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컴맹이었던 사수 이야기
게시물ID : humorstory_447950짧은주소 복사하기
작성자 : 성성2
추천 : 32
조회수 : 3037회
댓글수 : 17개
등록시간 : 2017/01/23 17:59: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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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창작글
오늘 첫 직장의 사수 할아버지에게 메일을 보냈는데 보낸 지 한 시간도 되지 않아 답장이 왔다.
내용은 아직도 잊지 않고 연락해줘서 고맙다며 잘 살라는 내용이었다. 생각해보니 그분을 알고 지낸 지 벌써 14년..
14년의 세월이 지나는 동안 나는 청년에서 중년이 되었고, 총각에서 아이 아빠로 그리고 대머리가 되었다.
 
지금도 그 분을 처음 만났을 때 그리고 일을 전수(?) 받을 때 기억이 생생하다.
 
내 첫 직장은 지금 하는 일과 전혀 상관없는 광고 관련 회사였다. 영업직을 뽑는 자리였는데 면접 볼 때 영업의 귀신이 씌웠는지
면접관들을 감탄하게 하는 화술을 선보였지만, 입사 하루 만에 본연의 들장미 소녀 캔디 자세로 돌아가 수줍음과 낯가림을 시작했다.
내 사수는 정년퇴직을 앞둔 할아버지였는데, 그분은 이 업종에서 진정한 영업의 신이라 불리던 분이었다.
예순을 앞둔 나이임에도 불구하고 모든 이에게 깍듯하게 존댓말을 쓰셨고 (회사의 막내부터 함께 가장 오랜 시간을 보낸 후배에게도..),
영업직이다 보니 술자리가 잦았는데 한 번도 그분이 실수하시거나 술에 취해 비틀거리는 모습을 본 적도 없었다. 
그리고 언제나 단정하게 정장을 입고 다니시는 모든 면에서 진정한 신사였다.
 
그러나 내게는 군대 맞고참보다 더 엄하고 무서운 분이셨다. 항상 내게 입버릇처럼 "너 같은 촌놈이 서울에서 살아남으려면 독해야 한다며
어리바리 행동하지 말고 똑똑하게 행동하라고 하셨다. 말투면 말투, 몸짓이면 몸짓, 업무뿐만 아니라 모든 면에서 그 분은 나를 직장에서
필요한 인재로 만들어 주셨다.
 
하지만 모든 사람에게 존경받고 인정받는 모든 게 완벽했던 내 사수의 유일한 약점은 바로 컴맹이라는 것이었다. 모든 직원의 책상에는 컴퓨터가
한 대씩은 있었지만, 그분의 책상에는 항상 팩스겸용 전화기 한 대와 다이어리 2권 그리고 5권의 명함지갑만 가지런히 놓여있었다.
 
정년퇴직을 얼마 남겨두지 않은 어느 날 영감님께서 (그분이 그만두신뒤 나는 호칭을 영감님이라 부르기 시작했다.) 맛있는 거를 사주시겠다며
남산의 유명한 돈가스 기사 식당으로 데려갔다. 점심시간임에도 불구하고 영감님은 맥주 한 병을 돈가스 두 개와 함께 시키신 뒤 밥 먹으면서
맥주나 한잔 하자고 하셨다. 나는 속으로 '이건 분명 테스트다!! 절대로 맥주를 마시지 말아야지..'라고 다짐하고 있었다.
 
"성성씨 우리 맥주 한잔합시다. 내가 한잔하면서 할 이야기가 있어요."
 
"아닙니다! 저는 업무시간에 절대 술을 입에 대지 않습니다."
 
"괜찮아요. 오늘은 마셔도 되니까 한잔해요."
 
이 영감탱이.. 누가 넘어갈 줄 알고 나도 눈치가 있다고.. 내가 완강히 거부할 때
 
"일단 마셔!! 내가 술 마시면서 할 말이 있다고!!"
 
한 번도 흐트러짐이 없으시던 영감님이 내게 언성을 높이시며 편하게 말씀하신 것은 처음이었고 그제야 나는 잔을 들고 영감님이 따라주시는
술을 받았다. 그리고 한 잔이 서로 오간 뒤 영감님은 내게 회사에서 멀리 있는 남산까지 온 목적을 말씀하셨다.
 
"이제 나도 이 직장을 떠날 때가 되었는데 성성씨한테 하나 부탁할 게 있어요. 그런데 이게 성성씨 시간을 뺏을 수도 있고 어려운 부탁이라.."
 
"저는 괜찮습니다! 뭐든지 시켜만 주십시오!"
 
"내가 다른 건 모르겠는데 컴퓨터라는 것을 하나도 모르겠어. 지금보다 조금 젊었을 때는 이 나이에 그까짓게 뭐 얼마나 필요하겠어 하며 넘겼는데
이제 이 회사 그만두고 다른 일을 하더라도 아니 집에서 쉬더라도 컴퓨터는 배워둬야 할 거 같아서 성성씨가 매일 조금씩만 시간 내서 컴퓨터 좀
알려줄 수 있겠어요?"
 
"흠.. 저도 그럼 조건이 하나 있는데요. 저한테 말씀을 앞으로 편하게 하신다면 제가 컴퓨터를 가르쳐 드릴게요."
 
영감님은 그제야 표정이 밝아지시며 "정말 괜찮은 거지? 그럼 내가 회사에서는 그렇지만 밖에서는 성성씨한테 편하게 말을 놓을게."
라고 하셨다. 물론 나는 단호하게 "아니요. 회사에서도 저한테는 편하게 말씀하세요!" 라고 했다.
 
그날 이후 영감님은 어색해하시면서도 사무실에서 내게 말을 편하게 하기 시작하셨고, 퇴근 후 특별한 일이 없으면 영감님을 피시방으로
모셔가 컴퓨터에 대해 하나씩 가르쳐 드리기 시작했다. 사실 나도 컴퓨터를 능숙하게 하는 것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100% 컴맹인 영감님
정도는 충분히 가르칠 수 있었다.
 
우리의 모습은 마치 피시방에 같이 찾아온 다정한 아버지와 아들의 모습 같았다. 우리는 함께 나란히 컴퓨터 앞에 앉아 컴퓨터를 같이 작동했고
아주 가끔 컵라면도 함께 먹었다. 마우스를 잡는 것 자체도 어색했고, 독수리 타법으로 키보드를 두들기던 영감님이 양손을 쓰며 키보드를
작동할 무렵 어느 날 영감님이 회사에서 내게 긴히 할 말이 있다며 잠시 밖으로 나가자고 하셨다.
 
"성성아.. 그.. 이메일이라는 것은 어떻게 만드는 거지?"
 
순간 나는 영감님에게 장난이라는 것을 하고 싶어졌다.
 
"아.. 이메일이 없으시구나.. 그거 10만 원 주고 한국 인터넷 협회에 등록해서 만드시면 돼요."
 
설마 속을까 생각했는데 컴퓨터에 대해서는 나를 믿고 따르는 순진한 영감님은 그대로 넘어오기 시작했다.
 
"아.. 그래? 한국 인터넷 협회가 어디 있는 데?"
 
"그게 강남 테헤란로 있어요. 직접 가셔서 해도 되는데 사람들이 엄청 많이 줄을 서서 등록하는데 시간이 오래 걸릴 거에요. 
저는 이미 협회 가입되어 있으니까 제가 대신 도와드릴까요?"
 
"그래? 너 그런데도 가입 되어 있어? 이 자식 능력 있네.. 그래 그럼 내 것도 좀 가입해주고 메일 좀 만들어줘 봐."
 
나는 그 자리에서 바로 10만 원을 받았고, 며칠 뒤 영감님께 그동안 얻어먹기만 해서 죄송하다며 회를 대접했다. 물론 영감님이 주신 그 돈으로..
 
그리고 얼마 후 직원들에게 이메일 주소를 알려주시며 영감님은 자랑스럽게 나도 이제 한국 인터넷 협회 회원이라며 자랑을 하셨고
나는 가방을 들고 도망갔다. 많은 실수를 해도 말을 못 알아들어도 항상 인자하게 설명해주시며 친절하게 나를 대해주셨던 영감님께서
도망가는 나를 향해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욕을 하셨다
 
"거기서 이 깜둥이 사기꾼 새끼야!!!"
 
영감님 그날 회 맛있게 드셨잖아요!!
 
지금도 그때 그분과의 추억을 생각하면 웃음이 지어진다. 지금은 페이스북도 하시는 명예 한국 인터넷 협회 회원이신 영감님이 오래오래
건강하셔서 올 추석에도 그리고 내년 아니 앞으로도 계속 이메일을 주고받으면 좋겠다.
출처 깜둥이 사기꾼 새끼라고 불리게 된 이야기입니다.
지금은 깜둥이 사기꾼 대머리 새끼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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