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닉네임 변경으로 인하여 제가 잠시 삭제 후 재업로드 했습니다. 죄송해용~
도깨비를 마지막 까지 잘 보았습니다.
하지만 저는 오늘 마지막 회에서 조금 마음에 걸리는 대목이 있어서 이 글을 적습니다.
왕 여과 궁녀의 이야기에서 언급된 그들이 저승사자가 된 비밀.
그것은 삶을 쉽게 포기해버린 자들의 죄 값. 즉 자살의 죄 값이라고 말합니다.
그렇습니다. 제가 이번에 이야기할 대목은 ‘자살’에 대해서 이야기함으로 도깨비에서 나온 대목을 비천한 글 솜씨로 작은 비판을 하고자합니다.
물론, 여러분들에게 ‘자살’을 권유한다거나 미화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럼에도 이 이야기를 어찌하여 꺼내는 것인가?
자살을 죄처럼 여기고, 이미 죽은 자들을 무덤 밖으로 꺼내어서는 그들의 죽음이 쉽다고 하거나 나쁜 것이라고 말하는 행위가 어찌 보면 굉장한 폭력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세상에는 사람들의 입에서 나온 수많은 이야기들이 있고, 각자의 이야기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언젠가부터 어떤 이야기들이 힘을 받고 거대해져서는 사람을 지배하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각자의 이야기들은 언제부터인가 묻히거나 경시되거나 나약한 소리가 되어버리기도 합니다.
이 도깨비가 바탕으로 한 동양의 설화들, 죽음의 세계관 역시 인간의 이야기로 내려온 것들이 작가의 이야기와 합쳐져서 우리에게 매체를 통하여 전해지는 것입니다. 그리고 동양의‘구전’들은 우리들의 삶과 생각을 은연하게 지배하고 있는 거대한 이야기이기도 합니다.
그리고 “자살에 대한 죄 값.” 이것 역시 입으로 탄생하여 우리의 입을 지배하는 이야기이기도 하겠지요?
하지만 그 거대한 이야기에 밀려버린 자살을 한 이들의 이야기는 누가 들어줄까라는 생각이 듭니다. 죽음이라는 장소로 건너가 버린 이들의 이야기는 삶을 살아가는 이들에게는 들리지 않는 이야기일 뿐입니다. 그리고 삶을 살아가는 이들은 죽은 자들의 죽음에 대하여 이야기를 하고 그것으로 그들의 죽음을 ‘단정’ 짓습니다.
그리고는 그들의 죽음은 ‘죄’가 되어서 산자들을 위한 도구로 이야기가 되어 삶들을 떠돌게 되는 것이지요.
우리가 아는 그들의 죽음은 그들이 이야기하는 죽음이 아니라 건너, 건너 매체든 이야기든 당사자가 아닌 사람들에게서 전해지는 구전에 불과합니다. 그들이 왜 죽음을 결심을 했는지, 그 삶과의 단절이 시작되는 균열이 언제부터 시작된 것인지는 시체의 부검을 통해서는 나오지 않습니다. 결국 망자의 이야기를 들어야만 알게 되는 것들입니다.
개인의 삶을 사회가, 국가가, 또는 어떤 단체들이 함부로 규정지을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리고 각자의 삶과 죽음은 단순하게 나눌 수 있는 것도 아니고 각자의 고유의 것이기에 죽음 역시 삶과 마찬가지로 재단할 수 있는 것이 아니지요.
김은숙 작가가 망자들을 욕보이고자 하여 썼다고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이 글에서는 단지 조금 아쉬울 뿐입니다.
“구전이나 설화, 민담으로 내려온 것을 바탕으로 쓴 것 아니냐!”
누구는 그렇게 말할 수 있겠지만, 그 것들 역시 이야기 아닐까요? 그리고 지금 이전의 시간들을 살아가는 이들에게서 붙여지고 만들어진 이야기에 불과한 것이지요. 그 말은 이야기를 다루는 작가로썬 그런 이야기들을 단지 입력만해서 원본 그대로 출력만 해서는 조금 아쉬운 것이 아닌가라는 생각이 듭니다.
‘자살관’에 대해서는 김은숙 작가 역시 이야기에 지배당한 이야기꾼에 불과하게 된 것이 아닐까 라는 생각이듭니다. 굳이 구전을 비판적으로 각색하라는 말은 아닙니다. 오히려 원본으로 받아들여도 그로인한 빈틈을 이용하여 다른 갈등구조를 만든 다음에 이야기를 비판적하는 방법도 있지요.
“왕 여”는 자살을 한 인물 중 하나이며, 저승사자가 되었습니다. 하지만 그의 이야기를 보다보면 “수많은 사람을 죽이고 그에 대한 죄책감을 죽음을 회피한 사람이다!”라는 생각이 드시나요? 그의 자살에는 개인의 문제만 있는 것은 아닙니다. 그 시절의 왕이라는 지위 속에서 적혈이 낭자한 삶을 살아야했고, 간신과 충신을 구별하기 힘든 삶을 살아왔습니다. “박 중헌”에 의해서 삶을 재단 당했고, 결국 자신의 선택들의 무게에 괴로워 죽음을 선택한 사람입니다.
그 궁녀 역시 단순한 가해자로 그려지기에는 아쉬움이 많습니다. 애초에 권력을 잡은 “박 중헌”의 손아귀에 있고, 자신의 신분에서 벗어나고 싶어서 비록 여럿사람 불행하게 만드는 선택이지만 나름 삶의 발버둥을 친 것입니다. 그러나 결국 극중에서 나온 것처럼 자살을 했기에 왕 여가 그렇게 말을 했겠지요.
그들의 자살이 정말 개인의 죄로만 생각되십니까? 설사 개인의 죄가 아니더라도 그들의 죽음에는 죄를 붙일 수 없다고 생각됩니다. 죽음과 삶은 붙어있으면서도 분리되는 모순의 동반자입니다. 죄는 삶의 위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의 것이지 죽음을 넘어간 이들에게 붙여질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아, 오해는 하지 말아주십시오. 제가 말한 것은 죽음 그자체가 죄가 될 수 없다는 뜻이지 죄짓고 죽음 이후에 그 죄가 사라진다는 것은 아닙니다.
그런 의미에서 제가 말한 대로 그들의 죄명이 지어진다면, 왕 여는 간신의 입에 놀아나 주체적인 판단을 하지 못하고 사람들의 목숨(죽음)을 함부로 결정한 죄가 적합하겠고, 궁녀는 간신과 붙어서 다른 사람을 해 한 죄가 되겠지요. 그리고 자살이 죄가 된다면 그들은 생애 모든 죄들을 단순히 책임 회피 죄가 되어버리지 않겠습니까? 물론 그들의 죄가 또 개인 몫만은 아니겠지만, 적어도 이 글에서는 자살이라는 것이 죄는 아니라는 이야기를 하고 싶습니다.
현대를 살아가면 ‘자살’이라는 단어는 정말로 친숙해집니다. 그리고 현대가 아니더라도 어느 남녀노소 계급을 막론하고 자살은 다양한 형태로 각계각층에서 벌어집니다.
하지만 이들의 죽음을 단순히 ‘자살’이라는 단어에 묶어버리고 그것이 죄인 것처럼 말해버린다면 망자들의 입장에서는 황당할 수밖에 없겠지요. 결국 그 것에 대해서 판단내리는 것은 언제나 당사자가 아닌 타인들이니까요. “망자는 말이 없다.”처럼 말입니다.
우리는 주로 뉴스 등의 매체를 통해 자살의 소식을 듣습니다. 그리고 건너서 입으로 듣기도 하겠지요. 그러나 그들이 왜 그렇게 되었는지 그들의 마음 속 깊은 이야기들은 누구도 알 수 없습니다. 또한 실업율과 세상에 지쳐 흐드러져가는 수많은 청년들의 자살에는 종종 나약하다, 한심하다, 저렇게 되지 말아야지 하는 사람들의 그 말들도 많은 것 같습니다.
개인의 고통에 대해서 쉽게 말하고 그들의 진지한 이야기를 들어줄 수는 없지만 판단은 쉽게 내버리는 것 같습니다.
너무 또 쓸데없이 길게 이야기를 한 것 같습니다. 이러다 결론이 모호해질까 두려워 서둘러 정하자면
“똥밭에 굴러도 이승이 좋다.”라는 말은 “때린 놈은 발 못 뻗고 자도, 맞은 놈은 발 뻗고 잔다.”라는 말과 다를 바가 없다고 생각합니다. 결국 죽은 자들을 산 자들의 가치판단으로 비웃는 것에 불과하니까요.
저의 글은 자살방조 글은 아닙니다. 다만, 그들의 이야기에 제대로 된 관심을 가지지도 않으면서 주워들은 이야기로 판단하는 것은 위험할뿐더러, 거대한 우리의 삶을 지배하는 이야기에만 판단을 맡기지 말고 다양한 각도로 살펴보는 것도 좋다는 의도에서 쓰게 된 것입니다. 또한 그들이 왜 그런 선택을 하게 되었는지에 대해 관심을 가져준다면 우리가 살아가는 삶의 장소 또한 더 밝은 세상이 되지 않겠습니까?
마지막으로 위에서 말했듯이 김은숙 작가가 그런 의도로 망자들을 욕보이는 의도로 썼다고는 생각하지 않을뿐더러 (은연중에 다들 어떠한 관념에 사로잡힌 것처럼) 저승사자의 컨셉을 짜는 것에서 피하지 못할 선택이었을지도 모릅니다. 그리고 다양한 이야기들이 나와야 또 읽어보는 재미가 있지 않겠습니까? 혹여 제 이야기가 심기를 불쾌하게 하셨다면 넓은 아량으로 재미있는 비판 글을 써주시면 좋겠습니다.