려금 5천만원, 그리고 사내 모금을 통해 별도 마련한 1천만원을 포함 총 36천만원을 지급하기로 결정했다고 밝혔습니다.]
*
대한민국이 뜨거웠다. 전국을 공포로 몰아넣었던 서남부 연쇄 살인사건의 주요 용의자가 체포되었다는 사실도 그랬지만 죽은 순옥과 딸 하진의 기구한 이야기 역시 호사가들이 입방아를 찧기에 더없이 좋은 소재였다.
세계 각국의 언론도 앞다투어 살인마 고민철의 검거와 순옥, 하진 모녀의 이야기를 대서특필했다.
하진은 죽은 어머니의 보험금 3억은 물론, 한 푼의 세금도 붙지 않는 현상금 1, 그리고 이와 같은 소식을 전해들은 대학측의 배려로 전 학기 전액 등록금을 받으며 대학에 입학 할 수 있게 되었다.
*
유정아... 괜찮아?”
아직도 그 날의 두려움이 가시지 않았던지 병실 안의 유정은 창백한 얼굴로 누워 있었다. 여타의 부상은 없었지만 정신적인 충격이 큰 탓이었다.
유정은 아직도 쉬이 진정이 되지 않는다는 표정으로 하진을 바라보며 말했다.
나야... 괜찮지... 아직도 심장은 좀 두근대지만... 넌 괜찮아?”
...”
표정은 어둡지만 하진은 괜찮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난 아직도... 그게 꿈 같아... 악몽! 다시는 꾸고 싶지 않는 그런 꿈!”
나도... 나도 그래...”
그치만... 사실이지?”
하진은 대답 대신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유정이 조금은 의아한 듯 고개를 갸웃거렸다. 유정이 아는 하진은 원래부터 말수가 적고, 어두운 아이였다. 얼굴 위 드리운 그늘은 그때와 지금, 별반 다를 것이 없건만, 어딘가 달라진 분위기를 느끼는 유정이었다.
근데... 하진아! ... 조금 변한 것 같애
내가? 아냐 전혀...”
아니야! 뭐랄까? 조금은... 어른스러워졌달까?”
얘는!”
진짠데...”
약간의 어색한 침묵이 흐르고, 이번엔 하진이 먼저 말을 꺼냈다.
나 그때 많이 놀랐다.”
나두야! 내가 얼마나 놀랬게!”
아니 그거 말고...”
그럼 뭐?”
꺄아아악! 너가 마지막에 지른 비명! 나 그거에 놀라서 하마터면 신고도 못하고 너 따라 같이 기절할 뻔 했어! 키킥!”
뭐어! 너 지금 나 놀리는거지? ! 그나저나... 그때 정말 어떻게 된 거니? 그 왜 있잖아... 그 살인마가 너 죽이려고 달려들었을 때 있잖아. 섬집아기그 노래 부르고... 난 그때 너무 놀라서 눈 가리고 비명지르다가 그대로 졸도했잖아. 대체 그 다음에 어떻게 된거야? ?”
그거?”
그래! 그거!”
비이밀!”
? ! 너 혼난다! 나 칼 가져올거야!”
히히히! 장난이야. ! 나 가볼데 있는데... 너무 오래 있었다. 우리 유댕이! 많이 놀랐지? 몸조리 잘 하고, 낼 퇴원이람서? 퇴원하고 보자! 모레가 경찰서 가서 표창장 받는 날이니까 잊지말고!”
하진이 유정의 볼을 잡아당기며 장난기 어린 표정으로 이야기하자, 답답해진 유정이 제가 베고 있던 베개를 집어 던지며 말했다.
! 장하진! 너 끝까지 얘기 안 해줄거야? 그때 어떻게 된 거냐니까!”
유정이 역정을 내자, 하진은 여전히 장난스런 표정으로 유정의 궁금증을 풀어주는 대신 자신이 쓰던 2G폰을 던지며 말했다.
받아!”
? 이걸 왜 나줘!”
나 빵빵한 4G폰으로 새로 개통했거든! 번호는 010으로 바뀐거 빼곤 똑같아!”
! 그래서 이거 나 주는거야? 이거 뭐에 쓰라고?”
아니 안 줘!”
그럼 이걸 왜 줬는데!”
거기에... 니가 궁금해하는 게 있을거야. 읽어보고 내일 돌려줘! 나 그럼 간다! 내일 퇴원할 때 봐!”
! ! 장하진! ! 여기... 뭐가 있다는거야?”
병실에 홀로 남은 유정이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하진이 던져놓은 구형 휴대폰을 집어 들었다.
*
[20:30:00]
하진아! 딱 한 번만 날 믿고, ‘섬집아기어릴적 네가 즐겨 부르던 그 노래를 불러다오. 그게 널 구할거야. 제발... 부탁이야 한 번만...‘
[21:00:00]
하진아 엄마야 엄마가 쓰던 구형 핸드폰엔 예약 문자 발송 기능이 있는데, 이게 잘 되는 건지 모르겠구나. 부디 앞서 보낸 문자 네가 꼭 받아봐야 할 텐데
지금은 7시가 안된 시간이지만, 네가 이 두 번째 문자를 볼 때면 아마 9시가 되고 모든 일은 끝나 있을거야.’
네게 줄 편지를 쓴 뒤, 엄마는 덜컥 겁이 났다. 놈이 나를 죽인 뒤, 과연 그냥 갈까? 혹시나 우리 하진이를 해치는 건 아닐까? 두렵고 무서웠다.’
놈이 나를 죽인걸로 만족한다면 좋겠지만 그건 온전히 내 욕심에 불과하다는 걸 알았어. 그래서 고심했다.’
그때 문득, 놈에 대해 조사하던 중 본, 쓰레기 봉투가 떠오르더구나, 술과 안주, 대부분 그런 것들이었지
대부분 그때그때 기분 내키는 대로 바뀌는 듯 했지만, 딱 하나... 바뀌지 않는 것이 있었어. 그래 바로 식혜였다.’
놈은 하고 많은 음료수 중 유독 식혜를 좋아하는 것 같더구나. 유독 식혜를 좋아하지 않는 하진이 너와는 달리 말이야.’
너도 알겠지만 엄마는 조울증 때문에 생긴 심한 불면증 때문에 예전부터 종종 수면제를 처방받아 사용해 왔어
그리고 마침 얼마 전, 바보같이 알아보지도 않고 덜컥 보험료를 납입해 버렸다는 사실을 알았을 땐, 죽을 요량으로 먹지 않고 그것을 모아 두었지
어쩌면 너무 막연한 상상일지도 몰라. 놈이 나를 죽이고... 너까지... 하지만 엄마인 나는 어떻게든 할 수 있는데까지 너를 지켜주고 싶었다.’
그래서 놈이 좋아하는 식혜에 수면제를 타서 놓아 두었어. 그리곤 혹시 놈이 볼지도 모를 편지에도 식혜에 대한 이야기를 써 두었지
어짜피 넌, 나도 식혜도 좋아하지 않으니 먹을리 없다는 생각에서 말이야. 혹 먹는다 해도 조금 잠드는 것 뿐이니 괜찮을꺼라 생각했어.’
하지만 지금도 내 바람은 놈이 나를 죽인 후 돌아가, 너와 절대 마주치지 않는 것이다.’
부디... 죽은 네 아버지가 끝까지 너를 지켜주기를... 바라고 또 바란다.’
하진아. 엄마는 이제 떠날 채비를 한다. 베란다 너머의 창문으로 불 켜진 내 집을 기웃거리는 놈의 모습이 보인다.’
내가 자신의 정체를 알고 있는 줄도 모르고 힐끗힐끗 엿보며 다가오는구나, 지금 잠시 불빛에 반짝인 저 물건은 아마도 칼일까?’
하지만 두려움은 없다. 죽음은 아주 오래 전부터 내가 꿈꾸어 오던 것이니까 말이다. 네 아버지를 만나지 않았다면, 또 네가 없었다면, 아마도 난... 더 오래 전에 죽고 없었을지도 몰라
그래서 더 감사하다. 하진아 이제 시간이 얼마 남지 않은 것 같다. 계단을 오르는 놈의 발소리가 들린다.’
많이 사랑했다. 이제 아주 긴 시간이 되겠지만, 60, 아니 70년이 흐른 뒤에라도 내 모습 잊지말고...’
저 세상에서라도 다시 만나게 되면... 그땐 꼭 말해주겠니?’
엄마... 그리고 사랑한다고 말이야.’
사랑해 우리 딸... 안녕!’
*
문자를 읽어 내려가던 유정이 침대에 머리를 묻고 무너졌다.
그리고 조금은 떨어진 곳, 인적 드문 야산, 두 개의 짙 푸른 봉분과 이제 막 흙을 덮은 듯 붉은 황토색의 봉분 하나가 있는 곳.
그 곳에 누군가 엎드려 울고 있었다.
차려 입은 예쁜 옷에 흙이 묻는 것도 모른 채...
곱게 단장한 얼굴 위 화장이 번지는 것도 잊은 채...
엄마그리고 사랑해두 마디에 목매여 우는 아이가 있었다.
때 마침 휴대폰의 벨이 울리며 익숙한 동요 하나가 흘러나왔다.
 
엄마가 섬 그늘에 굴 따러 가면
아기가 혼자 남아 집을 보다가
엄마가 불러주는 자장 노래에
팔 베고 스르르르 잠이 듭니다.
*
.
*
부모란 무릇,
자신의 목숨이 붙어 있는 동안은 자식의 몸을 대신하길 바라고,
죽은 뒤에는 자식의 몸을 지키길 바란다.
- 명심보감 八反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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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http://blog.daum.net/ozthewonderlan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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