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미 사주(司州)의 여러 군(郡)은 한(漢)에 의해 함락되었었지만 이 하내군(河內郡)만은 아직까지 함락되지 않고 하내태수(河內太守) 배정(裴整)이란 사람이 끝까지 항전하고 있었던 것이다.
때마침 동해왕(凍海王) 사마월(司馬越)도 하내군을 구원하고자 앞서 여러차례 한(漢)과 교전한 경험이 있는 정로장군(征虜将軍) 송추(宋抽)를 보내지만 석륵과의 싸움에서 크게 패해 도주하고 만다. 이 바람에 하내사람들의 그나마 남아있던 항전의지도 싹 사라졌는지, 몰래 하내태수(河內太守) 배정(裴整)을 사로잡아다가 한(漢)에 항복해버린다.
결국 이리하여 사주(司州)는 완전히 한(漢)에게 넘어가게 된다. 바라던 대로 사주(司州)에서의 항전은 사라지고 진(晉)의 여러 주(州)도 계획대로 깨뜨려놓아, 한(漢)이 완전한 주도권을 쥐게 된다.
- 한(漢)의 내분과 유총(劉聰)의 집권 -
서기 310년 7월. 진(晉)의 연호로는 영가(永嘉) 4년.
한(漢)의 황제, 유연(劉淵)이 사망한다.
진(晉)의 치하에서 억압받으며 보잘 것없던 흉노(匈奴)의 지위를 단기간에 상승시켜 진(晉)을 무너뜨릴 것을 천명했던 지도자답게 끝까지 진(晉)을 몰아세우던 중에 얻은 죽음이었다.
영가(永嘉) 4년에 죽었다. 6년간 재위하였다. 시호를 내려 광문황제(光文皇帝)라 하고 묘호는 고조(高祖), 묘호(墓號 : 무덤의 이름)는 영광릉(永光陵)이라 하였다. 아들인 유화(劉和)가 즉위하였다. - 진서 유원해기
그리고 유연의 뒤를 이은 이는 장남인 양왕(梁王) 유화(劉和)였다. 여기서 잠시 한(漢)에서는 정변이 일게 되는데, 다름아닌 후계자 자리 다툼 때문이었다.
일찍이 유연은 병으로 드러누워 오늘내일 할 때부터 미리 유화를 태자로 책봉하여 후계자로 정한지 오래였는데다, 여러 종친왕들과 대신들에게도 탁고(託孤 : 후계자를 부탁함)하여 자신의 사후에도 뒷말이 없도록 한 것인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피바람의 조짐이 보이고 있었다.
하지만 무엇보다 유화(劉和) 자신이 분란을 조장하고 원인을 제공한 것이나 다름없었다. 황제로서의 입지는 굳건했고 여러 종친왕들이나 대신들로부터도 지지를 받고 있었지만, 유연의 여러 아들들이자 유화와는 이복형제들인 여러 번왕들이 제각기 강대한 군사력을 갖추고 있었던 점을 두려워하고 시기하여 이들을 제거하려 든 것이다.
그 블랙 리스트 중의 제거대상 0순위는 바로 그동안 진(晉)과의 전쟁에 쭉 등장했던 유연의 차남, 조왕(趙王) 유총(劉聰)이었다.
유총(劉聰)은 그동안 쭉 대진전(對晉戰)의 야전 사령관이었던데다 당시 직위또한 대사마(大司馬)라는 고위 군책임직을 겸하고 있었기에 거느린 병력의 규모가 클 수밖에 없었지만, 유화는 이를 꺼려한 나머지 제거하려 마음 먹는다.
유화는 외숙부인 호연유(呼延攸)을 평소 신뢰하여 제위에 오르자 승상(丞相)의 자리에 앉히고 함께 중상모략에 골몰한다. 호연유를 재상으로 임명한 데에는 평소 호연유도 강력한 병력을 거느린 번왕들을 시기했기에 둘이 손발이 맞아난 것이다.
"선제(先帝 : 유연)께서 일의 경중을 생각하지 않으시고 삼왕(三王)에게는 내부에서 강병(强兵)들을 총괄하게 하시고, 대사마(大司馬)에게는 10만여명의 경졸(勁卒)들을 장악한 채 근교(近郊)에 머물도록 하셨으니, 이는 곧 폐하께서 지금 기좌(寄坐 : 손님처럼 남에게 빌붙어 자리를 차지하고 있음)하고 있는 꼴입니다. 이는 곧 추후에 화근이 되어 어찌될지 헤아릴 수 없으니, 원컨데 폐하께서는 일찍 조처하십시오. " - 진서 유화전
기록에서 삼왕(三王)은 제왕(齊王) 유유(劉裕), 노왕(魯王) 유륭(劉隆), 북해왕(北海王) 유예(劉乂), 이 세명을 말한다. 이들 역시 유총처럼 저마다 사병(私兵)들을 거느리고 있었기에 경계할 것을 호연유가 진언한다. 그리고 대사마(大司馬)는 위에서 말한대로 당시 유총의 직책으로, 즉 유총을 의미한다. 결국은 이렇게 위험한 번왕들을 그대로 두는 건 황제의 자리가 위협받는 일이니, 얼른 이 번왕들을 정리해버려야 한다고 조언하고 있는 것이다.
황제 유화와 재상 호연유는 은밀히 자신의 뜻에 동조할 이들을 모아나갔고 여러 번왕들, 특히 궁극적 목표이자 최종보스라 할 수있는 유총을 제압할 만을 힘을 기르며 세력을 키워나간다.
그리고 결전의 날, 이윽고 유화는 숙청의 칼을 뽑아 삼왕(三王)들과 조왕(趙王) 유총(劉聰)에게 휘두른다.
서창왕(西昌王) 유예(劉銳), 장군 마경(馬景)에게는 조왕(趙王) 유총(劉聰)을 공격하게 하고, 호연유에게는 군사를 이끌고 제왕(齊王) 유유(劉裕)를 공격하게 하고, 시중(侍中) 유승(劉乘)과 무위장군(武衛將軍) 유흠(劉欽), 유안국(劉安國)에게는 노왕(魯王) 유륭(劉隆)을, 상서(尙書) 전밀(田密)과 유선(劉璿)에게는 북해왕(北海王) 유예(劉乂)를 공격하게 하였다. - 진서 유화전
기록에 보면 다른 번왕들도 유화에게 가담해 일을 벌이고 있는 모습을 확인할 수 있다. 서창왕(西昌王) 유예(劉銳)처럼 뚜렷이 구별되는 황족 외에도 기록에서 보이는 유(劉)씨 성 가진 이들은 십중팔구 황족이라 봐도 된다.
진(晉)에서 벌어진 팔왕의 난을 떠올리게 하는 부분이다. 이 변란도 팔왕의 난처럼 권력에 눈이 먼 골육상쟁인지라. 예전에 유연은 한왕(漢王)의 자리에 오르면서 사마씨(司馬氏)의 진(晉)나라가 혈육간에 치고 박는 골육상쟁을 언급하며 한심하다고 비판한 적이 있는데 유연의 시체가 채 식기도 전에 이런 난리가 벌어지니 유연이 이걸 지하에서 들었더라면 뭐라 했을까 싶다.
아무튼, 사전에 계획을 세우고 행동으로 옮긴 거사인지라 일사불란하게 움직이는 가운데, 뜻밖의 배신자로 인해 유화의 계획은 어그러지고 만다.
전밀(田密), 유선(劉璿) 등이 사람을 시켜 관문을 뚫고 유총에게로 달아나니, 유총은 휘하 군사들에게 갑옷을 꿰어입도록 명하고 서창왕(西昌王) 유예(劉銳), 장군 마경(馬景)의 군사들을 기다렸다. 유예(劉銳)는 유총이 방비하고 있음을 알아채고 급히 되돌아가 호연유, 시중(侍中) 유승(劉乘) 등과 함께 노왕(魯王) 유륭(劉隆)과 제왕(齊王) 유유(劉裕)를 공격하였다. 호연유와 유승은 유흠과 유안국이 다른 마음을 품었을까 의심하여 그들을 베어죽였다. 이날 노왕(魯王) 유륭(劉隆)과 제왕(齊王) 유유(劉裕)를 참살했다. - 진서 유화전
실패의 계기는 북해왕(北海王) 유예(劉乂)를 치기로 했던 상서(尙書) 전밀(田密)과 유선(劉璿)이 배신을 하면서 부터였다. 특별한 계기없이 유총에게로 항복한 것을 보면 이미 예전부터 유총의 사람이었거나 적어도 그 이전부터 배신을 마음 먹고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전밀과 유선에게 황제의 군대가 자신을 토벌하러 온다는 엄청난 소식을 접한 유총은 즉시 대응에 나선다. 그리고 본래 유총을 공격하기로 했던 서창왕 유예와 마경이 유총이 대비하고 있음을 보고 일이 잘못되었음을 깨닫고 되돌아가 다른 번왕들부터 제압하려 든 것이다.
재상 호연유는 전밀과 유선이 배반했다는 소식을 듣고 의심이 더 커지고 많아진 나머지, 다른 거사동지들까지 의심하여 애꿎은 유흠과 유안국을 죽여버리는 실책을 범한다. 결과적으로 노왕 유륭과 제왕 유유를 죽였다지만 최종보스인 조왕 유총은 놓쳐버리고 만 것이다.
뒤이어 유총의 반격이 시작된다.
유총(劉聰)이 서명문(西明門)을 공격해 함락하였다. 유예(劉銳) 등이 달아나 남궁(南宮)으로 들어가니 유총의 선봉대가 이를 뒤따라 광극전(光極殿)에서 유화(劉和)를 베어 죽였다. 유예(劉銳)와 호연유는 참수되어 네거리에 효수되었다. - 진서 유화전
결국은 황제 유화(劉和) 측의 패사로 끝이난 내란이었다. 유화는 물론이고 그를 따르던 승상(丞相) 호연유(呼延攸)를 비롯하여 몇몇 번왕들과 신하들도 죽임을 당했다. 서기 310년의 일로, 유화의 재위기간은 불과 몇달 남짓이었다.
그리고 유화의 뒤를 이어 유총(劉聰)이 즉위하니, 그가 곧 한(漢)의 제3대 황제, 열종(烈宗) 소무황제(昭武皇帝)다.
유총은 워낙 호전적인 성격이었던지라 진(晉)과의 전쟁은 더 본격적으로 돌입하기 시작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